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그곳에 머물다.
‘돌아가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은 멋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오늘도 나는 돌아가지 않고 직선으로 빠르게 가는 길을 찾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이 책 속의 건축가 무라이슌스 케다.
그가 가지고 있는 건축가로서의 신념이 마음에 든다. 그러한 신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잘 알기에 더욱 존경스럽다. 자신만의 신념을 갖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시행착오와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 했을까? 그런 인고의 시간들이 만들어낸 신념이기에 더욱 울림이 있고 깊이 있게 다가온다.
이제까지 내가 생각한 건축은 화려하고 맛지고, 웅장하고 다분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 같다. 아마도 서양의 화려한 건축물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건축은 예술 그 자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내가 생각하고 있던 건축은 삶의 공간과는 동떨어진 관념의 산물이었으리라.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는 생각이다. 내가 지금 거하고 있는 공간은 건축물이다. 나의 삶의 공간 전부가 건축물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건축물들은 진정한 건축이 아니라는 말인가? 나는 왜 이렇게 건축에 대해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우습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eh 하다. 그런 의미에서 무라이슌스케의 ‘건축은 예술이 아니라 현실이다’라는 말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편리함을 추구한다. 그 건축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편리함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가구의 배치 하나하나에도 그러한 배려와 세심함이 느껴진다.
건축을 설계할 때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이 너무 놀랍다. 또 건물 속 가구 배치, 거실과 부엌의 구조 등 건물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실제 생활의 모습에 관심을 갖고 섬세하게 배려하여 설계하는 그 배려심과 섬세함이 존경스럽다. 이런 건축가가 설계한 집에서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역시 건축은 tifa의 공간이자, 현실의 공간인 것이다. 그는 또 건축은 완벽하지 않고, 나눗셈의 나머지와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완벽하지 않고 예외적인 매력과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완벽한 사람은 매력이 없다고 한다. 약간의 틈이 있을 때 왠지 인간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법이다. 건축도 마찬가지 경우일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렴풋이 짐작은 간다. 마치 건축가가 규정짓지 않고 우연히 만들어진 어떤 공간이 그곳의 사는 사람들에게 의도하지 않은 용도의 쓸모가 있을 경우가 아닐까? 우연히 발견된 쓸모! 예측하지 않은 쓸모말이다. 그러한 쓸모는 지금 당장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필요하다. 그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어지기까지 시간의 흐름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눗셈의 나머지에 비유한 것 같다.
나눗셈의 나머지는 지금 당장이 아니라 나누기 계산 과정을 모두 끝내고 나서야 확인되는 것처럼, 건축의 완성은 건물이 지어진 그 직후가 아니라 그 속에서 사람이 들어가 생활을 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느껴지는 그 건축의 매력과 흥미로 인해 비로소 완성된다는 의미 같다. 즉 건축은 유형의 건물 분 아니라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삶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너무 멋진 말이다. 건축은 그렇게 시간과 삶에 의해 만들어져 가는 것같다. 건축도 그렇고 우리 삶의 모든 것이 그런 것 같다. 천천히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성숙과 완성에 이르는 것이다.
실질적이면서도 시대에 좌우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러면서도 편리한 건축물을 지어가는 건축가의 그 아름다운 신념이 오늘날 그립고, 그러한 가치관이 건축에서뿐만 아니라 내가 일하고 있는 분야에도 적용시키고 싶다.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신념을 가지고 나의 일을 하고 싶다. 그런 사람이 되려면 돌아가는게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뚜렷한 줄거리가 없지만 잔잔하게 스며든다는 것이다.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향기, 색깔, 소리 등이 추억처럼 마음에 와닿는다. 그 중의 하나가 연필 깎는 소리, 연필 냄새다. 그것과 어우러진 커피냄새, 음악 소리! 이것들이 이렇게 잘 어울리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줄은 이 책을 통해서 느끼게 되었다. 흥미진진한 줄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색깔이 강한 인물이나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잔잔한 감동과 향기를 주는 묘한 매력을 가진 책이다.
이 책은 문학작품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본다. 잔잔한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속도가 빠른 시대에는 어쩌면 외면 당할 수도 있다. 도서관 사서 선생님이 아무도 이 책을 찾지 않는다고 하신다. 그럼에도 이 책의 숨은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속도는 느리고, 시간은 오래 걸리고! 요즘 어울리지 않는 흐름이다. 그래도 나는 느리게 사는 미학을 추구한다.
디자인에 대한 견해도 인상적이다. 디자인은 사람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건축가, 디자이너,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할 자세가 아닐까 한다. 그 모든 일들이 결국은 사람을 위한 것이고, 사람이 좀더 잘 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디자인뿐 아니라 모든 것이 사람을 섬기기 위해 만들어진다면 우리 사회는 좀더 살기 좋은 사회가 될 것이다.
도서관에 대한 생각도 인상적이다. 무라이 슌스케는 도서관이라는 건물에 유난히 애착을 가졌던 것 같다. 그가 말년까지 경합을 벌였던 건축물도 도서관이었다. 결국 그것을 이루지는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 그의 설계대로 도서관이 지어졌다면 많은 사람들이 고독한 채로 받아들여지는 편안하고 안락한 특별한 공간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는 도서관을 교회에 비유했다. 마음에 드는 비유이다.
독서를 좋아했던 그는 혼자서 있을 수 있는 자유, 고독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곳이 바로 도서관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가 마지막까지 짓고자 했던 것도 바로 도서관이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마음에 여운을 주는 울림이 있는 책이다. 숨겨진 보물 같은 책이 바로 이런 책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