저녁 무렵마다 대폿집들을 다니며 나는 그리운 지난 시절을 떠올릴 수 있었다. 풍경들, 사람들……. 풍경도 사람도 변했다. 아지랑이처럼 기억이 가물가물해진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어디서 무얼 할지, 모두가 보고 싶구나. 가난했지만 낭만이 보석같이 빛나던 세월들이여! ……(중략)
명대폿집, 이쁜 주모들, 그리고 우리네 삶이 다 사라지기 전에 찾아들 가시라. 막걸리 콸콸 부어 주욱 마시며 서로를 보듬어 주자. 막걸리 한 잔이면 삶은 살아볼 만하다고 떠들 수 있는 힘이 금새 생긴다. 독한 양주나 쓴 소주엔 없는 거나한 흥이 우리네 막걸리엔 철철 넘치게 들어 있기에 그렇다.
자, 소중한 인생 엉뚱한 곳에서 헛발질 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가보자. 복 있는 대폿집에서 빛나는 우리의 삶을 축복하자.
건배! 한 번 더 건배! 인생은 소풍이라네. 또다시 건배! --- 머리글 〈다시 찾은 전설의 주모와 풍류의 힘〉 중에서
“아저씨 손 좀 만져보자. 무슨 남자 손이 이리 보들보들하냐?”
매상을 꽤 올려주자 좌판 주인 오순네는 처음 봤을 때와는 영 딴판으로 살랑살랑 내 입 안에 안주도 넣어주고, “아저씨를 위하여.”라며 정답게 건배도 청한다. 이럴 땐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화답으로 이 집에서 제일 고급 안주격인 5천 원짜리 새송이 버섯볶음을 호기 있게 추가한다. 초여름 질긴 해가 떨어지고 사방이 어둑어둑해올 때 나는 광장시장으로 들어왔다. 셀 수 없이 많은 좌판 대폿집이 환히 불을 밝힌 채 빈대떡이며, 순대, 머릿고기, 국수 등을 차려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할 정도다.
서울 종로 5가 보령약국 건너편 광장시장 좌판 골목으로 들어서면 청계천로까지 약 240미터에 이르는 종축, 또 중간을 가로지르는 횡축으로 무려 600여 개의 좌판들이 폭 10미터 골목에 두 줄로 들어서 있다. 그중 300여 개의 좌판이 술과 음식을 팔고 있으니(나머지는 군용물품이나 옷가지, 외제물건 등을 판다) 말 그대로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좌판 ‘대포촌’이다. 그 역사가 100년이다 을사조약(1905)이 체결된 후 일본의 경제침략을 막기 위해 ‘조선 최초의 첨단 시장’으로 개설된 이곳은 전차가 다니면서 더욱 번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 열기는 식지 않고 이어진다. ……(중략)
완도집 이쁜 언니는 돈 많이 벌어 완도에 전복 양식장 차려서 지금은 얼굴 보기 어렵다 하고, 광장시장 최고 미인이라 소문난 명자넨 남정네들로 들끓고, 그리고 ‘현태네’, ‘강경 할머니집’, ‘광주집’, ‘자선네’, ‘안나의 뜰’, ‘모녀집’……. 올망졸망한 간판들이 정겹다.
‘기철이 엄마네’ 안주는 정말 푸짐하다. 큰 손으로 돼지껍데기와 머릿고기를 덥석덥석 담아준다. 서른다섯 살 기철이가 아직 장가를 못 가 걱정이란다. 깍두기 국물 맛이 시원하다. 열여덟 살부터 40년간 줄곧 이곳에서 장사를 해온 최고 고참 사장님이다.
‘할머니집’의 함경도식 아바이 순대는 불티나게 팔린다. 그 자리에서 먹는 사람, 포장해가는 사람들로 정신이 없다. 할머니는 8년 전 여름에 돌아가시고, 17년 전부터 같이 해온 외며느님이 대를 이어 장사하고 있다. 며느님은 명문여대 출신이고 할머니 아드님도 명문대 출신이라 결혼할 때 시장 안이 떠들썩했다고 주위에서 귀띔해준다. 단골이 무려 “1,000명”이라고 아주머니는 단언한다. 머릿고기가 냄새도 안 나고 맛도 깊이가 있다. 홀로 막걸리잔을 마주하고 앉은 손님은 25년째 단골. 대학생 때 술과 고기를 먹고 돈이 없어 도망갔다가, 후일 돈 벌어 외상값도 갚고 단골이 됐다고 털어놓는다. ……(중략) --- 〈늘어선 좌판에 넘쳐나는 사연들 - 서울 종로 5가 광장시장〉 중에서
내가 자란 60년대는 대중문화의 황금기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영화가 대단했다. 한국영화의 전성기였고 서울은 시네마 천국이었다. 영화 한 편 보면서 울고 웃는 것이 최고의 호사였다. 그 당시 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열기는 지금 세대들이 상상하기 불가능하다. 〈춘향전〉같은 빅히트작이라면 기차만큼 긴 줄을 서야 했다. 여름철 전염병이 창궐할 때도 극장 입구에서 의무적으로 예방주사를 맞는 아픔과 번거로움을 참으며 영화 보기를 결코 주저하지 많았다. 한여름에는 찜통 같고 겨울에는 하얀 입김을 뿜으며 영화를 보면서도 관객들은 마냥 행복해 했다. 그게 60년대의 영화관이었다.……(중략)
그 당시 좀 거창하게 말하면 내 생애 가장 중요한 사건을 일으킨 메우 중요한 영화가 있었다. 1968년 작 〈미워도 다시 한 번〉이다. 왜 생애까지 운운하냐하면, 여주인공 문희를 보고 여인에게 난생 처음 걷잡을 수 없는 욕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무슨 가당치 않은 욕정이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분명 내 감정은 욕정이었다. 그러니 나에겐 역사적인 사건! 아, 그 눈. 초등학생인 내가 보기에도 문희 아줌마는 깊고도 깊은 뇌쇄적인 눈을 가졌다. ……(중략) --- 〈60년대 서울 블루스 - 서울 왕십리 대중옥〉 중에서
이곳은 중국에서는 보기 드문 막걸리를 판다. 막걸리 맛이 궁금했다. ‘한판 벌여 볼까?’ 비행기에 이어 2차다. 주인이 의외로 우리말을 잘 못한다. 옆에서 조선족 종업원들이 주문을 도와주는 걸 보니 한족인가 보다. 막걸리 한 총(2.5리터)이 한국 돈 6천 원이고 반 통(1.25리터)이 3천 원, 머???걸리 반 통하고 마리당 2천 원하는 북한산 북어포 두 마리를 주문한다. 냉장고 안의 큰 통에 들어있던 막걸리를 작은 통에 부어 종이컵과 같이 갖다 준다. 막걸리 맛이 꽤나 시큼하다. 상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 맛이다. 시원한 게 오늘같이 더운 날씨엔 제격이다. 술술 잘도 들어간다. 북한산 냉막걸리다. ……(중략)
흔들흔들 강변으로 걸어간다. 강도 검고 건너편 북한땅도 검다. 북한과 연결돼 있는 두만강 철교도 검다. 어두운 시절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아파한, 그리고 티 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고자 했던 시인 윤동주도 수없이 이 강변을 걸었을 것이다. 검디 검은 이 산하에서 소리 없이 절규했을 것이다. 여기 북간도는 아직도 검다. 술 취해 휘청거리는 내 모습이 부끄럽다. 분열되어 으르렁거리는 조국의 모습은 더 부끄럽다. 강 건너 저기는 우리 땅인가 아니면 적의 땅인가. 시인은 죽어서도 우리를 얼마나 부끄러워할까. 두만강 막걸리엔 슬픔을 탔는지 미움을 탔는지 뒷맛이 쓰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수줍은 시인과 별 헤는 밤 - 두만강 도문유원지 주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