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실물이 아니다. 한 남자와 독점적인 친밀성을 기반으로 연애나 결혼 관계를 형성하지 않은 여성은 길에 떨어져 있는, 주인을 찾아주어야 하는 물건이나 강아지가 아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소리이다.“맞아 맞아, 여자는 물건이 아니야.”동조하기도 쉽다. 그러나 여전히 인식 깊은 곳에서, 주류 미디어와 문화 콘텐츠에서, 정부 정책에서, 일상적인 대화에서 여자는 결국 연애와 결혼을 통해 사랑 받는 여자친구나 아내,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 p.25
여성은 어떤 차원이든, 어떤 직업과 능력치와 서사를 가졌든, 몇 살이든, 결국에는 아내와 엄마로 수렴된다. 여성들이 연애/결혼/출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을 가졌는지, 아이돌이 되고 싶은 10대 여성에게 연애/결혼/출산이 팬케이크 위에 나타난 예수님 얼굴 같은 해외 토픽보다 관심 밖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 p.30
평생 아이를 뱃속에서 만들고 낳을 일이 없는 인류의 절반은 고통 없이 아이를 낳는 것은 생명 경시를 조장한다며 날뛸 것이다. 하지만 당장 한 달에 일주일을 피 흘리고 또 다른 일주일은 생리 직전에 널뛰기를 하는 호르몬에게 당해야 하는 여성들은 이보다 99배는 고통스러울 임신과 출산을 ‘토스’할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을 선뜻 외면하기 어렵다. 눈 떠보니 나의 유전자를 가진 아기가, 나는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았는데 뚝딱 나타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아빠들에게는 일상적인 경험이니까. --- p.41
어떤 아저씨’는 돈도 없고 나이도 많고 심지어 결혼해서 아이와 아내가 있는데도 그 진실된 인간성 때문에 24살 어린 여자의 가열 찬 대시를 받는다. 나이가 많은 여자는 밥을 잘 사주고 예쁘기까지 해야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 p.63
여성이 방긋방긋 웃지 않아서 분위기가 처지고 일할 맛이 안 난다면, 그냥 그 사람이 무능하다는 증거일 뿐이다. 웃지 않는 여성의 잘못이 아니라. --- p.79
어린 나이, 젊은 육체만 여자의 전부가 아니다. 나이든 여자는 여자도 아니고, 그래서 불행하며, 어린 것이 권력이라고 주입하는 세상에 명치가 있었으면 좋겠다. 세게 치게. --- p.90
여자아이는 어릴 때부터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할 때 “예쁘게 말해보세요”라는 벽에 부딪히며 자란다. 적당히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며, ‘숭허지 않게’자신의 모습을 관리해야 한다고 배운다. --- p.137
책상을 엎으며 말할 것이다. 가슴이 어떻게 생겼든 나는 여자이며, 그것이 예쁘고 말고를 평가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준 적 없다고. 가슴의 미추 여부는 나의 존재를 정의할 수 없다고. 세상에는 다양하고 무궁무진한 형태의 가슴이 있다. 얼굴과 손금의 생김새만큼이나 그 모양이나 크기는 다르고, 천운영의 소설『세 번째 유방을 가진 여자』에도 나오듯, 유두를 3개 가질 수도 있다.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너 보기 좋으라고 생긴 게 아니니 어이 거기, 여자의 가슴에 대해서 할 말이 있으면 몸으로 말해요로도 하지 말고 집에 가라 좀. --- p.200
2000년대 초반 대학입시가 최우선인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미싱은 다른 형태로 둔갑해서 나타났다. 장학금이 나오는 국립대와 교대는 동생들의 학비를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을 시작하는 선택지보다 은밀하고 모호했다. ‘여자애’니까 자취를 시킬 수 없다거나, ‘여자 직업’으로는 선생이 최고라는 사탕발림도 빼놓을 수 없었다. 우리는 다 알았다. 옥상에서 아이스크림을 빨며 동생과 자신의 나이 차이, 부모님의 퇴직 시기 그리고 대학 등록금과 서울에서의 생활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누군가는 모르는 척했고 누군가는 울고불고 싸웠으며 누군가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 p.253
젊은 딸바보들은 알까? 자신을 바보로 만들 만큼 사랑스러운 딸을 낳은 아내들은 대부분 딸을 골라 지우는 성별 감별 낙태를 뚫고 태어났고, ‘딸이라도 잘 키우면 아들 부럽지 않다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으며, 지금은 남의 부모에게 딸처럼 싹싹하게 굴어서 시부모를 ‘며느리 바보’정도로는 만들어야 좋은 며느리 소리를 듣는다는 것을. --- p.264
친구 같은 딸이란 결국 딸이 엄마의 비위를 맞추고 엄마의 욕망대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물론 운 좋게도 진심으로 서로를 아끼며 알콩달콩, ‘친구처럼’ 지내는 엄마와 딸도 있을 것이다. 어떤 딸에게는 엄마와 친구처럼 지내는 것이 강요나 억압이 아닌 자신의 기쁨일 수 있다. 그렇다고 유독 딸에게만 요구되는 감정 노동과 친밀성의 착취가 없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친구 같은 딸이라는 말에 숨어 있는 기만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 p.275
몇 년 전, 중학생이던 동생이 처음으로 페미니즘 책을 사달라고 했다. 어떤 바톤이 내게 넘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책은 그 바톤을 들고 달리는 한 트랙이기도 하다. 내 이전부터 시작된, 나로부터 비롯된, 나 이후에 이어질 이야기들이다.
--- p.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