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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2013년 스승의 날 | 외과 의사 | 회귀 남루한 시작 | 원흉 | 깊고 붉은 심연 | 갱의실 삶의 태도 | 환골탈태 | 암흑 전야 | 탈출 벨파스트함 | 마지막 수술 | 위로 | 전환 나비효과 | 윤한덕 | 선원들 | 정책의 우선순위 업 (業) 의 의미 | 남과 여 | 막장 | 정글의 논리 헝클어져가는 날들 | 부서진 배 | 아덴만 여명 작전 위태로운 깃발 | 생의 의지 | 빛과 그림자 변화 | 석해균 프로젝트 | 불안한 시작 긍정적인 변화 | 중단 | 고요한 몸 스스로를 보호할 권리 | 성탄절 | 살림 | 뱃사람 야간 비행 | 지원과 계통 | 가장자리 | 탈락 소초장 (小哨長) | 목마른 사람 | 거대한 공룡 사투 | 허무한 의지(依支) | 모퉁이 한배를 탄 사람들 | 내부의 적 (敵) | 빈자리 거인 (巨人) | 끝없는 희생 | 신환자(新患者) 밥벌이의 이유 | 생과 사 | 2013, 기록들 |
저이국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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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의 부재와 근거 없는 소문들, 부조리가 난무하는 환경에 맞서 팀원들이 힘겹게 버텨내는 동안, 나는 어떻게든 본격적인 지원을 끌어들여 우리가 가까스로 만들어온 선진국형 시스템을 정착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여태껏 해온 일들이 ‘똥물 속으로 빠져들어 가면서도, 까치발로 서서 손으로는 끝까지 하늘을 가리킨 것’과 같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곧 모든 것은 잠겨버릴 것이고, 누가 무엇을 가리켰는지는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 p.9
원칙을 지켜야 한다, 하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서 옳은 것을 주장하며 굽히지 않는다, 안 될 경우를 걱정할 것 없다, 정 안 되면 다시 배를 타러 나가면 그뿐이다……. 나쁜 보직을 감수할 자세만 되어 있으면 굳이 타협할 필요가 없다. 원칙에서 벗어나게 될 상황에 밀려 해임되면 그만하는 것이 낫다……. 그것은 단순한 논리였다. 바다 위에서 만난 병사들이 그와 같았고 대개의 뱃사람들이 그러했다. 그의 말들이 짙은 쪽빛으로 머릿속을 깊이 물들였다. --- p.43 2차 수술은 괴사가 진행된 조직을 절제해내는 정도에서 마쳤다. 열어두었던 복벽을 닫고 칼이 베고 들어간 상처 한쪽에 긴 배액관을 꽂았다. 다행히 중환자실에 빈자리가 나서 남자를 그곳으로 옮겼다. 수술은 끝났으나 치료는 다시 시작이었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영화 속 주인공이 칼에 베이고 총에 맞아 피를 쏟아내 면서도 수술받은 다음 날이면 의식을 차리는 일은 현실에 없다. 중증외상 환자들에게 수술은 치료의 시작일 뿐, 환자는 수술만으론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중환자실에서 수많은 인공생명유지장치들과 약물들을 총동원해 집중치료를 받아야만 하고, 이 지난한 과정을 버텨내지 못하면 환자는 죽는다. --- p.85 피는 도로 위에 뿌려져 스몄다. 구조구급대가 아무리 빨리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도 환자는 살지 못했다. 환자의 상태를 판단할 기준은 헐거웠고, 적합한 병원에 대한 정보는 미약했다. 구조구급대는 현장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병원을 선택할 것이어서 환자는 때로 가야 할 곳을 두고 가지 말아야 될 곳으로 옮겨졌고, 머물지 말아야 할 곳에서 받지 않아도 되는 검사들을 기다렸다. 그 후에도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고 옮겨지다 무의미한 침상에서 목숨이 사그라들었다. 그런 식으로 병원과 병원을 전전하다 중증외상센터로 오는 환자들의 이송 시간은 평균 245분, 그사이에 살 수 있는 환자들이 죽어나갔다. --- p.148 좌측에서 제3조수를 서고 있는 백숙자의 피곤함이 전해졌다. 아무리 힘을 써도 당해낼 수 없었 다. 어쩔 수 없이 거즈로 압박만 해서 환자를 중환자실로 보내기로 했다. 전담간호사들이 환자를 이송용 카트에 옮겨 수술방을 빠져 나갔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았다. 전담간호사들 틈에 환자를 응시하는 사신이 있었다. 시야에서 카트가 사라질 때 나는 죽음이 미소 짓는 광경을 본 것 같았다.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으나 환자는 곧 숨을 거둘 것이다. --- p.178 떨어지는 칼날은 잡지 않는 법이다. 석 선장은 무겁게 떨어지는 칼날이었다. 환자의 상태가 극도로 나쁠 때 의사들은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 그가 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했고, 최악의 경우 내가 짊어져야 할 책임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 p.222 그러나 그런 식으로 상황이 종료되면 석 선장과 해군과 삼호해운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 부처는 결국 의견을 주지 않았고, 에어 앰뷸런스는 아프리카로 날아가버렸다. 남미와 아프리카에 무슨 변고라도 있는 것인지 유럽발 에어 앰뷸런스들은 모두 바빴다. 배 속 깊이 쓰라림이 올라왔다. 거죽 밑으로 번지는 마른 기운이 몸속의 물기를 앗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절박하고 절박한데 그 절박함이 어디에도 가 닿지 않아 처참하기만 했다. --- p.232 핏물을 거두자 청년의 얼굴이 보였다. 훈련으로 검게 그을린 얼굴에 생기가 없었다. 누구의 아들일 것인가. 뭍에서 시신을 기다리고 있을 부모들을 생각했다. 자꾸만 눈물이 솟았다. 낡은 고속정 특유의 디젤엔진에서 선체로 전달되어 올라오는 진동이 엉덩이를 타고 척추를 따라 머리까지 전달되었다. 두개골 속이 덜그덕거리며 흔들거렸다. --- p.300 손실을 만회할 방법이 없었다. 병원의 ‘ABC 원가분석’의 서늘한 칼날은 정확히 내 목을 겨누었다. 외상외과에서 당연히 이루어 져야 하는 것들 가운데 심평원의 기준을 충족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 심사 기준은 조정되지 않았고 외상외과 업의 본질은 바뀌지 않으므로 나는 계속 깎여나갔다. 대한민국에 외상외과라는 분야는 존재 불가능했다. --- p.338 팀원들 모두가 자주 아팠고, 아픈 것이 기본이 되어 아픔을 일상으로 여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플 때에 아프다고 알리는 일조차 없었다. 어딘가 부러지고 쓰러질 때가 되어서야 보고가 되었다. 그것이 마치 이곳에서의 생존법칙인 것만 같았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원론적으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말하고는 있으나, 사실 왜 지속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된 지가 오래다. 좋은 사람들과 일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이 유일한 장점이었으나, 그것을 위한 대가는 너무 컸다. 쉴 새 없이 고꾸라져 나가는 팀원들을 볼 때마다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 p.420~421 |
외과의사 이국종이 눌러쓴 17년간의 삶과 죽음
‘골든아워’ 60분에 생사가 달린 목숨들, 그리고 그들을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 2002년 이국종은 지도교수의 권유로 외상외과에 발을 내딛으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원칙대로라면 환자는 골든아워 60분 안에 중증외상 치료가 가능한 병원에 도착해야 하고, 수술방과 중환자실, 마취과, 혈액은행, 곧바로 수술에 투입할 수 있는 의료진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의 의료 자원이 신속히 투입되어야만 하지만 현실은 원칙과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이때부터 대한민국에 국제 표준의 중증외상 시스템을 정착하기 위한 그의 지난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책은 저자의 말대로 2002년에서 2018년 상반기까지의 각종 진료기록과 수술기록 등을 바탕으로 저자의 기억들을 그러모은 기록이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사선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환자와 저자, 그리고 그 동료들의 치열한 서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냉혹한 한국 사회 현실에서 업(業)의 본질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각자가 선 자리를 어떻게든 개선해보려 발버둥 치다 깨져나가는 바보 같은 사람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흔적이다. 외과의사 특유의 시선으로 현장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잘 벼린 칼 같은 문장은 쉽게 쓰이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의사로서의 완벽주의는 글쓰기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사고 현장과 의료 현장을 직접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절절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고심했고, 한 단어 한 문장 심혈을 기울였다. 책을 출간하기까지 원고에 쓰인 모든 언어가 정말 가장 적확한 표현인지 고민하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지난한 과정이 이어졌다. 이 과정을 통해 중증외상센터에서 만난 환자들의 삶과 죽음, 의료진의 고된 일상은 물론 그동안 언론에 익히 알려진 석해균 선장 구출, 세월호 참사 등도 현장을 겪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입체적인 이야기로 들려준다. 막을 수 있었던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고도 왜 우리는 변하지 못하는가? 2권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저자가 몸담은 대학병원이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로 지정된 후에도 여전히 열악한 현실에서 국제 표준에 맞는 시스템을 안착시키고자 고투하는 과정을 그렸다. 중증외상센터 사업이 시간이 흐를수록 원칙과 본질에서 벗어나 복잡한 이해관계에 휘둘리며 표류하는 동안 시스템의 미비를 몸으로 때우던 동료들이 한계상황에 내몰리고 부상으로 쓰러졌다. 켜켜이 쌓여가던 모순과 부조리는 결국 전 국민을 슬픔에 빠뜨린 대참사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세월호, 귀순한 북한군 병사 등 대한민국 중증외상 치료의 현장을 증언하며 저자는 이제 동료들의 희생과 땀과 눈물을 돌아본다. 낙관 없이 여기까지 왔고 희망 없이 나아가고 있지만, 전우처럼 지금껏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들을 기록하고자 밤새워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갔다. 부상을 감수하며 헬리콥터에 오른 조종사들과 의료진들, 사고 현장에서 죽음과 싸우는 소방대원들, 목숨을 각오하고 국민을 지키는 군인과 경찰들…. 이 책은 바로 그 모든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