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박물관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그 기원으로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을 언급한다. 그것은 단순히 어원적 기원을 넘어서 박물관의 주요 기능인 전시와 연구, 기록 보존과도 관련이 깊다. 앞에서 보았듯이 무세이온은 독립적인 기구가 아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알렉산드리아가 지녔던 문화 전반의 맥락에서 무세이온과 그 주변의 다른 기구들과의 연결성에서 보면, 무세이온은 대도서관, 식물원, 동물원, 천문관측소, 해부실, 극장, 신전 등과 더불어 프톨레마이오스의 왕궁과 알렉산드로스의 무덤을 포함하는 종합적인 학문의 전당이었다. 그 각각의 기구 안에는 관련 자료와 정보가 보관되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문법학자, 지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의사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교류하면서 연구와 강연, 집필활동을 할 수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알렉산드리아는 당대 최고의 가치를 자랑하는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는 동시에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는 공간이었다. 이들 고대 그리스인들이 ‘기억’의 딸들에게서 얻은 지적 영감으로 이루어낸 지식과 정보는 알렉산드리아라는 ‘박물관’에 소장되어 여전히 역사에 ‘전시’되고 있다.
- 1부 ‘박물관의 기원’ 중 1장 알렉산드리아 무세이온 (33~34쪽)
19세기의 파리는 가히 혁명의 도시라고 부를 만한 모습을 보인다. 1830년, 1848년의 굵직한 혁명 외에도 수차례에 걸쳐 혁명적 움직임이 꿈틀댔다. 물론 19세기가 소란스러운 시기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로 시작된 제2제정은 20여 년 동안 파리를 억압하며 질서를 강제했고, 1860년대에는 오스만 남작에게 파리 개조사업을 맡겼다. 1871년 파리 코뮌으로 폐허가 된 후 건설된 제3공화정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공화정의 기본 틀을 구성했다. 19세기 파리는 세계의 수도로서 벨에포크Belle epoque(아름다운 시대)를 맞이했다. 실로 파리는 19세기 서양 예술의 중심지로 이름을 떨쳤다(물론 당시 파리에서 활동하던 저명한 예술가들의 작품들은 대부분 오르세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모든 파리의 격변과 찬란함이 카르나발레박물관 안에서 숨 쉬고 있다.
시청에 걸려 있던 나폴레옹의 초상화는 물론, 문인 샤토브리앙의 조언자이자 19세기 사교계의 총아였던 쥘리에트 레카미에의 초상화 등 19세기 파리의 역사를 보여주는 다양한 회화와 유물들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1848년 혁명 이후 수립된 제2공화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자네-랑주Janet-Lange의 그림 〈공화국〉을 비롯하여 파리의 거리 일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장 베로Jean Beraud의 작품 등이 망라되어 있다. 앙리 필Henri Pille의 그림 〈파리 코뮌 당시 시립식당〉은 허름한 식당과 질서정연하게 줄을 선 시민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묘사함으로써 파리 코뮌 당시 파리 시민들의 고통과 시민정신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박물관은 19세기 파리의 일상을 사진과 유물로 보여주기도 한다. 〈파리의 굴뚝청소부〉를 촬영한 샤를 네그르Charles Negre의 사진과 부르주아 출신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방은 서로 다른 계층의 삶을 보여준다.
- 2부 ‘로컬/도시’ 중 3장 파리 카르나발레박물관 (71~76쪽)
해양박물관의 모태는 1916년에 개관한 암스테르담 해양박물관이다. 1913년 네덜란드 해군전시회가 개최된 것을 계기로 해군과 항해사 출신의 독지가들이 중심이 되어 해양박물관 건립을 추진했다. 암스테르담 해양박물관은 암스테르담 남쪽의 코르넬리스슈이트거리와 라이레세거리 코너 건물에 약 30만 점의 항해와 해군 관련 물품을 전시하면서 문을 열었다. 이후 박물관은 1973년에 해군기지로 사용되던 현재의 건물로 이전했고, 곧이어 국립박물관으로 승격했다.
해양박물관을 해군기지 건물로 이전한 것은 네덜란드의 해양역사가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네덜란드 황금기를 열었던 시대와 오버랩된다는 점도 고려되었겠지만, 해군기지 건물 자체가 해양강국 네덜란드의 상징이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1656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네덜란드 건축가 스탈페르트Daniel Stalpert가 설계한 것으로, 당시 고도의 기술과 국가의 지원이 집중되어 건립된 네덜란드의 자랑거리였다. 건물은 바다로 이어지는 암스테르담 하구에 자리 잡았는데 지대가 낮은 암스테르담에서 인공 섬 위에 건물을 짓는 방식이었다. 이를 위해 진흙 속 깊은 곳에 약 2000개의 나무말뚝을 박는 대공사를 했고, 네덜란드 고전 양식으로 웅장하게 건립했다. 첨단 건축기술을 사용한 이 건물의 완성은 해양강국으로 부상하던 당시 네덜란드의 자부심을 상징했다.
- 3부 ‘국가’ 중 암스테르담 네덜란드국립해양박물관 (235쪽)
‘유럽역사의 집’으로의 초대는 사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응하기에 다소 부담스럽다. 박물관은 이 집을 방문하는 모든 이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하나의 유럽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유럽은 왜 필요한가? 하나의 유럽을 위한 공통의 기억 및 역사는 무엇인가? 역사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억에 영향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유럽인들이 하나의 공유된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는가?
이처럼 질문하고 토론하게 하는 박물관이 바로 ‘유럽역사의 집’의 정체성이다. 유럽의 여타 고전적인 박물관들이 자료의 수집과 보존 그리고 전시를 통해 지식과 정보를 제공한다면, 유럽역사의 집은 질문을 통해 관람객으로 하여금 고민하게 하고, 유럽이 무엇인지에 대해 소통하게 하고, 새로운 의미의 유럽 정체성을 생각하게 한다. 요컨대 유럽역사의 집은 보존, 연구, 전시라는 박물관의 전통적이고 기본적인 기능을 넘어서 유럽을 사유하게 함으로써 교육과 문화를 포함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기능이 단순히 홍보와 지식 전달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의미다.
꽉 찬 전시가 아닌 여백의 공간이 눈에 띈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이나 영국 대영박물관과 같이 화려하고 과시적인 박물관을 기대했다면 관람객은 다소 소박한 진열과 전시관의 공간 여백에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다. 관람객은 마치 긴 사색의 숲길을 걷듯 박물관이 마주하는 유럽에 대한 질문들을 함께 사유하고 새로운 가치와 의미의 재발견을 통해 스스로 유럽이 무엇인지를 정의한다. 그 시작은 다소 혼란과 당황을 통해서 진행되지만 점차 고민하고 씨름함으로써 자신이 정의하는 유럽으로 안정감을 찾게 된다.
- 4부 ‘유럽/유럽통합’ 중 브뤼셀 유럽 역사의 집 (432~433쪽)
유로피아나 프로젝트는 이처럼 20세기 초부터 최근까지 이어지는 문화와 민주주의,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둘러싼 전통적인 생각들을 반영하고 있다. 유로피아나의 인터넷 플랫폼(Europeana.eu)은 사용자들의 참여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동시대의 새로운 담론을 지향한다. 이런 상황은 2011년 1월에 발표된 ‘2011~2015년 전략 계획’에 잘 명시되어 있다.
이 보고서에서 유로피아나는 유럽 각지에 흩어진 정보를 모아 전파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며 동시에 문화유산 및 과학유산 부분을 지식의 이전과 혁신, 공개적 지지를 통해 전격적으로 지원하며, 정보 이용자들이 자신들의 문화적·과학적 유산 탐구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계속 개선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점은 유로피아나의 구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유로피아나 프로젝트의 데이터 모델Europeana Data Model은 문화유산에 대한 디지털 정보를 ‘연계된 데이터Linked Data’를 토대로 플랫폼을 구성한다. 이는 기존 아카이브에서 다뤄왔던 기계적이고 일방적인 전달을 넘어 이용자의 주관적 선택과 추론을 토대로 유산에 대한 정보와 가치 판단의 사회적 함의를 생산한다. 2008년 이용자의 관점을 검토하기 위한 실험실처럼 프로토타입을 공개했을 때 이 같은 상황은 이미 예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실현되었다.
- 5부 ‘미래의 박물관’ 중 유로피아나 프로젝트 (447~448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