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출간일 | 2018년 11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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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08쪽 | 269g | 135*203*20mm |
ISBN13 | 9788936513191 |
ISBN10 | 8936513192 |
출간일 | 2018년 11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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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08쪽 | 269g | 135*203*20mm |
ISBN13 | 9788936513191 |
ISBN10 | 8936513192 |
새로운 표지로 선보이는 ‘정본 C. S. 루이스 클래식’ 첫 권! 故 유진 피터슨 추천! 악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치유하는 해독제 양장에서 무선으로 새로운 표지를 갈아입은 ‘정본 C. S. 루이스 클래식’ 그 첫 번째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경험 많고 노회한 고참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자신의 조카이자 풋내기 악마인 웜우드에게 인간을 유혹하는 방법에 대해 충고하는 서른한 통의 편지이다. 인간의 본성과 유혹의 본질에 관한 탁월한 통찰이 가득한 이 책은 웜우드가 맡은 ‘환자’(이 책에서 악마들은 자기들이 각각 책임지고 있는 인간을 ‘환자’라고 부른다)의 회심부터 전쟁 중에 사망하여 천국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사소한 일들로 유발되는 가족 간의 갈등, 기도에 관한 오해, 영적 침체, 영적 요소와 동물적 요소를 공유하는 인간의 이중성, 변화와 영속성의 관계, 남녀 차이, 사랑, 웃음, 쾌락, 욕망 등 삶의 본질을 이루는 다양한 영역을 아우른다. 영국 C. S. 루이스 협회의 허락을 받아 실은 ‘1961년판 서문’은 원서가 출간된 지 20여 년이 지난 후 저자가 덧붙인 것으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영성신학자 유진 피터슨이 “우리 시대에 가장 기본적으로 읽어야 할 책”으로 추천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20세기 기독교의 큰 산맥 루이스의 사상을 탐험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그 출발점이 되어 줄 것이다. |
서문 스크루테이프가 보내는 31통의 편지 부록 1961년판 서문 |
나는 신앙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왔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그시절 가장 막역했던 친구와 함께 겪은 일이니 초등학생 때의 일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그일이 있었던 날의 동선은 중학교에서 귀가하는 동선은 아니었고, 초등학교에서 귀가하던 길이었으니까.
초등학교에서 우리집으로 가는 길 가운데 큰 교회가 있었고, 친구와 나는 우리집을 들러 그 아이에 집으로 가는 동선으로 헤어지곤 했다.
초등학생들이 귀가하던 시간이니 아마도 오후의 한 가운데였으리라. 교회쪽에서 나오셔서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아주머니를 보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도와드릴까요라고 물었고, 고사리 손은 아니겠지만 풋내나는 꼬마 녀석들이었더라도 도움이 될만한 아이들의 손이라고 생각하셨는지 거절 하지 않고 흔쾌히 도움을 받으셨다. 아마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으셨는지 아주머니는 집에 우릴 들이고 오렌지 쥬스 같은 걸 대접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집은 식탁이 있었고, 식탁 옆 벽지에는 그집 아이들이 써놓은 낙서들로 가득했다. 아이들의 아버지는 해외인지 지방에 나가 일하는 집이라는 인상이 남아 있는걸 보면 그 낙서는 편지와 같은 내용들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볼 뿐이었다.
아주머니는 어린아이들이 기특했는지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나오라고 권유를 했다. 그 교회는 그 아주머니의 집 그리고 나의집과 아주 가까웠으며, 우리의 등교 및 귀가길을 경유하는 주요한 랜드마크였다.
어느날 주일이 되었을 때 아주머니는 우리집에 찾아와 내가 있는지를 확인하기도 했다. 나는 동네 친구들과 교회안에 있는 놀이터에서 흙장난, 씨름을 하곤 했으며, 교회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숨바꼭질도 해서 교회라는 공간 자체는 익숙했다. 그런데 왜일까?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아이들을 위한 공부나 놀이 등을 하고 싶지 않았다. 두려웠고, 무서웠다. 알지 못하는 대상 모르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모르는 사람들로 부터 그분에 대해서 설명을 듣는 것 모두가 새롭고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 어머니가 아주머니께 어떻게 얘기하고 돌려보내셨는지는 확인도 하지 않았고,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어머니는 괜한 얘기를 들먹이며 그 아주머니께 결례를 범하고 약간은 넘어서는 무안을 주는 등의 언사를 하지 않았을지 걱정스럽다.
우리 형의 절친인 형, 나에게도 친근하게 대해주고 웃음이 많았던 그 형을 나는 좋아했다. 목사님의 아들이었던 그 형을 따라서 우리형은 곧잘 교회도 나갔던 듯 하다. 나는 그런일이 없었다. 그 형도 나에게 교회를 나오라고 권유했던 적이 없다.
그 이후 내가 가진 교회에 대한 추억으로는 고등학교 시절 신체검사로 일찍 하교한 후 집에 혼자 있을 때 지금 교회들은 성경에 쓰여있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설명하는 전도사 들을 의심없이 집에 들였던 일,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유치원때부터 친구 녀석이 다니는 교회의 연말 송구영신 예배에 가봤던 것, 대학교 복학 후 교내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계약직 직원으로 일하는 친구의 교회에서 성탄 예배에 초대받아 방문했던 기억이 대부분인 것 같다.
여러 조사에 참여하면서 불교식, 기독교식, 천주교식 장례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나의 신념 안에 종교적 믿음이나 신앙은 불이 피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단정지어 얘기하는 것 조차 사실 의문이기도 하고 신성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조심스럽다고 느낀다면 신앙 그것 자체는 이미 존재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전단지를 나누어주시는 분들 술집에 방문하며 껌이나 초콜릿을 파는 할머니, 파인애플 과육을 손질하여 파는 착실해 보이는 문신한 젊은이, 망개떡과 아이스크림을 함께 파는 아저씨 등을 만나도 모른체 하는것 보다 수령하거나 지불하는 것이 즐겁다.
그렇게 몰몬교 친구들도 만난 적이 있고, 내가 입고 있는 티셔츠에 쓰여진 영어 문구를 가지고 담소를 나눈 적도 있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홍대입구역에서 집으로 걸어가던 중 어떤 여성분이 나를 마주보며 걸어 왔다. 수많은 행인이 지나는 시간이었고, 그 여성분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정확한 표현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내가 많은 사람의 인생을 손에 쥐고 있다고 했던 것 같고 책임이 크다는 맥락을 얘기하려고 한 것까지만 남아있다. 나는 당황스러움이 있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내가 무엇인가를 묻기도 전에 그 사람은 나이가 몇이냐고도 물었다. 학교를 일찍 들어갔던 터라 스무살이 되지 않았던 대학 새내기 시절이었으므로 그렇게 답을 했고, 그 사람은 스무살이 넘으면 자신이 한 얘기가 어떤 의미인지 확인해 보라는 말을 남기고 가볍게 떠나갔다.
제대하고 장보시는 어머니를 쫓아 상암 홈플러스에 갔을 때도, 쇼핑에 쉽게 질려버린 나는 밖에 나와 있었고, 전혀 일면식 없는 사람이 내게 다가와 전화번호를 묻고 제사를 지내자고 한 적이 있었는데, 제사를 지낼 돈도 시간도 없던 때라 그것에 휘둘릴 여건이 안되어 나는 온갖 믿음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듯 하다.
공부가 길어지고, 공부의 영역 그리고 과외로 했던 활동 들이 종교와 신앙에 다가가는데 장애는 아니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주변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 저것을 물어보며 궁금한 것들을 해소하곤 했다.
그런 호기심은 계속 늘어 났고, 여러 신앙과 관련된 영화 들도 접하고 익숙함이 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갖고 절대자에 귀의한 사람들의 지식과 앎을 쫓을 정도는 못된다.
방황과 불안이 많고 이것을 잘 감추고 인내하지도 못하는 성정 탓에 주변의 고마운 분들이 좋은 글과 감정을 선물해 주곤 한다. 나에게는 과분하면서도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다. 무엇인가 알아가는 것 만큼 쉽게 성취하고 긍정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것이 있을까 싶을정도로.
이 책도 그렇게 얻게된 이야기이다.
이 책에 따르면 혹은 기독교 신앙에서는 위에 나열한 나의 작은 에피소드들 중에서도 스크루테이프나 웜우드의 속삭임과 유사한 것들이 있다. 동시에 절대자인 주님은 아마도 그것을 이겨내고 그분께서 이야기하는 사랑에 닿을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한 것이리라.
어디를 놀러가면 꼭 절이나 성당에 들리곤 하는데, 성당에서는 아주 작은 성물을 구입하고 절에가서는 복전함에 보시를 한다.
좋아하는 형님네 묵을때면 아침에 일어나 씻지도 않고 낙산사에 가는데, 출근 전 낙산사를 매일 같이 산책한다는 형수님이 스님을 만나 들은 얘기로는 기복 자체가 불교적 가르침은 아닌고로 무엇인가 원할때는 불상 앞에 무릎꿇고 절을 하기보다는 왜 그것을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얘기를 들었다는 걸 전해 듣고서, 내가 왜 이런 고민에 빠지는지 왜 욕심에 천착하는지 그렇게 하지 않게 해달라는 또다른 원함을 바라곤 했다.
우리집에는 가난한 자들의 구원자인 바뇌의 성모님, 축성 받은 기적의 메달, 묵주 그리고 반가사유상이 있으며, 어런저런 기독교 서적과 한두권의 이슬람 인문서적이 있다.
믿을을 가지기 두려워하면서도 구원을 원하는 부조리함에 우리집을 방문하는 모두들 가볍게 웃음을 짓는다.
어떤 것이든 믿을을 갖지 않은 자가 믿을을 가지기 꺼려하는 이유는 악마의 입에 발린 속삭임과 신앙 그 정점에 있는 절대자에 대한 의심일 개연성이 크다.
나는 그런 의심을 품으며 하찮은 나의 존재 자체는 무사하길 기원한다. 절대적인 권능을 의심하면서도 그 만큼 큰 힘에 의지하고자 하는 의사는 논리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인 인과로도 설명이 되지 아니한다.
인간은 그렇게 설계되었으며, 상당히 역설적인 합리를 관념적으로 형성해놓고는 종교적 진리 등에 항거하거나 객관성을 이유로 우월성을 획득하려고 한다.
내 삶도 그런 과정과 입증의 노력으로 천착되어 있기 때문에 고난과 불안에서 해방되지 못함을 돌아보게 된다.
믿음이 없다면, 성찰이라도 그리고 욕심에 대한 통제와 자발적 헌신에도 거침이 없길 나 스스로에게 바라본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금세 완전한 인격과 성품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현실도 성경도 모르는 사람이리라.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수많은 유혹을 받기 마련인데,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더 크고 끈질기고 강력한 유혹을 경험하게 된다. C. S.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말했던 것처럼, 유혹에 저항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끝이 얼마나 되지는 알 수 없는 법이니 말이다.
C. S. 루이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바로 그 ‘유혹’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담아낸다. 그것도 유혹이란 어떤 식인지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아예 악마의 입장이라면 어떤 식으로 유혹을 할까를 상상해, 후배 악마에게 조언을 하는 구성이라는 신박한 아이디어로 읽는 재미마저 더해준다. 이런 탁월한 작가 같으니라고.
원래 한 신문에 매주 연재되는 식으로 썼던 이 책을 두고, 루이스는 나중에 ‘매우 힘들었다’는 고백을 한다. 자신이 악마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유혹의 기술을 써내려가는 일이 그의 마음을 어렵게 만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덕분에 독자들은, 그리스도인을 유혹하는 악마의 교묘한 전략에 대해 효과적으로 숙고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책은 서른한 통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상급 악마인 스크루테이프가, 자신의 조카이자 하급악마인 웜우드에게 유혹의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내용이다. 루이스는 책을 통해, 신앙을 감정적인 것으로 이해하도록 만들고, 본질이 아닌 것에 집착하게 하고, (실제 현실에서 떠나) 오직 영적인 차원의 것에만 집중하게 하거나,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유혹의 전략이라고 말한다.
루이스는 신앙의 현재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신앙은 내일 받게 될 잔치상을 위해 오늘 굶는 게 아니라, 미리 맛보며 오늘을 기대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매일 만나는 실제 사람들과 특별해 보일 것 없는 일상적인 일들로부터 떠났을 때, 우리는 천국에서 가장 멀어진다. 한 편지에서 스크루테이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바라는 건 전 인류가 무지개를 잡으려고 끝없이 좇아가느라 지금 이 순간에는 정직하지도, 친절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하게 사는 것이며, 인간들이 현재 제공되는 진정한 선물들을 미래의 제단에 몽당 쌓아 놓고 한갓 땔감으로 다 태워버리는 것이다.
오래 전 첫 번째로 읽었을 때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몇 번을 봤지만) 최근 다시 책장을 넘기면서 마음에 깊이 와 박히는 문장들이 훨씬 더 많음을 느낀다. 확실히 루이스 정도의 작가가 쓴 글은, 그걸 읽는 사람이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서 더 많은 게 보이는 것 같다.(또 꼼꼼히 읽을수록 더 많은 게 보이는 책이다)
루이스가 살던 시대와 오늘은 수십 년의 시간적 갭이 있지만, 그의 조언은 여전히 생생하게 다가온다. 특히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도, 좀처럼 완전히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라는 주제를, 이렇게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건 큰 복이다. 유혹은 우리가 “됐다” 싶을 때 새롭게 찾아온다. 우리가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을 향한 불평과 짜증, 자기에 대한 손톱만한 애착이 우리를 유혹에 빠뜨리는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조금은 무섭기도 하다.
고전이란 이렇게 시대를 지나도 새롭게 와 닿는 작품을 가리키는데, 루이스의 책은 대개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하다.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면, 꼭 펴봐야 하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