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코는 입술이 닿을 만큼 바짝 다가가 피해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또 저런다.”
고미네가 당장이라도 ‘변태’라고 말하고 싶은 얼굴로 한마디 툭 뱉었다. 하지만 그 행동은 레이코 나름의 피해자와의 소통 방식이었고, 반드시 거쳐야 할 의례였다. 빠뜨려서는 안 되는 의식이었다.
가르쳐줘. 당신이 마지막으로 본 것을 나에게 가르쳐줘.
이미 사후강직도 풀린 남자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탁한 눈은 반쯤 열려 있고 시선은 허공 속 한 점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없는 시체도 때로는 공포를 호소하거나 억울함을 알려줄 때가 있다.
이 남자는 어땠을까 억울했을까 슬펐을까 무서웠을까 분노했을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거야 --- p.31
딱딱한 땅바닥이 등 밑에서 느껴졌다. 축축하고 차가운 감촉, 화장실의 썩은 냄새, 남자의 거친 숨소리,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쩍 달라붙는 무더위, 심연과도 같은 여름밤의 암흑.
남자는 압도적인 완력과 체중으로 레이코를 꼼짝 못 하게 만든 채 칼날을 뺨에 대고 위협했다. 여름방학을 맞아 친구들과 경쟁하듯 짧게 입은 치마는 남자가 목적을 달성하는 데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을 것이다. 저항다운 저항도 못 한 채 레이코의 속옷이 벗겨졌다. 남자는 강제로 다리를 벌려 비집고 들어왔다. 남자가 입을 틀어막아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레이코는 입속으로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다리 사이가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통증, 남자의 폭력에 대한 공포, 집이 바로 근처임에도 아무도 구하러 와주지 않는다는 고독감, 미래를 잃는다는 절망감…….
남자는 결국 아무런 예고도 없이 레이코의 옆구리를 칼로 찔렀다. 찌르면서 또다시 레이코를 범했다. 레이코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의식 속에서 이 악몽이 어서 끝나기만을 빌었다.
더 이상 찔리고 싶지 않아, 더럽혀지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 pp.212~213
나는 부모를 살해하고, ‘에프’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후 폭력 을 휘둘러서 내 존재를 확인해왔다.
아니, 목숨을 주고받는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사느냐 죽느냐, 죽이느냐 죽임을 당하느냐. 그 순간에만 내가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그러나 언제나 주변에 누군가가 있어서 내가 목숨을 끊어놓기 직전에 내 행동을 말리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도 진심으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자칭 조폭이라는 놈들조차 죽음은 원치 않았다.
하지만 녀석은 달랐다.
“내가 너에게 최고의 무대를 준비해줄게. 살인 무대야. 원 없 이 사람을 죽여도 되는 무대야, 알겠어 ” --- pp.243~244
“그런 무뎌진 근성을 다시 새롭게 일깨워준 게 바로 저 에프였어. ‘봐, 죽음이란 이렇게 우리 가까이에 생생하게 존재한다고. TV에서도 보기 힘든 진짜 죽음이 지금 네 눈앞에 있어.’라고 말이야. 이 녀석이 그걸 나에게 가르쳐준 거야. 어릴 때부터 높은 곳만 보며 자라온 나는 확실히 밑바닥 인생이 어떤지 몰라. 목이 아플 정도로 위만 죽어라 쳐다봤으니 내가 지금 얼마 나 높이 서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 그런데 이 녀석 덕분에 깨달았어. 나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살아가는 놈들의 머리 꼭대기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너무 익어서 썩어버린 딸기처럼 시뻘건 시체로 남은 친구 놈 꼴이 되었다가는 모든 게 말짱 도루묵이란 걸 깨달았지. 그래서 나는 이 살인 예술가를 지원하는 후원자가 되기로 한 거야. 무엇보다 내가 이 녀석의 공연을 보고 싶었거든. 분명히 관객들도 나와 같은 감동을 맛보았을 거야. 눈앞에 놓인 ‘죽음’이라는 현실, 그 반대편에 존재하는 ‘살아 있다’는 가치관. 살아 움직이는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거지.” --- pp.378~379
“내가 말이야, 너한테 위험하다고 했던 게 바로 그거였어. 네 감은 확실히 날카로워. 천성적으로 프로파일링 감각이 뛰어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 실제로 그 방법으로 지금까지 범인을 잡아왔으니까. 그 점은 나도 인정해주지.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네 방법은 프로파일링과는 달라. 너는 몇 가지 정보로 범인을 찾아내는 게 아니야. 아마 무의식적으로 범인의 의식에 동 조하는 걸 거야. 아무 근거도 없이 범인을 짐작해서 맞히고 행동을 읽는 게 가능했던 이유는 어쩌면 네가 범인들과 아주 비슷한 사고 회로를 가졌기 때문일 거다, 이 말씀이야. 넌 기타미의 말을 듣고 충격이라고 했지 현장에선 상처 입은 유카리를 안고 소리 높여 울었어. 그리고 그 전에도 내가 물었잖아. 후카자와 야스유키가 죽었는데도 놈들이 수풀에 시체를 방치한 이유를 말이야. 그건 네 말대로 오카와가 실수로 연락하지 않았다는군. 사실로 밝혀졌어. 그러니까…… 네 발상이 위험하다고 말했던 건 바로 그런 면이었다고.”
범죄자와 비슷한 사고 회로.
레이코는 자기에게 그런 점이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충격이라고 하면 충격이지만 반론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찔리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 p.411
“너 말이야, 시시한 범인 놈들 허튼소리 따위에 하나하나 갈팡질팡 반응하지 마라. 높은 곳만 봤으니까 바닥이 보고팠다고 아래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위가 보고 싶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우라고 해. 그건 말이야, 위다 아래다 오른쪽이다 왼쪽이다, 쓸데없는 것만 보니까 중요한 걸 놓쳐서 못 보았을 뿐인 거야!”
가쓰마타는 뒤돌아서서 강렬한 눈빛으로 레이코의 시선을 붙잡았다.
“알아들어 인간이란 말이지, 똑바로 앞만 보고 살아가면 되는 거야!”
자기도 모르게 레이코는 숨을 죽였다. 앞만 보고 살아! 이 말은 처음 듣는 게 아니다. 맞다. 그건 사타가 일기에 남긴 말이었다. 레이코가 다시 일어섰으면 좋겠다. 앞을 바라보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 pp.413~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