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집을 짓는 일이지만 사람이 만드는 다른 구조물과는 다른 바가 많다. 건축은 기술을 사용하되 사람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묻는다. (…) 사람은 집을 통해 자기가 바라는 바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하고, 집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건축은 예술적으로 잘 지은 집을 감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 p.머리말
내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고유한 존재라는 것 이상으로 소중한 것이 있을까? 자기만의 개별성을 인정받기 위해 다들 얼마나 애를 쓰는가? 이 고유성과 개별성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지를 가장 가까이 알게 해주는 것이 바로 건축이다. 건축을 전공하는 이들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실에 터 잡아야 하고, 건축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 또한 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 p.23
이집트 신전의 거대한 벽면에는 그들의 종교와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탑문의 부조는 파라오가 신들 앞에서 적을 무찌르는 장면이고, 신전 안 벽면에는 신들이 파라오에게 성수를 뿌리는 장면도 그렸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장식으로만 여기지만, 사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건축물을 지은 이유이고 “왜 짓는가?”에 대한 그들의 대답이었다. 그들에게 건축은 말이었고 글이었다.--- p.31
건축설계는 새로운 것, 남이 이제까지 말하거나 만들지 않은 것, 뭔가 전위적인 것을 ‘발명’하듯이 만들어내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무언가를 발견하는 작업이다. 훌륭한 건축가는 자기만의 것을 표현하기보다는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잠재하고 있는 것, 표현하고 싶지만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그 무엇을 과감하게 드러내 보이는 사람이다. --- p.44
집을 짓는다는 것은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건축이 삶을 만들고 삶을 바꾼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대의 연출자가 건축가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연출자는 그 집에서 생활하는 사람, 그 집을 이용하는 사람이다. 건축가는 사는 사람의 생활을 결정해준 게 아니고 단지 생활이 이루어지는 무대를 만들어 준 것일 따름이다. --- p.80)
음표와 음표 ‘사이’가 음악을 만들어내듯 건물과 건물 사이가 공간과 환경을 만들어낸다. 건축가는 건물과 건물 사이, 건물과 사람 사이가 연속되는 환경을 만드는 사람이다. 건축을 전공하거나 건축을 교양으로 배우는 것은 이쪽과 저쪽의 무수한 ‘사이’를 발견하는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좋은 건축은 무엇을 지향하지 않고, 무엇과 무엇의 ‘사이’에 늘 있어왔다. --- p.90
독일 국회의사당과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그리고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내가 임의로 선택하여 이 책에 함께 기술했다는 것 외에는 지역적으로나 시대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본질이 세 개의 건축물을 관통하고 있다. 이 건축물들은 어려운 철학적 내용이 아닌, 인간 존재의 원천과 같은 것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건축은 만드는 것이지 발명하는 것이 아니다. 건축이란 우리의 공동체 안에 이미 존재하는 ‘건축 이전의 것’을 발견하여 구조물로 만드는 작업이다. --- p.147
분명한 사실은, 진실한 자동차는 없고 진실한 도로도 없으며 진실한 스마트폰도 없지만 진실한 건축은 있다는 것이다. 비바람을 막아주고 일상을 지켜주며 어떤 일을 하기에 적합한 실용적인 집은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고, 매순간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호소하는 바가 크다. 댓돌에 벗어놓은 부석사의 고무신이나 음악당 대기실의 작은 창이 건물의 진실함을 드러낼 수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건축은 진리를 찾는 학문이 아니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지만, 건축에는 진실한 건축이 분명히 있다. --- p.187
1944년에 루이스 칸은 이렇게 말했다. “마그나카르타(Magna Crarta: 대헌장)를 작성하는 데 최고의 잉크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가장 값비싼 재료를 쓰고 가장 최상의 기술을 동원한다고 해서 기념비적인 건축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잉크가 좋아서가 아니라 근대 헌법의 토대를 이룬 ‘정신’이 담겨 있어서 역사적인 대헌장이 되었듯이, 기념비적인 건축은 최고의 재료나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칸의 말을 바꾸면 이렇게 된다. “마그나카르타를 작성하는 데 최고의 잉크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매일 사용하는 강의실과 폐기된 물탱크로 교사 남윤철과 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데는 값비싼 대리석이 필요하지 않았다.” --- p.274
건축이 이미 있는 것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것은 자기가 집을 설계할 대지 안에 있는 오래된 나무 한 그루를 어떻게 할 것인지 묻는 것과 같다. 건축주를 대신하여 이 나무를 자르는 일에 나선다면 그는 건축가가 아니다. 건축가는 이미 있었던 한 그루의 나무를 자르지 말아야 한다는 쪽에 굳건히 서야 한다. --- p.469
건축설계가 궁극적으로 시간에 관한 것임을 이해하는 데는 그리 어려운 생각이 필요치 않다. 설계 자체는 평면에 그리는 것이니 2차원적인 작업이다. 그러나 그것은 3차원적으로 지어질 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사람은 짧은 찰나 속에서 살 수 없고 지속하는 시간 속에서만 살 수 있으므로, 건축공간은 사람이 머물고 움직이며 생활하는 긴 시간을 위해 수많은 물질로 지어진다. 건축설계는 이렇듯 물질을 통해 시간을 불러내고 이어가는 일이다. --- p.627
건축가가 사용하는 트레이싱 페이퍼는 반투명이다. 절반은 투명하고 절반은 불투명하다. 예전의 것을 절반쯤 받아들이되, 나머지 절반은 다시 새롭게 고치라는 것이다. 건축만큼 질문을 수없이 하는 배움도 없을 것이다. 말하고, 쓰고, 그림으로 만들고, 각종 매체로 설득하고, 이론을 만들고, 기술을 도입하고, 법을 따르고, 인간을 생각하는 것이 건축이다. 신체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감정까지를 이해하고 예측하고 다루는 인간 본연의 실천이다. --- p.697
지나가다가 우연히 본 이름 없는 건물도 이런 지혜를 가르쳐주는데 이 세상의 유명한 건축물과 도시공간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가르쳐줄지 생각해보라. 건축은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지속적인 가치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또한 크고 작은 사물들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관여하고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 건축물 안에 있는 하나의 사물은 방을 거쳐, 건물을 거쳐, 그리고 다시 저 밖에 있는 다른 건물들을 거쳐 세계와 두루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건축은 크고 작은 환경의 의미를 가르치고, 지속가능한 사회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가르친다.
--- p.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