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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주의 다른 상품
어렵지 않고도 날카로운 시
이정연(kafkayeon@yes24.com)
2019.02.28.
시간이 갈수록 스스로가 유연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때 그때 상황에 맞는 대처 방법이 무엇인지, 상대가 기대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빠르게 행동하거나 말할 수 있다. 이런 스스로가 마음에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낯설다. 능력 대신 요령만 느는 것 아닌지, 언변 대신 거짓말이 느는 것 아닌지 가끔 무섭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할까, 외로워진다.
유연해진다는 말 뒤에서 관습에 익어버리지 않을까 두렵다면, 또는 자신이 유달리 일상 속 익숙한 일들에 자주 멈칫거린다고 느낀다면 조해주의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를 펼쳐보자.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를 쓴 조해주는 등단 시인이 아니다. 그 때문인지 『우리 다른 이야기하자』에 수록된 시는 기존의 시보다 덜 난해하고 덜 우울하다. 일상 언어로 쓰여진 미적지근한 시라고나 할까. 하지만 여느 시보다도 날카롭게 평범한 일상 속 이상한 순간들을 포착해낸다. 저녁 먹었어요? 어떤 사람이 그렇게 물어오면 일부러 저녁을 먹지 않는다. 먹지 않았다고 말하려고.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전에 드라마를 본다. 행복해지거나 죽기 직전까지의 이야기 - 「여분」 중에서 길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소설은 언제까지 쓸 거니? 누군가가 묻는다 못 쓰지만 계속 쓸 거야 못 생겼지만 사는 것처럼, 나는 대답한다 덤불이 되도록 꼬이고 이해할 수 없는 길을 품 안 가득 안고 - 「눈 깜빡할 사이에」 중에서 행복하지 못하면 죽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실행할 수는 없으니 그 직전까지 치닫는 드라마를 보고, 어떤 미래가 기다리는 줄 모르지만 일단 산다. 모순적이지만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다. 하지만 이해에 그치지 않고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에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심함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뜨겁거나 차갑고 대체적으로 미적지근한 일상을 사니까. 김소연 시인의 추천사 "마음에 드는 시편들에 귀퉁이를 접지 마세요. 거의 다 접혀 있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가 무색하지 않다. 시를 읽어보고 싶은데 어려울까봐 주저되거나 일상의 새로운 면면을 만나고 싶을 때 펼쳐볼 시집이 나왔다. 일상의 다른 이야기를 펼쳐보자. |
그는 이별의 달인이다.
마음의 문이라는 게 정말로 있고 그 너머에 개 한 마리가 살고 있다면. 그는 잠든 개를 깨우지 않고 천천히 문을 닫을 수 있다. 정말 아주 천천히. ---「정물화」중에서 저녁 먹었어요? 어떤 사람이 그렇게 물어오면 일부러 저녁을 먹지 않는다. 먹지 않았다고 말하려고.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전에 드라마를 본다. 행복해지거나 죽기 직전까지의 이야기. ---「여분」중에서 이것, 하고 말하면 누군가 설탕에 절인 포도를 나에게 건넨다. 빈 유리병이 필요했는데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겠지. 맞아요, 이것이 필요했어요. ---「이것, 하나」중에서 |
평범한 일상 속에서 관찰되는 이상한 단면들
조해주의 정서는 불안하기보다는 튼튼하고, 그에 따르는 문장은 간결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발생되는 자연스러움이 단순한 일상의 잔영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평범하게 넘길 법한 일상적인 장면도 조해주의 눈빛과 말을 입으면 일순간 시의 무대로 넘어온다. 그러한 무대의 이동이 조해주의 시에서 대개 ‘말’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것, 하고 말하면 누군가 설탕에 절인 포도를 나에게 건넨다. 빈 유리병이 필요했는데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겠지. 맞아요, 이것이 필요했어요. ―「이것, 하나」 부분 누군가가 내게 건넨 것과 내게 필요한 것이 일치하지 않는 저런 흔한 일상의 순간이라면 보통은 부정의 말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조해주는 “아니오, 그거 말고, 저거요.”라고 말하는 대신에 “맞아요, 이것이 필요했어요.”라고 말한다. 얼굴에는 여전히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띄운 채. 이러한 혼란 속에서 유지되는 것과 변화하는 것 사이의 기묘한 조화가 조해주의 시를 독특하게 만든다. 말이 통하지 않는 가운데 건네받은 것에 대하여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표면적인 정서는 평안하게 유지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 그 평안이 표면적인 것일 뿐이며 속에서는 딴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평안을 유지하기 위한 말이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내가 필요했던 것이 정말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가 설탕에 절인 포도를 받고서 짓는 어리둥절한 표정은 ‘내가 말하던 건 이게 아니었다’라는 의미인 동시에 ‘사실 내가 말하려던 것이 이것인 줄 나도 몰랐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필요했던 것 자체의 변화는 즉, 감각 자체의 변화이다. 조해주의 시에서, 나와 세상의 의견 불일치와 이에 따른 변화가 ‘말’로 나타나는 사례는 그밖에도 다양하다. “이번 주말에도 다음 주말에도 비가 온다고 했는데”(「익선동」) 오지 않는 일이나,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을 때”(「참석」)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는 일, “그가 마침 잘 아는 곳이 있다고”말할 때 “이 모든 것이 신기하다고 대답”(「일행」)하는 일, 단골이 되고 싶지 않아서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다가 나오는 카페의 주인이 어느날 “차갑게, 맞지요?”(「단골」)라고 묻는 일. 일상의 순간들이 나 또는 상대의 말을 통해 변화한다는 점 때문에 약간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는 조해주의 말들은 일상의 순간들 또한 기이한 모습으로 변화시킨다. 이때 관찰되는 일상의 이상한 장면들, 단면들은 역설적으로 우리 삶에 얼룩덜룩 묻어 있는 관습들의 이상함을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드러냄은 폭로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김언 시인의 말대로 조해주의 시는 “아주 편안하게 우리를 딴생각으로 몰아세”운다. 그의 시는 불편하지도 불가해하지도 않다. 조해주의 시집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상 속에서, 낯선 단면을 엉뚱하고도 지혜롭게 들리는 목소리와 미온의 정서를 통해 발견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미래를 살아갈 미지의 당신에게 조해주의 첫 시집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를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시편들에 귀퉁이를 접지 마세요. 거의 다 접혀 있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어느 시구에 대고 밑줄을 그으려고도 하지 마세요. 도드라진 몇몇 문장보다 다음에 오고 있는 문장으로 앞 문장을 견디는 방식이 더 멋지니까요. 조해주의 시세계에서 키워드를 찾기 위해 애를 쓰는 것도 불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조해주는 우리가 시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는 몇몇 키워드로는 요약할 수 없는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까요. 이 시집을 미래를 살아갈 미지의 당신에게 선물로 주세요. 어떤 시집은 미리 미래를 살아가고 있다는 걸 실은 알고 있지만, 그런 시집을 찾아내는 게 쉬운 행운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에게 특히나 소용스러울 겁니다. 다만 현재진행형인 이 시간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신다면, 만약 그렇다면, 더더욱 이 시집이 적합할 겁니다. 우리가 겪었을 법한 어떤 순간이,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마음에 담아본 적 없이 지나쳐버린 순간이 이 시집에는 생생하고 선명하게 담겨 있답니다. 하나 더. 시를 꾸준하게 읽어왔지만 좀 더 다른 세계를 찾고 계신 분들에게도 이 시집을 권합니다.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라는 말이 어느 만큼의 진심인지 전해질 거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시가 지나치게 시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시와 거리를 두었던 분들에게도 이 시집을 권합니다. 간결하게 훈련된 문장이 얼마만큼 깊은 정서를 전달하고 있는지, 담담하게 훈련된 어법이 얼마만큼 멀리 퍼져나가고 있는지, 별다른 독법이 없어도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엔 응원해야 마땅할 시집이 많지만, 이 시집은 더 각별한 응원이 필요합니다. 비등단 시인의 첫 시집이며, 지금을 성실하게 견디며 살고 있는 이십 대의 비망록입니다. 좌절도 희망도, 다정함도 씩씩함도, 피로와 고독도 조해주에게는 필요치 않은 듯해 보입니다. 당연히 의연합니다. 표출된 의연함이 아니라 기조에서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의연함입니다.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도 이 시집은 기묘하게 신비합니다. 이 신비에 이름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경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런 경험을 나누어 가지는 일이 시를 읽는 보람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김소연 시인 추천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