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암스테르담으로 갔는가?
--- 99/10/20 이희인(heen@ktcf.co.kr)
1.
천국이 존재하지 않을 바에야, 때때로 세상의 어떤 지명들이 천국의 손짓을 대신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유대인들이 갈구했던 시온이라든가, 콜롬부스의 인도, 고갱의 타이티섬, 탈속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티벳까지, 지금/절망의 가운데 있는 자신을 벗어나는 탈출구로서 그곳/이상향의 어떤 지명들이 멀리서도 사람들을 부르는 모양이다.
그런데, 세기말 어떤 이들은 하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을 찾기도 한다. 이완 러셀 맥완의 98년 부커상 수상작 <암스테르담>에 등장하는 두 친구 클라이브와 버넌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갈라진 우정을 가슴에 품은 채 떠나온 두 사람에게 천국 암스테르담이 안겨준 것은 쓸쓸하고 허망한 죽음뿐이다. 그들에게 암스테르담은 천국이 아닌 끔찍한 불신과 배반의 지옥이 된 셈이다.
그렇다면 암스테르담은 어떤 도시인가? 암스테르담 - 그 이름에는 뭔가 뒤가 든든한 자부와 교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중상주의 시대 무역상들의 내밀한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을 듯싶다. 파리도 아닌, 런던, 베를린도 아닌 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의 성격이 소설의 어떤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컨대, 공창(公娼)과 마약, 동성애, 안락사, 심지어는 자살의 자유에 이르기까지, 인간 자유의 극한을 향해 열려 있는 도시가 암스테르담이라고 한다. 어떤 것들은 이미 합법화되어 있으며, 또 어떤 것들은 암묵적으로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제도화되어 있고 촘촘한 법의 그물로 엮여 있는 현대 문명에서, 개인의 자유를 극한까지 추구하고 법제화한 도시 암스테르담이 그들, 전형적인 유럽인들에겐 천국으로 비칠 수밖에 없으리라. 두 친구가 서로를 죽이려는 방법으로 채택한 합법화된 안락사도 감히 암스테르담에서만이 가능한 일이다. 유럽 전문가 이원복 교수의 말마따나 21세기를 미리 엿보려거든 암스테르담을 찾아가 볼 일이다. 그들 두 친구가 암스테르담으로 향한 여정을 쫓아가는 것이 소설의 독법이 될 터이다.
2.
소설은 네 명의 정부를 둔 몰리라는 여자의 장례식장을 스케치하면서 시작된다. 그녀의 마지막 남편 조지를 비롯하여, 예전 애인들이었던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 가머니, 밀레니엄 교향곡을 작곡중인 국민작곡가 클라이브, 유력한 일간지 편집장 버넌까지 영국 최상류층 인물들의 미묘한 관계와 갈등이 차분하게, 그러나 곧 터져버릴 것만 같은 침묵을 안고 장착되고 있다.
소설을 끌고 가는 두 주인공은 클라이브와 버넌이다. 챕터가 바뀔 때마다 작곡에 고심하는 클라이브와, 신문사의 사활을 건 싸움을 치르는 편집장 버넌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교차, 서술된다.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였던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해치는 용서할 수 없는 적으로 변모해 가는지, 때론 좀 억지스럽지만 분명한 스릴을 가지고 진행되고 있다.
이 소설에 탁월한 부분은 클라이브가 작곡의 영감을 발전시키는 과정과 '똥물에 손을 담근' 버넌이 탐욕스럽게 가머니의 폭로 기사를 준비해 가는 과정이 교차하는 장면들이다. 특히 작곡가인 클라이브가 영감을 발전시키는 과정과 작곡한 곡에 대한 감상을 진행시키는 장면을 읽노라면 작가 이완 맥완이 꽤 탁월한 작곡가일 거란 생각마저 갖게 된다. 예술가의 숭고한 창조의 순간과, 자신의 신문을 살리기 위해 비열한 짓을 서슴지 않는 옐로 저널리즘의 속물근성이 대비되면서 독특한 시너지 효과를 빚어내고 있다. 그것이 빚어낸 분위기란 세상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어른/남자들에 대한 음험하면서도 익살스런 블랙코미디의 풍경들이다.
또 한 부분, 작가의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는 부분이 있는데, 약이 든 샴페인을 마신 두 친구가 각자의 방에서 죽음으로 인도하는 환영을 보는 순간이다. 여기서 그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환영은 두 사람의 옛애인 몰리이다. 환각 속의 일과 그들에게 주사를 넣는 네덜란드 의사-간호원의 실제 모습이 아슴한 이미지 속에 녹아들어 소설의 긴장을 절정에 올려놓는다. 죽음으로 치닫는 사람의 환각상태가 꼭 그럴 것만 같다.
우정을 깬 두 친구의 종말은 말할 것도 없고, 언론의 횡포와 프라이버시 침해, 공적인 책임과 사적인 생활의 문제, 폭력으로 전화되는 생존경쟁 등 세기말 개인의 자유에 관한 의미 있는 화두들이 암스테르담을 향해, 소설 곳곳에 잠복해 있다.
3.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머릿속에 떠오른 작가는 셰익스피어다. 핏줄은 속일 수 없는 것일까, 소설의 많은 모티브와 분위기들이 같은 영국 작가인 셰익스피어의 대작들에 빚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전화, 엽서 등 매개물로 인해 점차 증오와 의심을 키워가는 두 주인공은 저 무어인 장수 '오델로'의 모습이고, 회사와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마녀의 꾐(몰리의 사진)을 취하여 탐욕스럽게 변모하는 버넌의 모습은 '멕베스'의 그것이다. 독약에 의한 엇갈린 죽음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맞이한 최후를 연상시키고, 그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몰리의 환영은 '햄릿'이 성곽에서 마주친 부친의 환영을 떠올리게 한다.
한 명 더 있다. 네덜란드 화가 M.C 에셔와 그가 그린 <서로가 서로를 그리는 손>. 암스테르담의 리허설 파티에서 두 친구가 독약을 탄 샴페인을 서로에게 건네는 장면은 <서로가 서로를 그리는 손>의 소설적 재현에 다름 아니다. (그러고 보니 셰익스피어는 영국인이고, 에셔는 네덜란드 화가다. <암스테르담>의 풍기는 음산한 분위기가 일테면 영국과 네덜란드 문화가 부딪쳐 만들어낸 것은 아닐는지)
이러한 모티브와 관련해 소설 초반에 흥미있는 암시를 한가지 발견할 수 있다. 즉, 버넌의 신문이 취재한 하반신이 붙은 샴 쌍둥이와 관련된 대목인데, 그들 육체를 공유한 샴 쌍둥이가 서로의 다른 의견 때문에 서로를 할퀴며 싸운다는 대목이다. 매우 그로테스크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고상한 예술을 창조하는 클라이브나 똥물에 손을 담근 버넌이나, 말하자면 하반신이 붙은, 서로가 서로를 그리거나 할퀴는 쌍둥이는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