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저서들 왜 어려울까?
『자본론』에는 숨 막히는 나열, 따로 노는 듯이 보이는 문장, 그리고 간결한 공식 등 언어적 몰이와 과잉이 거듭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문체를 수사법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로 인해 글이 난해해지는 근본적인 문제를 초래한다. 원래 하고자 했던 말은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이를테면 마르크스가 『독일 관념론』에서 혁명이후의 삶은 잘 알려져 있다. 마르크스는 “사냥꾼, 어부 목동, 비판적인 평론가 등은 생계수단을 잃지 않으려면 사냥꾼, 어부 목동, 비판적인 평론가로 남아야 한다. 반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도 배타적 범주에 예속되어 있지 않고, 어떤 분야에서든 교육 받을 수 있으며, 사회가 전반적 생산을 관리하고, 그 덕분에 나는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을 할 수 있고,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고기를 잡고, 저녁에는 가축을 돌보고, 식사 후에는 평론을 쓸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부나 목동이나 평론가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이와 같은 목가적인 몽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황금시대 복귀를 그린 이 그림은 미래를 예측하는 그림이 아니라 역사를 거슬러 낙원을 그린 그림 아닌가? ‘아침 사냥, 오후 고기 잡고’는 순간의 기분에서 나온 말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고전주의 전통의 언어유희일 수도 있고, 반어적 묘사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러한 그림을 보고 잘 사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제8장 ‘언어’ 」중에서
평등은 자유에 모순된다
프랑스혁명의 슬로건은 ‘자유’ ‘평등’ ‘박애’ 세 가지 구호가 함께 전체를 이룬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구호는 평화롭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반면, 평등주의자들은 ‘모두에게 같은 것’을 요구한다. 이 요구 사항이 서로 배척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세 번째 구호 ‘박애’가 추가 된다. 결합될 수 없는 일도 박애의 의미에서 결합될 수 있다.
자유는 평등을 수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유는 다름이 없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는 상품교환에도 해당하는 이치다. 젊은 날의 마르크스는 “약탈의 의도는 항상 뻔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속이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리적 힘의 제국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상호 인정을 바탕으로 협상한다.”
이 불분명하게 표현된 말은 약탈과 인정의 전제, 즉 사유재산과 거기에 포함된 경쟁을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따라서 자유와 평등은 민주주의 사회의 기반이 되는 가치라기보다는 자본주의가 작동하기위한 조건들이다.
---「제10장 ‘평등’ 」중에서
도서관에 파묻힌 삶
1849년 7월 프랑스 정부는 칼 마르크스에게 파리를 떠나라 명령하며, 브르타뉴 남쪽 시골에 정착하기를 제안했다. 외딴 시골로 가느니 런던을 택했다. 혁명가이기를 포기하고 학문연구에 기울였다.
그 후의 삶은 1850년 6월 마르크스가 대영박물관의 열람실 이용권을 발급 받았을 때 결정되었다. 열람 이용권 발급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대영박물관 도서관은 당시 40만 권이 넘는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곳 열람실에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앉아 있었다. 1867년에 출판된 『자본론』 제1권이 이곳에서 탄생했고, 그로부터 수십 년 후 엥겔스가 『자본론』 제2권과 제3권으로 집대성한 수많은 발췌문과 메모 초고 등도 이 열람실에서 나왔다.
마르크스가 이 열람실에서 보낸 33년의 세월 가운데 반 이상은 집필이 아닌 독서에 보낸 시간이었다. 대단히 집중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독서에 몰입했으며 중요한 것은 베끼고 자신의 생각을 적은 메모는 수만 쪽에 달한다. 1857년에 시작된 『자본론』 집필 기간 중 읽은 책이 1,500권에 달한다고 하는데 그 대부분을 대영박물관 도서관에서 읽었다.
이 엄청난 양의 독서가 완벽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이었는지,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의 발로였는지, 또는 이해하기 어려운 다른 동기가 발동했기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다.
---「제13장 ‘학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