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잠시 10초 동안 정지화면처럼 멈춰 서 있었다. 세상을 두루 다니며 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도록, 지금 이 순간 챔피언이 되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느껴졌다. 잠시 후 나의 이름이 불려졌다. 많은 외국 바리스타 친구들이 내게 해준 말은 “Congratulations”가 아니라 “You deserve it”이었다. “넌 그럴 자격이 있어”라며 모두들 내게 따뜻한 축하 인사를 해주었다. 그 말이 참 좋았다.
--- p.52
나는 내가 남들보다 항상 느리게 배운다는 것을 안다. 세계대회 참가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가장 먼저 세계챔피언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동안의 많은 좌절들도 나를 멈추게 만들지는 못했다. 오히려 나의 간절함을 확인하는, 내가 커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주는, 많은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고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도구가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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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인생을 깨달으며 살아간다. 길을 잃고 외롭게 나 홀로 어느 길 한 귀퉁이에 서 있다고 느낄 때,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내게 친구가 되어주고, 나는 누구도 가보지 않았던 길을 그 친구와 함께 걸어간다. 그 길은 지도에도 없는 나만의 지도가 되고,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 길을 알려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 p.64
나는 어렵지 않은 커피를 만들고 싶다. 말보다는 몸으로 보여주고 쉽게 이해되는 커피를 하고 싶다. 새로운 지식의 전달과 습득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는 잘못된 지식으로 인한 오해의 가지들을 제거 해주고 싶다. 나의 커피는 쉽다. 재미있다. 엉뚱하다. 나의 커피는 멋지지 않다. 그리고 보기에는 엉뚱하고 멋없어 보이지만 나는 내 친구인 커피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바리스타다.
--- p.91
나에게는 정해진 추출의 세팅값이 없다. 기준만 있을 뿐이다. 나에게 추출에 대한 자료는 실수와 실수가 만들어준 시행착오의 다양한 프로파일이다. 그래서 항상 기대된다. 이번에 만나는 커피는 어떤 성격을 가졌을까, 어떻게 기분을 풀어줄까를 생각하면서 항상 설레는 마음으로 커피를 만난다. 이것이 커피를 잘 추출하기 위한 방법이자 라떼아트를 위한 추출 방법이다.
--- p.102
두꺼운 거품을 이용해서 로제타에 크레마를 넣으려면 일반적인 핸들링으로는 쉽지 않다. 크레마와 닿는 거품의 면적이 넓어져 로제타의 끝이 뾰족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천천히 크게 출렁이며 많은 양의 우유가 나오는 롤링 기법으로 해주면 둥근 잎 사이에 크레마가 들어간다. 이렇게 미션을 만들어 연습에 임하면 정확한 방향성으로 반복연습을 할 수가 있다.
--- p.106
쉽게 한다는 것은 대충한다가 아니라 완벽하게 알고 있고, 디테일하게 알고 있어서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사람들의 눈에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실수 좀 하면 어떤가. 소위 전문가, 우리끼리만 아는 일에 너무 완벽하려다 보면 즐기지 못한다. 우유거품 신경 쓰다 크레마가 굳어버려 망치면 안 된다. 시작부터 즐겁게 하지 못하면 나중에는 기약할 수 없다.
--- p.130
앞으로의 인생도 그저 열심히만 살아가지는 말자. 열심히는 당연한 것이고 힘들더라도 포기하지도 말자. 질기고 느린 꿈도 있으니 나도 더 질겨지자. 더 행복해지고 더 재미있게 세상을 바라보고, 주변을 더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하자.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선물처럼 내 앞에 놓인 아이디어라는 물감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그러면 이 노래처럼 내 인생의 멜로디도, 가사도 흘러가듯 써내려져 갈 테니까.
--- p.166
엄폴 커피연구소는 아날로그 커피를 알려주는 곳이 될 것이다. 아날로그는 낡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것보다 더 감각적인 것이며, 더 고민하는 것이며, 더 재미있고, 더 편안한 것이다. 넘쳐나는 커피 지식과 기계와 장비의 홍수 속에서 고민과 감각을 잃어가는 바리스타들에게 그 잃어버린 오감의 감각을 찾아주고 싶다. 그저 멋있는 커피가 아니라 재미있고 행복한 커피를 배워서 돌아가는 엄폴의 아날로그 커피 연구소가 머지않아 마련될 것이다.
--- p.180
이 책에 바리스타로서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인생이라는 긴 여행길 중 30대의 길에서 길을 잃었고, 그 때 만난 커피라는 친구와 고마운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배워가고 알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단한 노력이나 재능이 있던 것이 아니라 그저 현실 속에서 꿈만 꾸고 행복하게 바보처럼 묵묵히 견딘, 그리고 오랫동안 느릿느릿하게 해나가는 미련한 한 바리스타의 커피를 향한 행복과 감사, 사랑의 이야기다.
--- p.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