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평안해야 한다고 배운 까닭에 평안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 불안해할 뿐 아니라 불안해하는 데 대한 죄책감까지 느끼는 것이다. 그 결과 염려와 죄책감이 끝없이 반복되는 악순환에 빠진다.
그러나 염려만도 힘든 일이다.
사도 바울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빌 4:6)고 했을 때 그에게 현실 감각이 없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 것만도 힘든 일이다.
염려를 덜하면 어떨까? 화요일에만 염려하거나 큰 시련이 닥쳤을 때에만 염려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힘든 일이다.
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그런 여지를 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것도! 그러나 과연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한 본래의 뜻일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바울은 이 문장을 현재형으로 썼다. 그는 ‘항구적인 염려’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내 식으로 번역하면 “어떤 일을 겪든 그로 인해 늘 숨 가빠하고 염려하지는 말라.”는 뜻이다. 염려 자체는 피할 수 없지만 염려에 갇히는 것은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 「들어가는 글. 염려가 유성우처럼 쏟아질 때」중에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상황을 통제하는 데 열을 올리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 세상을 통제하려 하면 할수록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을 뿐이다. 그리하여 삶은 염려와 실패의 연속이 된다. 우리는 세상을 통제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성경은 보다 나은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바로 완벽하게 통제하려는 생각을 그만두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당신은 세상을 다스릴 수 없지만 하나님께 맡길 수는 있다. 이것이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바울의 말 이면에 있는 메시지이다. 평안은 문제가 없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주님의 임재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다. 혼돈 속을 헤매기보다 바울처럼 주님의 주권 안에서 기뻐하라.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빌 1:12-13).
교회 안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 때문에 골치가 아픈가? “투기와 분쟁”(빌 1:15)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목회자들 때문에 마음이 괴로운가? 그들의 이기적인 동기는 예수님의 주권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
--- 「1장.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불안」중에서
“주께서 가까우시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당신은 혼자라고 느낄지 모른다. 혼자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런 도움 없이 홀로 삶에 직면하는 경우는 단 한순간도 없다. 하나님이 늘 곁에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늘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반복적으로 하신다.
…… 그리고 스스로를 임마누엘이라 일컬으심으로써 늘 우리와 함께하겠다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은 육체가 되시고, 죄가 되셨으며, 죽음을 이기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분은 성령님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로하고, 가르치고, 잘못을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이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셨다’는 그릇된 생각에 빠지지 말라. 그런 생각에 사로잡힐 경우 고독감으로 인해 문제가 더욱 확대될 것이다. 문제에 부딪치는 것과 혼자서 문제에 부딪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고독은 염려를 심화시킨다. 그러므로 혼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두 손으로 하나님을 꼭 붙드는 사람이 되자.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 118:6).”
--- 「4장. 압박 상황에서 평온을 지키는 법」중에서
“당신은 당신이 태어난 장소나 날짜를 선택할 수 없다. 부모 형제를 선택할 수도 없고, 날씨나 바닷속 염분의 농도를 정할 수도 없다. 이렇듯 인생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인생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활동은 선택이 가능하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상을 선택할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라고 하는 공항의 관제사가 될 수 있다. 관제탑에 앉아 생각이라고 하는 항공기의 이착륙을 조정할 수 있다. 생각은 공중을 선회하며 오고 간다. 그중 하나가 착륙하면 당신이 착륙을 허가했기 때문이고, 이륙하면 당신이 이륙을 허가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고 패턴을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옛 현인은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그것이 바로 복된 삶의 샘이다”(잠 4:23, 공동번역)라고 말했다. 내일 행복해지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오늘 행복의 씨앗을 뿌리라. (당신이 누리는 복을 세어 보라. 성경 구절을 암송하라. 기도하라. 찬송가를 부르라. 밝고 긍정적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라.) 내일 비참해지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오늘 자기 연민이나 죄책감, 염려의 늪에 빠지라.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라. 자책하라. 후회를 곱씹으라.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에게 불만을 이야기하라.) 생각에는 결과가 따른다.
염려에서 벗어나려면 건강한 생각을 해야 한다. 문제는 문제 상황이 아니라 문제 상황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 「8장.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부정적인 생각」중에서
“우리는 엄숙한 얼굴로 다짐한다. ‘오늘 나는 오직 참되고, 경건하고, 올바르고…… 칭찬할 만한 것들만 생각할 거야. 아무리 힘들어도 말이지.’ 그러나 이런 생각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모든 생각이 참되고, 경건하고, 올바르고, 순결하고, 사랑스럽고, 명예롭고,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
과연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고백하건대 나는 그렇게 못 할 것 같다. 시도한 적은 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을 위의 성경 말씀에 대입해 보았다. ‘참되고, 경건하고, 순결하고…… 그다음에는 뭐였지?’ 새롭게 떠오른 생각을 여덟 가지 덕목으로 걸러내기는커녕 그 여덟 가지 덕목을 기억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어쩌면 당신은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 장을 읽지 않고 건너뛰어도 좋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여기 보다 간단한 방법이 있다.
목표를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데 두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그리스도는 참되고, 경건하고, 올바르고, 순결하고, 사랑스럽고, 명예롭고,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분이 아니신가?”
--- 「9장.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부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