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낭비하는 버릇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나’ 또한 고갈되는 자원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석유처럼, 물처럼, 낭비는 험악하고도 무분별하게 이루어졌다. 몇 날 며칠이고 밤새 휘발유 같은 인스턴트커피를 들이부으며 뇌를 태웠다. 그러고도 괜찮은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을 땐 그 위로 독한 술을 부었다. 그 방법은 어쩌다 가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만둘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항상 잘해주는 연인보다 어쩌다 한 번씩 잘해주는 연인에게 더 매달리게 되는 인간의 어리석은 심리는 여기서도 통했다. 일단 험하게 쓰기 시작한 물건은 아까운 줄 모르듯이 나의 자기낭비는 가속도가 붙었다.
---p. 18, 몸을 갖고 산다는 것
몸의 문제를 풀어보려고 몸으로 발버둥 치다 지친 어느 날, 나는 비로소 ‘생각’을 좀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의 ‘생각’이 문제였음을 알게 되었다. 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오랜 세월, 나는 ‘생각병자’였다. 생각이 너무 많아 몸을 움직일 여력이 없었다.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수만 가지 생각과 검색결과와 정보들이 에너지를 다 빼앗아 가버려 탈진상태에서 또 다른 생각을 불러오다 보면 하루해가 갔고 한 해가 그렇게 흘렀다.
그 생각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10년 넘도록 몸에만 매달렸으나, 나는 그 생각의 버릇 그대로 몸을 쓰고 있었다. 더 많은 것을 해치우고 더 많이 움직이고 더 건강해 보이려고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버릇 그대로. 그전까지 ‘나를 뺀 세상’을 보며 살아왔다면 그때부터는 ‘나를 보는 세상’을 살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건 더욱 피곤한 일이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의 눈치를 보고 기분을 맞추며 살아가야 했으니까. 여전히 내 삶의 초점은 밖을 향해 있었고 깊숙한 나는 방치되었다.
--- p.28, 나는 당신을 책처럼 읽을 수 있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의 몸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포옹을 하거나 악수를 나누거나 인사를 건넬 필요도 없다. 상대방이 움직이는 모습motion을 보면 그 몸 안에 담긴 감정emotion을 함께 느낄 수 있다. 분석하고 연구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 몸의 마음은 아직까지도 불가해한 영역이라서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우리 삶 속에 선사한다. 그래서 나의 이상형과는 정반대되는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리기도 하고, 쓸모없을 게 뻔한 물건을 사버리기도 하고, 생전 처음 보는 이에게 비밀을 털어놓아버리기도 한다. 다 몸이 시킨 일들이다. 몸은 몸에게 말을 걸고, 몸은 몸으로 그 말을 알아듣는다. 그래서 편안하고 균형 잡힌 움직임을 보면 그 안락한 파장을 느껴 좋은 기분이 든다. 뼈와 근육의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 p.31, 나는 당신을 책처럼 읽을 수 있다
어깨와 팔을 쓰는 방식은 우리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손 내밀어 받고, 손 내저어 거부하고, 당기고 미는 등 의미심장한 동작들이 모두 어깨와 팔에 매달려 있다. 그래서 어깨와 팔 근육은 관계의 근육이다. 책임을 질 때도 우린 어깨로 진다.
--- p.51, 몸의 지도를 새로 그리다
자기관리의 최고 경지는 자세관리다. 자세는 ‘나’를 담아 보관하는 상자이기 때문이다. 고급 구두나 백을 보관하는 방식과 같다. 쓰고 나선 닦고, 심을 넣고, 딸려온 박스에 넣어두어야 변형 없이 오래 쓸 수 있다. 우리 몸을 그 명품 케이스 안에 넣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습관을 바꾸는 일이다. 일단 습관으로 케이스를 단단하게 만들어놓고 나면 그 뒤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없다. 그 안에서 지내기만 하면 습관들이 알아서 우리 몸맵시와 이미지를 관리한다.
몸을 새롭게 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느끼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새로운 패턴들이다. 앉는 법, 걷는 법, 서는 법이 그 기본이다. 그리고 그 모든 여정은 뇌로부터 시작된다. 뇌 안에 새로운 길을 내고 그 길을 통해 느끼고 움직이게 되면 몸의 구조까지 바뀐다. 우리에게 습관적으로 굳어진 움직임의 틀에서(누군가는 그것을 몸의 감옥이라고 불렀다.) 놓여나는 것,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자세를 자연스럽게 느끼는 몸의 착각으로부터 깨어나는 것, 나이가 들면 몸이 삐걱거리게 되어 있다는 미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 p.95, 뇌는 몸에게 ‘큐’ 사인을 보낸다
멋지게 보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멋진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활기를 느끼는 순간 활기찬 사람으로 보이고, 주눅 들어 있는 사람은 아무리 멋지게 차려 입어도 초라하게 보인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 몸느낌들이 쌓여간다는 점이다. 어릴 때부터 소심해서 늘 주눅 들어 지냈던 사람은 그 ‘주눅 든 자세’가 몸에 붙어버린다. 그래서 어딜 가든 구석 자리를 찾아 앉고 푸대접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우리의 인상을 결정짓고 성격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버릇이 된 느낌’이다. 그리고 그 느낌을 느낄 때마다 취했던 자세다. 습관이 된 동작을 오랜 세월 반복하면서 특정 근육이 짧아지고 딱딱해진다. 뿐만 아니라 그 근육을 감싸고 있는 세포들까지 그 감정을 기억하고 익숙한 상태로 굳어버리게 되어 주눅 든 감정 이외에는 점점 더 느끼기 힘든 몸으로 변해버리게 된다. 몸표정이 시무룩해지고 그 몸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폭은 점점 좁아진다.
--- p.100, 몸의 표정은 그런 식으로 생겨나고 굳어진다
“안심하는 근육이 없어서 그래요.”
쥘은 나의 만성적인 어깨결림에 이렇게 깔끔하게 진단을 내렸다.
“릴랙스하는 데도 근육이 필요해요. 복근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듯이 이 릴랙스하는 근육도 꾸준히 갈고닦아야 만들 수가 있고 몸에 붙일 수가 있어요. ‘틈나면 쉬지 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쉬어야 해요. 시간을 정해놓고, 작정하고 릴랙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시간만은 힘을 풀겠다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지요.”
적극적인 휴식이 필요하다. 널브러져 쉬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몸의 생기를 다시 끌어 올리고 흐르듯이 유연한 몸느낌을 되찾는 활동이 ‘적극적 쉼’이다. 바라보고, 기억하고, 느끼는 몸의 감수성을 기르는 활동이다. 그 느낌이 따뜻한 꿀처럼 온몸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다.
기분을 쓰는 법을 익히는 것은 자세를 바로 잡는 데 굉장히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바람 빠진 튜브 같은 몸에 기분은 즉각적으로 공기를 주입해준다. 느린 근육, 우아하고 정확하게 움직이면서도 느긋한 인상을 주려면 깊은 근육이 발달해야 한다. 우리 몸의 가장 깊은 중심, 척추와 골반을 움직이는 근육들은 윗몸일으키기로 키울 수 없다.
--- p.138, 느리고 상냥한 근육을 주세요
우리의 자세를 가장 근본적으로 망가뜨리는 것은 ‘억지로 노력하는 버릇’이다. 자기 것이 아닌 틀 속으로 스스로를 쑤셔 넣기 위해 근면하게 몸과 마음에 망치질을 해대는 버릇 말이다. 오랫동안, 끈기 있게 틀린 방향으로 달려가다 보면 숨만 찰 뿐 원했던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한다. ‘더 힘차게 달려야 하나 봐. 이 정도로 애써선 어림도 없나 봐.’
매 순간 전쟁을 치르듯 사는 습관이 있던 나는 몸을 갑옷처럼 입고 있었다.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느낀 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깜짝 놀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투구를 쓴 채, 무쇠로 어깨와 등을 감싼 채 그 무게에 짓눌려 걷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손에 쥔 과자를 놓지 않으려 하듯, 어른들은 걱정거리를 놓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 스트레스와 긴장 없이 사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 현대인들을 삶 속으로, 경험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은 언제나 ‘해야 할 일’들이다. 부드러움, 촉촉함, 말랑말랑함이 사라진 마음자리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고스란히 판박이 되어 있었다. 부산하게 두리번거리지만 누구와도 눈을 맞추지 않고, 공격적이면서도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저마다의 걱정거리에 깊숙이 틀어박혀 있었다.
--- p.153, 노력하고 있습니까? 유감이군요
“닫힌 몸은 모든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집과 같아요.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있죠.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둔감하게 반응하고 늘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거나 몸을 부딪히거나 물건을 떨어뜨리게 돼요. 눈을 몸 안으로 돌려서 균형을 찾고, 어긋난 부분이나 굳은 부분을 풀어주면 훨씬 맵시 있고 정확하게 움직이게 될 뿐만 아니라 성격에 여유가 생기죠.”
정신적 스트레스도 몸을 닫히게 만든다. 모든 감정적 위협들, 모욕당하거나, 무시당하거나, 데이트 신청을 거절당하거나, 잔소리를 듣거나, 곤란한 질문을 받거나, 고통스런 기억이 엄습하거나, 하다못해 사람들 앞에서 창피당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몸은 수축하고 짧아지고 딱딱해진다.
사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우리 몸을 치고 지나간다. 빗방울에서부터 새똥, 야구공, 다른 사람의 어깨, 자전거, 트럭, 야비한 말까지. 그때마다 우린 본능이 시키는 대로 몸속 깊은 근육을 웅크리고 그 충격을 견뎌냈다.
--- p.237, 닫힌 몸에서 열린 몸으로
우아함을 못 본 척하기란 대단히 힘들다. 누군가가 스스로의 몸 안으로 완벽히 스며들어 하나의 동작을 매끄럽게 해내는 것은 흠 없는 도자기처럼 경탄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거의 생체학적 반응이다. 그것은 잘 가꾸어진 몸과 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 뇌는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뼈대와 근육을 흠모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싱싱하고 건강한 몸, 그리고 그런 몸을 가꾸고 컨트롤하는 지적 에너지에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느낀다. ‘쉽게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은 우리 DNA에 가장 깊숙이 새겨진 욕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지휘봉을 흔드는 모습이나 리듬체조 선수가 경기를 펼지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몸을 움직이며 살아가는 이들의 로망, ‘쉬움’을 그들은 입고 있다.
하지만 그 쉬움은 쉽게 얻어진 게 아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누에고치처럼 끈덕지게 몸을 녹여나갔다. 한순간도 스스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애쓴 만큼 차곡차곡 발전한다지만, 그래도 그게 눈에 보이기라도 했다면 그나마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안개 속에 모래밭을 걷는 것처럼 오로지 한 발짝 앞만 보인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쉬워진다.
--- p.242, 그 모든 자잘한 재앙들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