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서 느껴지는 저항감은 폭동 수준이었다. 편집장이 더 이상은 감내하기 어렵다는 듯 구두로 계약조건을 적시했다.
“반복하지도, 번복하지도 않을 테니 잘 들어. 이제 일주일이야.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얘기야. 더 이상의 기회는 없어. 그 안에 내 마음을 포복절도 하지 못할 경우, 재계약은 요원하다.”
그것은 마감시간을 얼마 안 남긴 홈쇼핑 진행자의 멘트 같았다. 그들은 매번 마지막 기회, 라고 앵무새처럼 떠들었다. 편집장은 아니었다. 다 같은 마지막이 아니었다. 반복되지 않는 마지막은, 곧 끝을 의미했다. 그는 웃음이 사문화된 원고를 거래할 생각이 없었다.
“1년 동안 동굴 같은 옥탑방에서 글만 썼는데도 홍익인간의 시대는 아직입니까? 웃음 유발에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암을 유발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사람 취급도 못 받는 겁니까?” --- p.20
“카페에 두고 간 제 원고요. 제 목숨이 달려 있어요!”
“무슨 내용이길래 그렇게 자유롭게 생과 사를 넘나드는 거야?”
“말하자면 복잡해요.”
“그럼 말하지 마.”
“숨기기엔 길어요.”
“그럼 숨기지 마.”
“그러니까…….”
“내가 죽기 전에는 들을 수 있는 거야?”
“……어떤 사랑이야기. 결핍으로 가득 찬 한 남자와 그와는 정반대로 살아온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예요.” --- p.38~39
그간 임 순경에게 곁눈질하고 귀동냥해온 수사의 ABC를 적용하기로 했다. DNA 아이덴티피케이션, 프로파일링, 디지털 포렌식, 루미놀 리액션 등 여러 가지 첨단 과학수사 기법 가운데서 선택한 것은, 방대한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월드와이드 핸드메이드 리서치였다.
인터넷 검색이었다.
또 하나의 세상. 사람들은 그곳에서 손으로 족적을 남겼다.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때로는 도의적으로, 나를, 때로는 남을. 그것은 모두 로그였다. 그래서 흔적을 추적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었다. 포털사이트에 먼저 입력한 키워드는, 커피공화국. 원고가 사라진 날 그곳을 찾은 이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 p.73~74
아라비아의 별. 무려 11년간의 궤적, 1,771개의 포스팅. 그것은 흔적을 넘어 기록이었다. 일상을 넘어 일생이었다. 그녀의 블로그는 그녀 자신의 삶을 총망라했다. 카테고리별로 라이프스타일, 맛집, 여행, 문화공연 등의 관련 글이 빼곡했다. 커피공화국 포스팅도 그중 하나였다. 특히 연애와 결혼에 관한 내용이 다분했는데, WEDDING 게시판에서는 스타들의 결혼식 사진을 비롯해 커플 이벤트, 연인과의 근교 여행코스, 싱글 탈출 10계명, 결혼 전 체크리스트 등의 콘텐츠가 다수 확인됐다. 연애 칼럼이나 사랑에 관한 시, 명언들도 눈에 띄었다.
“이걸 다 보다가는 눈에 쥐가 날 것 같아!” --- p.92~93
온라인 세계에서는 여권이 필요 없었다. 풍뎅이의 현장 가이드도 필요하지 않았다. 발품을 팔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걸었던 흔적들을 유적지 돌듯 손으로, 눈으로, 그대로 밟았다. 길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의 반대편에서도 사람들의 발자국은 겹치고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또 다른 층위의 경험으로, 흔적으로 남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로그였다.
경험은 공유할 수 있지만, 분리할 수는 없었다. 결국 멈춰버린 그 하나하나의 흔적들은 그녀의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늘 소멸의 편에 서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한 발 한 발 실체적 진실에 접근했다. 실마리의 가장 끝은 두루마리 휴지 한 칸 크기의 사진 한 장이었다. 블로그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지 반나절이나 경과한 뒤였다. --- p.102~103
“계약 초기에는 좋은 작품도 많이 남겼잖습니까. 그 가능성을 믿으시고 재계약을…….”
“재고를 많이 남겼지. 악성재고. 그런 가능성이라면 사양하겠어.”
“그래도 늘 여론의 주목을 받지 않았습니까?”
“비판여론이 주를 이뤘지. 노이즈 마케팅 아니냐고 의심만 샀지.”
“제 마니아들마저 외면하시려는 건 아니죠?”
“외면해야 마니아가 되는 거지.”
고해는 성사되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벽안의 신부는 나의 죄를 사할 생각이 없었다. 터놓을 수밖에 없었다. 해고가 성사될 수 있었으나 더 이상 숨길 수는 없었다. --- p.121~122
“제가 좋아하는 건 알래스카! 늘 겨울로 보이지만 여름이 있는 곳이죠.”
“전 사막을 좋아합니다. 데저트. 모래밖에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별들로 가득한 곳!”
“제가 좋아하는 건 고래상어! 상어인데 성격이 온순하죠.”
“전 범고래를 좋아합니다. 킬러 웨일. 순해 보이지만 사실은 바다의 포식자!”
“제가 좋아하는 건 씨 없는 수박! 씨가 많은 과일인데 씨가 없죠.”
“전 딸기를 좋아합니다. 스트로베리. 씨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씨가 많은 과일!”
짧은 대화는 영원할 것처럼 계속됐다. 물리적 거리는 계속 바뀌었지만 우리의 화학적 거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가 좋아하는 건…….” 내가 머뭇거렸다.
중첩된 궤도에서 멀어져가는 그녀가 말했다.
“……왜 말을 못하시죠?”
“그것이 우주를 돌아 그 사람에게 닿을까요?”
“그것은 우주에서도 소멸하지 않아요.”
--- p.197~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