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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우주보다 더 큰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보자 산책이 시가 될 때 행복을 믿으세요? 11월의 푸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과일이 둥근 것은 여름을 닮은 사랑 온 마음을 다해 오느라고 영원 속의 하루 바다에서 바다까지 아무것도 몰라요 잘 걷고 잘 넘어져요 국경을 넘는 일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 하룻밤 사이에도 겨울은 올 수 있다 꿈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네 저녁이 왔을 뿐 하나의 창문이면 충분하다 회색의 힘 진실은 차츰 눈부셔야 해 고양이는 꽃 속에 언덕 서너 개 구름 한 점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그녀는 아름답게 걸어요(부치지 않은 편지) |
저한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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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은 도망이 아니라, 믿음을 넓히는 일이다.
--- p.15 행복은 그녀나 나에게 있지 않고 그녀와 나 사이에, 얽힌 우리의 손 위에 가만히 내려와 있었다. --- p.32 노래는 긍정적인 사람에게 깃드는 것이라기보다는, 필요하여 자꾸 불러들이는 사람에게 스며드는 것이다. 매 순간 ‘방향’을 선택한다. 행복을 목표로 삼는 방향이 아니라, 앞에 펼쳐진 모든 가능성 중에 가장 선한 길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른다. --- p.34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연민이 아니라,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바치는 아부가 아니라, 나에게도 있고 타인에게도 있는 외로움의 가능성을 보살피려는 마음이 있어 우리는 작은 원을 그렸다. --- p.41 위층 노부부의 말다툼이나 코 고는 소리는 이제 안 들리면 허전하고, 아래층 신혼부부의 소리가 뜸해지면 그들의 애정전선이 괜히 걱정스럽다. 그들 중간에 끼어 있는 나도 무슨 소리를 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식으로 나도 여기 살고 있다고 알리고 싶은 밤에, 나는 소리 내어 시를 읽는다. --- p.47 돈이 들어오면 나는 단짝 친구에게 생맥주를 사줄 수 있는 호사를 누렸다. 그녀는 모딜리아니 그림 속 여인들처럼 얼굴과 목이 길었다. 우리는 성격도 취향도 쓰는 시도 달랐지만, 사시사철 싱숭생숭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통했다. 봄도 타고 여름도 타고 가을도 타고 겨울도 타는, 조용하지만 이상한 영혼들. --- p.109 얼마나 많은 불운이 우리를 숨어 기다리는지 짐작도 하지 못하고, 그저 책으로 겪는 불행만으로 몸을 떨었던 스무 살의 우리. 정말 모든 것들은 하룻밤 사이에 왔다. 어둡고 차가운 것일수록 더 빠르게. 시인이 되지는 못했지만, 시인의 불행은 우리 것이 되기도 했다. --- p.105 가끔은 정말 궁금해져서 다른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당신이 낯설지 않나요? 당신이 잘 보이나요? --- p.122 나는 시와 저녁이 잘 어울리는 반려라고 느낀다. 모호함과 모호함, 낯설음과 낯설음, 휘발과 휘발의 만남. --- p.124 나의 산책 준비는 길고양이들의 사료 봉지와 물통을 배낭 속에 챙기는 것부터이다. 내가 운영하는 고양이 식당은 그야말로 성황이다. 비슷한 시간에 식당을 여는 편인데, 나는 시계를 보고 나가는 것이지만 고양이들은 어떻게 재깍재깍 오는 건지 신기하다. --- p.147 산책의 마지막 기쁨은 돌아가는 길을 얼마나 순순히, 서두르지 않고 걷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산책자이면서 수집자이다. 아니, 수집보다는 ‘줍줍’이라는 사전에 없는 낱말이 더 어울리겠다. (걷다가) 줍(고) (걷다가 또) 줍(고). --- pp.155-156 |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시가 산책이 될 때, 산책이 시가 될 때… 시를 읽는다는 건 무엇일까? 그럼, 산책을 한다는 건? 그건 어쩌면 고요한 하강과, 존재의 밑바닥에 고이는 그늘을 외면하지 않는 묵묵함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그건 결국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고, 여기에 내가 살고 있다고 말하는 초록색 신호일 수도 있다. ‘말들의 흐름’ 시리즈의 네 번째 책『시와 산책』은 작가 한정원이 시를 읽고, 산책을 하고, 과연 산다는 건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해온 시간들을 담아낸 맑고 단정한 산문집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작가의 첫 책이다. 놀라운 이유는 이 책이 너무나 좋아서. 작가가 쓴 스물일곱 개의 짧은 산문에는 그녀가 거쳐온 삶의 표정들이, ‘시’와 ‘산책’을 통해 느꼈던 생활의 빗금들이 캄캄한 침묵 속에서도 의연히 걸어가는 말줄임표처럼 놓여 있다. 한없이 느리게도 보이고, 더없이 끈질기게도 보이고, 지극히 무연하게도 보이는 문장들로 그녀는 ‘시’와 ‘산책’으로 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산문을 완성한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우리는 그녀가 평생 시를 쓰고, 읽고, 보듬고, 도닥이면서도 결국 혼자 꽁꽁 얼려두고 숨겨만 두었던 마음속의 아주 깊은 곳으로 첨벙 뛰어들어, 그녀의 조용한 방관 아래에서 페소아와, 월러스 스티븐즈와, 로베르트 발저와, 파울 첼란과, 세사르 바예호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과, 울라브 하우게와, 에밀리 디킨슨과, 안나 마흐마토바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포루그 파로흐자드와, 실비아 플라스와, 가네코 미스즈를 만나고야 만다. 그녀와 함께, 그녀가 사랑했던 시인들과 함께, 그녀가 종종 입 밖으로 소리 내던 시어들과 함께, 천천히 너르게 산책을 떠난다. 우리는 그녀를 따라 겨울의 마음이 되었다가, 봄의 소리가 되었다가, 여름의 발자국이 되었다가, 가을의 고양이가 되고, 서로가 서로의 시가 되고, 서로가 서로의 산책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를 쓰다듬으며 서로에게 묻기도 한다. “당신은 당신이 낯설지 않나요? 당신이 잘 보이나요?” _본문 중에서 우리는 자신으로 살기 위해 누구처럼 살지 말자고 서로에게 다짐도 한다. 그녀의 문장으로 웅장해진 가슴이 신기하고 자랑스러워 제법 힘껏 펴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져 감추기도 하면서도, 결국은 그녀의 문장들로 점점 거대하고 성대해지는 우리의 세계를 목격하는 기쁨을 누린다. 아주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처럼『시와 산책』의 문장들은 몇 번을 곱씹으며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야 우리에게 와 곁을 내어준다. 어느 날은 우리를 젊어지게도 하고, 어느 날은 우리를 늙어가게도 하면서. 그러니, 바로 지금이, 우리가 ‘시’와 ‘산책’을 할 바로 그 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