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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했다가 죽이겠다고 했다가

사랑한다고 했다가 죽이겠다고 했다가

: 양을 치며 배운 인간, 동물, 자연에 관한 경이로운 이야기

리뷰 총점9.0 리뷰 8건 | 판매지수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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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2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228쪽 | 280g | 124*189*20mm
ISBN13 9791186757352
ISBN10 1186757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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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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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목장에 좁은 오솔길들이 생긴다. 양이 한 줄로 다니는 것은 풀을 덜 상하게 하는 방법이다. 나는 생각해 내지 못했을 방법. --- p.18

어제는 축사 문을 열고 건초를 좀 펼쳐 놓았다. 겨울용 사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일리지는 진짜 목축업자들이 만든 것을 사 오지만 건초는 우리 목장에서 직접 만들기도 한다. 건초를 만든다는 것은 너무 후한 표현이고, 그저 풀을 쇠스랑으로 긁어서 한곳에 모아 놓는 것이다. 얼마 되지 않는 사료를 위해 너무 많은 힘을 쏟는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하는 일이 전부 합리적일 수는 없잖은가. --- p.51

일이라는 생각으로 계획을 세우고 시간을 정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한다. 양을 키우는 생활은 항상 양에 신경 써야 한다는 점에서 취미 생활과 다르다. 1년 365일 양에게 해 줘야 할 일이 있고, 만약에 대비해 하루 24시간 양들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
헌신이라면 헌신인데 헌신의 대가가 뭐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다. 양고기? 양털? 그보다는 헌신하는 삶 그 자체가 대가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어떻게 하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같은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삶을 꽉꽉 채워 주는 녀석들이 200미터 앞 방목장에 살고 있다. 되새김질에 여념이 없는 녀석들, 꽉 찬 게 뭐고 덜 찬 게 뭔지 전혀 모르는 녀석들이다. --- p.91~92

새끼 양이 태어나면 애들이 난리법석을 피운다. 양들이 겨울에 뭘 먹고 어떻게 사는지 아무 관심도 없던 애들이 그때부터 양들에게 엄청난 관심을 보인다. 가장 야윈 새끼 양에게 누가 젖병을 물릴 것인가,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 것인가를 놓고 활발한 토론이 벌어진다. 하지만 새끼 양의 이름은 얼마 안 가 사라진다. 새끼 양으로 사는 시절도 늦여름이면 끝이다. 새끼 양이 그냥 양이 되는 것이다. 그때쯤이면 수컷은 도축당하고, 암컷 몇 마리는 살아남아 양 떼 증식의 임무를 맡는다. 그때가 되면 애들은 양의 이름 같은 것은 까맣게 잊는다. 아니, 양 자체를 까맣게 잊는다. 세상이 그렇게 생겨 먹었다. --- p.108

도축한 다음 날의 단상.
모든 일을 우리 손으로 처리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한 해 전에 불러왔던 전문가는 육류 생산 회사에서 15년간 일한 경험이 있는 착한 친구인데, 요새 이 친구의 전문 분야는 정신 건강 관리인 것 같다. 이 친구가 있을 때는 자리를 뜰 수도 있었고 우리 일이 아닌 척할 수도 있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다 걸머져야 했다. 피는 계속 쏟아지고 양은 계속 죽는데 감각은 쉽게 무뎌지지 않는다. 죽은 양 열두 마리는 죽은 양 열두 마리다. 볼트 건 열두 발은 머리통 열두 개를 박살 낸다. 에누리가 없다. 도축하기 전에 독한 술을 마시는 것이 오랜 전통이다. 즐거워서 마시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 알겠다. --- p.132

목장에 다른 동물들이 들어오고 있다. 장난을 좋아하고 사교적이면서 단순한 돼지는 시큼하게 상한 젖을 제일 좋아한다는 것만 빼면 인간과 꽤 비슷한 동물이다. 힘세고 의리 있고 요긴한 말은 잠재적 색광이라는 것만 빼면 인간과 비슷한 데가 전혀 없는 동물이다.
그래도 나에게 제일 특별한 동물은 아직 양이다. 나는 차분하고 겸손하고 금욕적인 양이 좋다. --- p.170

오늘은 양 떼를 몰고 목장 옆 찻길로 나갔다. 다른 지름길도 있었지만 양 떼가 길을 건널 때 자동차들이 도로 위에서 꼼짝 못 하고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양치기 개를 관리하는 사람이 특히 그 장면을 보고 싶어 했다.
사실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다들 재미있어 했다. 일요일에 이 길을 급하게 달리는 차는 없다. 양은 차가 오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나는 가끔 교통 방해 행위가 모든 자연 파괴 행위에 반대하는 과격 시위로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보곤 한다. 동물을 도로에 잔뜩 풀어놓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 같다. --- p.182

목장에도 새 시대가 왔다. 불가항력이었던 것 같다. 우리도 양을 소득원으로 보기 시작했다. 양 떼의 규모가 늘어날 것이고 도축장 허가도 받을 것이다. 진짜 목축업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소득을 발생시켜야 세금을 축내지 않는 사람이 된다. 원칙적으로는 핵무기 업자나 포르노 업자도 성실한 고액 세납자가 될 수 있다. 반면 세상만사에 의문을 품고 돌멩이를 걷어차면서 길거리를 배회하다가는 금방 수상한 사람이 된다. 의욕이 안 생기는 게 당연하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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