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0년 06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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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176쪽 | 202g | 120*200*20mm |
ISBN13 | 9791196517199 |
ISBN10 | 1196517193 |
발행일 | 2020년 06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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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176쪽 | 202g | 120*200*20mm |
ISBN13 | 9791196517199 |
ISBN10 | 1196517193 |
온 우주보다 더 큰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보자 산책이 시가 될 때 행복을 믿으세요? 11월의 푸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과일이 둥근 것은 여름을 닮은 사랑 온 마음을 다해 오느라고 영원 속의 하루 바다에서 바다까지 아무것도 몰라요 잘 걷고 잘 넘어져요 국경을 넘는 일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 하룻밤 사이에도 겨울은 올 수 있다 꿈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네 저녁이 왔을 뿐 하나의 창문이면 충분하다 회색의 힘 진실은 차츰 눈부셔야 해 고양이는 꽃 속에 언덕 서너 개 구름 한 점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그녀는 아름답게 걸어요(부치지 않은 편지) |
시를 안 읽던 사람이 시집을 가지고 다닌다. 가장 갖고 다니기 쉬운 책인데도 두툼한 책들 사이에 끼워 넣지 못했던 책. 가끔 시를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면서도 마음을 담아 읽지 못했던 책. 나를 챙겨보는 시간이 부족해지자 손에 닿는 책을 지니고 다니게 됐다. 틈 날 때마다 시를 읽어내면서 조각조각 흩어지는 마음들을 다시 끌어 모은다. 늘 읽던 책들을 더 이상 집어 들 여유가 없을 때 시집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 같기도 하다. 긴 문장들을 읽느라 에너지를 쏟기보다 짧고 임팩트가 강한 글에 더 집착하게 된다. 그게 더 힘이 될 때가 있다.
일상의 여유로움, 여백을 찾게 해주는 시가 좋다. 잠깐씩 마음 챙김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휴식이 필요할 때 읽으면 좋은 시들을 찾아 읽는다. 마음 챙김을 하지 않으면 습관이 된 생각, 말과 행동만 자연스럽게 반복하며 살게 된다. 이럴 때 잠시라도 딴 생각을 하면 자동화 시스템에 의지하던 나를 흔들어 깨운다. 짧게라도 나를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면 마음가짐부터 몸가짐까지 일순간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사색하는 시간을 꽉 차인 시간표 안에 넣어두고 있어야 한다. 누군가 그랬다 사색하지 않으면 진짜 얼굴이 사색이 될 거라고. 공감 가는 말이다.
<시와 산책>, 시에 마음이 사로 잡혀 있을 때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산책이란 말이 시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과제를 내게 얹어준다. 시를 읽고, 산책을 하자. 간단한 결심이지만 내게 꼭 필요한 과제다. 어쩌면 바쁜 현대인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일 수도. 이런 생각 덕분에 책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시를 읽듯 한 편 한 편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었다. 마침 빨리 읽을 수도 없는 글들이다. 일상을 세밀하게 더듬으며 살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읽으면 좋은 글들이 이어진다. 시와 산책, 두 단어가 주는 느낌의 속도로 읽게 된다.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지혜로워지거나 선량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시의 한 행에 다음 행이 입혀지는 것과 같다. (25쪽)
내가 보는 것, 읽는 것, 쓰는 것이 생각을 일순간에 바꿔놓는다. 독서가 그래서 좋다. 글을 읽는 동안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내가 읽고 있는 글에 집착한다고 느낄 때가 자주 있다. 시를 읽고 있으면 시에 집착하고, 누군가의 글이 마음에 들면 그 사람의 다른 글을 찾아본다. 산책을 할 때도 다른 사람이 된다. 산책을 하는 동안 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생각으로 이어지곤 했다. 평소와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산책하며 떠올린 생각을 글로 정리한 적이 많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나는 결국 읽고 생각하는 사람, 산책하며 생각하는 사람인 셈이다.
산책을 사랑했고 산책하던 중 숨을 거둔 로베르트 발저도 말한 바 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다시 나 자신이 되었다.(26쪽)
내가 어떤 생각들을 떠올리며 사는지가 참 중요해진 지점을 지나고 있다. 책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어 마음 챙김, 생각 챙김이 절실할 때 이 책은 한 권의 시집처럼 가볍게 내게 날아 들어왔다. 작가의 글 모두를 시를 읽듯 음미하며 읽었다. 그리고 시집 한 권과 같이 가지고 다닌다. 시를 쓰듯 글을 쓴 작가의 글이 부러워진 마음 때문이고, 작가처럼 일상을 세밀하게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작가의 첫 책인 탓에 더 읽을 책이 없어 다 읽고도 가방에 여전히 넣어 다니고 있다. 다른 책이 나온다면 얼른 손에 넣을 것 같다.
세상과의 결속에서 틈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나의 내면이 나의 존재와 끊어지지 않으려 분투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 영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계속 시도해보겠다는 의지 같은 것.
저녁은 그렇게, 시를 읽는 나와 함께 늙어간다.(125쪽)
“태어나 성장하고 일하며 대략 열 개의 도시를 거쳤다. 사람과 공간을 여의는 것이 이력이 됐다. 대학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단편영화를 세 편 연출했고 여러 편에서 연기를 했다. 구석의 무명인들에게 관심이 많다. 수도자로 살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했고, 지금은 나이든 고양이와 조용히 살고 있다. 읽고 걷는 나날을 모아 『시와 산책』을 썼다. 책을 덮고 나면, 아름다운 시들만이 발자국처럼 남기를 바란다. 앞으로는 나를 뺀 이야기를 계속 써나가고 싶다.”
작가 스스로가 밝히고 있는 소개글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마음에 들었다. 마냥 무겁지 않으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재치는 자신을 소개하는 글에서부터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는 순식간에 한정원이라는 작가의 글에 매혹되었다. 매혹적이지만 압도적이지는 않아서 더욱 좋았다. 그리고 작가의 다른 글이 언젠가 어딘가에서 책으로 엮여 나온 적이 있나 흔적을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그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겨울에 말을 타고 언 강 위를 지나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듬해 봄에 강이 풀리고 나자 그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강이 얼어갈 때 소리도 같이 얼어 봉인되었다가, 강이 풀릴 때 되살아난 것이다. 말도 사람도 진작에 사라졌지만, 그들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소리가 남은 것. 눈을 감고 그 장면을 상상하면 울컥할 만큼 좋았다. 누군가는 실없는 이야기로 치부할 테지만, 나는 삶에 환상의 몫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려는 삶에서도 내밀한 상상을 간직하는 일은 필요하다. 상상은 도망이 아니라, 믿음을 넓히는 일이다.” (pp.17~18)
무심코 보고 읽다가 울컥하게 만드는 구석도 적지 않은데 작가가 어딘가에서 들었다는 언 강의 이야기도 그중 하나이다. 얼어 봉인되었던 말발굽 소리가 봄이 되어 강이 녹자 다시 들리는 장면은 보기 드물게 시청각적이다. 40년간 소록도, 그 외딴 섬에서 한센인들을 돌보다, 혹시라도 화려한 찬사를 받을까봐 어느 날 편지 한 통을 남긴 채 고국으로 떠났다는 두 명의 외국인 수녀의 이야기는 또 어떻고...
“숲에서 길을 읽기 좋은 때가 두 번 있는데, 폭설이 내린 다음 날과 11월의 아무 날이다. 각각 흰 눈과 검붉은 낙엽으로 바닥이 다 덮여서 길이라 부를 만한 것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길의 경계가 지워지고 방향감각마저 흐려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무렇게나 걸을 수 있는 자유가 벌어진다. 갈피 없이 온전히 공간을 누리며 산책할 수 있는 특권이 그 날들에는 있다.” (p.39)
‘시와 산책’이라는 테마는 시의 정신으로 무장한 채 산책이라는 육신을 통해 우리 앞에 지긋하게 놓인다. 이름마저 생소하거나 이름은 생소하지 않아도 막상 그 시는 생소한, 작가의 시들을 조금씩 투입하며 글을 진행시킨다. 자신을 묘사할 때는 서정적이고 그저 아름답기 그지없는데, 인용된 어떤 시들의 어떤 문구는 일종의 잠언처럼 깊고 오래되어서 한동안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있어야 한다.
“강이라면 수천수만 개의 물결들이 현기증이 나도록 반짝거리던 것, 내가 거기 돌멩이를 무수히 던지며 혼자 놀았던 것, 어느 날 강에 업혀 잠든 듯 흘러가던 죽은 여자를 보았던 것이 생각난다. 강은 고요하고 지겹고 아름다우며 우물처럼 으스스했다. 물결은 가만히 보면 날개를 펼친 새와 닮았는데, 그래서인지 강은 늘 나를 두고 멀리 가버렸다. 강 앞에서 나는 언제나 서운한 사람이 되었다.” (p.77)
작가가 무심하게 툭 하고 던지는 짤막한 표현이 갑작스레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어버리는 순간들도 여럿 있다. ‘어느 날 강에 업혀 잠든 듯 흘러가던 죽은 여자’라는 표현이 그러하다. 아, ‘강에 업혀’ 라니, 싶은 것이다. 자신의 집에 함께 살며 일을 해주는 언니가 동네 대학생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하러가는 그 밤의 골목, 그 밤의 골목에서의 자신을 ‘더운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대목도 좋았다.
“아침이 어두워지고 있다. 읽다가 덮어둔 책 위로 내 회색 고양이가 몸을 누인다. 고양이는 책을 읽지 않지만 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책을 얼마나 가볍게 사랑하는지. 멀리 있다가도 기꺼이 걸어와서, 꼭 그 위에 털썩 누워 잠들어버린다.
오늘은 회색 위에 회색 고양이가 얹히니 구별이 되지 않는다. 나는 털이 많은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한다. 그게 기쁜지 책은 자꾸 갸르릉 소리를 낸다.” (p.137)
한동안 하고 있는 일과 관련하여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분주하게 살았다. 일단 일에서의 한 고비는 넘겼지만, 한 해가 마감되는 시기이고 겨울의 초입이고 아버지는 여전히 병중이고 엄마는 계속 심심하다. 여간해서 내 분주함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그리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문득문득 억울할 때도 있다. 그럴 때 이런 한정원의 《시와 산책》을 만나서 좋았다, 책 속의 고양이들도, 책 바깥의 내 고양이들도...
“나는 일부러 꽃그늘 밑에 그릇을 둔다. 몇 군데 나누어 준 밥그릇에 고양이들이 꽃잎처럼 둥글게 붙어 배를 채우는 동안, 나는 쪼그려 앉아 가만히 봄볕을 먹는다. 서로 다투지 않고, 나 자신과도 다투지 않는, 순한 시간이다.” (pp.149~150)
한정원 / 시와 산책 / 시간의흐름 / 172쪽 / 2020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