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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길잡이말 예수와 바울로 바울로와 그리스도교 예수의 영성신앙 예수와 영지주의 영성신앙의 보고인 요한복음 1장 요한복음 1장 참삶은 온통이요, 참나인 하느님을 찾는 것 하느님은 말씀으로 계신다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독생자란 하느님의 외아들이란 뜻이 아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의 스승인가? 예수는 메시아도 랍비도 아니었다 예수를 좇으려고 모여든 아름다운 사람들 2장 요한복음 2장 맹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게 기적인가? 예수가 분연히 성전 정화에 나섰다 성전을 헐면 사흘 안에 짓겠다 예수는 핏줄의 오라를 끊은 자유인이다 예수처럼 말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안다 3장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았다 사람의 아들[人子]은 얼나이다 4장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인에 대한 차별의식을 허물다 5장 요한복음 5장 베짜타 못에서 38년 기다린 환자 얼나를 깨달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 6장 요한복음 6장 5병 2어로 5천 명을 배부르게 먹이다?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 내 살 먹고 내 피 마셔라 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사온데 어디로 가나? 7장 요한복음 7장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는가? 8장 요한복음 8장 너의 죄를 묻던 이들은 다 어디 있는가? 너희는 아래서 왔지만 나는 위에서 왔다 나는 아브라함 나기 전부터 있었다 9장 요한복음 9장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10장 요한복음 10장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11장 요한복음 11장 부활한 생명인 얼나는 죽지 않는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하였다 이대로 두면 누구나 다 그를 믿는다 12장 요한복음 12장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예수가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한다 하느님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이다 13장 요한복음 13장 온 몸은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14장 요한복음 14장 너희는 근심도 말고 두려워 말라 너희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된다 그이는 진리의 성령이시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 내가 떠나갔다가 다시 온다 15장 요한복음 15장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16장 요한복음 16장 사람들은 너희를 회당에서 쫓아낼 거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나 홀로 걸어가리라 17장 요한복음 17장 영원한 생명은 보내신 이를 아는 것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세상은 아버지를 모르나 나는 안다 18장 요한복음 18장 제사장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갔다 그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19장 요한복음 19장 님은 어찌 그렇게도 빨리 돌아갔나? 빌라도가 예수에게 베푼 어쭙잖은 호의 20장 요한복음 20·21장 예수의 주검이 다시 살아났다니? 토마가 외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
朴永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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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 부활 신앙, 대속 신앙은 예수의 것이 아니다!
예수는 원죄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죄가 있다면 유전인자(DNA)로 유전되는 짐승의 본능인 탐(貪), 진(瞋), 치(痴)의 수욕(獸慾)이다. 그것은 스스로 얼나로 솟날 때 다스려지는 것이지(요한 17:2) 제물을 바쳐서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로의 대속 이론은 무의미할 뿐이다. 어찌 예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예수는 바울로처럼 제도 교회를 세운 적이 없다. 자기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준 자유로운 도량(교육장)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바울로는 많은 교회를 세웠다. 장로니 집사를 둔 것도 바울로다. 바울로는 입만 열었다 하면 교회다. 고린토서에만 교회라는 말이 29번이나 나온다. 바울로야말로 교회 지상주의자라 하겠다. 이 땅에 교회가 필요하지만 섬김과 사랑의 교회라야지 억압하고 증오하는 교회는 백해무익할 뿐이다. --- p.34 예수님과 부처님 중에 누가 더 참된가요? 서울 종로 YMCA 연경반 류영모의 강의를 열심히 들으러 나오던 서울법대생 주규식이라는 이가 있었다. 하루는 주규식이 류영모에게 물었다. “선생님, 예수님과 부처님 두 분 중에서 누가 더 참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류영모가 대답하기를 “예수님과 부처님 두 분 중에 누가 더 참을 가졌는지는 나는 모른다. 비교할 일이 있으면 모르지만 비교해선 안 된다. 그건 절대자 하느님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류영모, 《다석어록》)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경쟁하는 진성(瞋性)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경쟁하고 비교하기를 즐긴다. 실력이 비등한 이들이 있으면 꼭 경쟁을 붙여 우열을 가려야 시원해한다. 사람들은 그런 데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예수와 세례자 요한이 동시대에 태어나 서로 만나게 된 것만 해도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둘 중에 누가 더 참된지 비교하기를 좋아한다. 비교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강박신경증이라도 가진 것 같다. 예수는 예수이고, 요한은 요한이다. --- p.79 예수는 메시아도 랍비도 아니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메시아란 이스라엘의 나라를 재건하여 다윗이나 솔로몬보다도 월등한 힘으로 주변 국가를 멸망시킬 정치적인 영웅이다. 랍비는 유대 종교의 권위 있는 스승으로서 정신적인 지도자이다. 그러나 그 당시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인 영웅도 아니었고, 종교적인 지도자도 아니었다. 예수는 오로지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하려 하였고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인 얼(성령)을 받아 하느님 아들이 되는 길을 가르치고자 하였을 뿐이다. 예수가 말하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말한다. 어버이가 낳아준 멸망의 생명인 제나에서 하느님이 낳아주시는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솟나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가르침)을 바로 알아듣는 이가 거의 없었다. --- pp.85-86 예수가 맹물로 포도주를 만들면 기적인가? 여느 사람이 맹물로 포도주를 만들면 마술일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가 맹물로 포도주를 만들면 기적인가? 이 사람이 보기에는 예수가 하여도 기적이 아니라 마술이다. 이래도 저래도 사람을 속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르낭은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를 위대하게 만들려다가 더 품격을 떨어뜨렸다고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농부들이 밭 가는 이야기, 씨 뿌리는 이야기, 김매는 이야기, 수확하는 이야기처럼 맹물같이 담담한 이야기들이 예수의 입을 거쳐서 나오면 심오한 깨우침을 주는 형이상의 술이 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처럼 종교(신앙)를 술에 비유하였다. 그러니 예수가 맹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맹탕 거짓말만은 아닌 것이다. 예수는 갈릴래아 가나의 잔칫집에서만 맹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이 아니라 공생애 동안 줄곧 맹물 같은 사실로 포도주 같은 말씀을 만들어 사람들을 심취(心醉)케 하였다. 이것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단 말인가. --- pp.106-107 이 땅 위에 성지는 없다 이 땅 위에 성지(聖地)란 없다. 위인들의 연고지가 있을 뿐이다. 거룩한 곳은 하느님이 계시는 얼의 나라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에 이르기 위해 제나[自我]로 죽고 얼나로 솟나야 할 뿐이다. 어떤 목사가 예루살렘에 일곱 번 다녀왔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하는 글을 읽었다. 그래서 뭣이 어쨌다는 것인가. 예수의 가르침대로 얼나로 솟나지 않으면 예루살렘을 7천 번을 갔다 온다고 하여도 여행비만 들 뿐 아무 쓸데가 없다.…… 성지에 다녀오는 것으로 훌륭하다면 성지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모두가 성자의 대접을 받아야 하겠고 성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일은 없었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가 17:20) --- pp.117-118 세상이라는 욕망의 바다 위를 성큼성큼 걸어간 예수 복음서에 예수가 갈릴래아 호수 물 위를 맨발로 걸어 다녔다는 기록이 나온다. 베드로도 스승 예수를 따라 물 위를 걷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무서운 생각이 들자 물에 빠지고 말았다. 베드로가 ‘주님 살려주십시오.’하고 비명을 질러 예수가 곧 손을 붙잡아 살려주었다는 것이다. 이것도 상징적인 비유이다. 그대로 사실이라 믿는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될 뿐이다. ……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욕의 물결이 넘실대는 이 세상이라는 욕망의 바다에 빠져 패가망신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 욕망의 바다에 발목도 빠지지 않고 걸어갔다. 그리하여 짐승 노릇을 하지 않았다. 참으로 존경스러운 것은 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어가서가 아니라 세상이란 욕망의 바다 속으로 빠지지 않고 성큼 성큼 걸어갔다는 사실이다. --- pp.178-180 제자를 떠나보낼 줄 아는 사람이 참스승이다 참된 목자라면 훌륭한 스승을 찾아가라고 소개를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례자 요한의 정신이고 예수의 정신이다. …… 예수처럼 제자들을 하느님께로 보낼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로 보내는 것을 귀일(歸一)신앙(사상)이라고 한다. 귀일신앙은 바꿔 말하면 자율신앙인 것이다. 스승(목사, 신부)이 필요 없는 자율신앙인을 길러야 한다. 오늘의 교회는 이런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신도들이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게 해야 하지만 매어만 두려고 해서도 안 된다. 이 사람이 스승 류영모를 잊지 못하는 것은 스승이 이 사람에게 단사(斷辭)를 해야 한다며 자신을 찾아오지도 말고 편지 하지도 말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유익하다는 예수의 정신이 바로 단사(斷辭)의 정신이다. 예수의 말대로 하느님이 참 아버지요 참 스승이시다. 땅 위에 있는 아버지나 스승은 임시의 거짓 아버지요 스승일 뿐이다. --- pp.200-201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선 안 된다 예수는 이 세상에서 누구 못지않은 가난과 고독 속에서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박해와 시련을 모질게 겪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함이었다. 그래도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사람 탓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예수의 가르침을 좇겠다면 오로지 예수의 신앙을 본받아야지 쓸데없이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것은 모자라는 생각이다.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몸나를 위해 물질생활이 좀 나아지면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인 줄로 안다. 그래서 류영모는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바라는 게 식색(食色)의 삶이 풍성해지는 것뿐이라며 한탄하였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뭐라고 이 짐승 같은 우리에게 그 영원한 생명, 위로부터 난 생명(얼나)을 주셨으니 이게 정말 사랑 아닌가?”(류영모, 《다석어록》) --- pp.275-276 참사람은 죽음을 타고 다니고 죽음을 베고 잔다 예수는 자기 몸의 죽음을 직시(直視)하고 정견(正見)하여 깊이 생각하였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세 차례나 예고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요한 12:27) 류영모도 예수를 본받아 죽음을 바로 보고 산 사람이다. 훌륭한 권투선수가 상대방 선수의 주먹에서 눈을 떼지 않듯이 참사람은 늘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면서 산다. …… 자신의 죽음을 바로 보기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많다. 가능한 한 죽음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따돌릴 수 없듯 죽음도 따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참사람은 죽음을 타고 다니고 죽음을 베고 잔다. --- p.318 사람은 사랑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다 사람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와서 누구를 사랑하였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값어치가 결정된다. 이 누리에 와서 맘과 뜻과 힘을 다해, 곧 목숨을 바쳐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이 가장 값지게 산 사람이다. 예수가 이르기를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 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 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가지도 못한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마태오 6:19∼21)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는 말은 땅 위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고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 p.322 우리가 서로 미워하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예수, 석가, 공자, 노자, 장자같이 얼나로 솟난 이들이 한곳에서 산다면 이 땅에도 우애의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분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하여도 서로 잘났다고 할 리가 없다. 얼로 뚫려 말이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퇇 일일 것이다. 여기에서 존신우애(尊信友愛)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지 따로 지옥이 없다. 예수가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누구를 미워하고 저주하라고 한다면 그가 바로 마귀이다. 20세기에는 누구를 미워하고 죽이라는 사상이 전염병처럼 지구 위에 퍼져 수많은 살상이 벌어졌다. 캄보디아에만 킬링필드(Killing Field)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온 지구 위가 킬링필드였다. 사람을 미워하는 이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좇는다는 기독교에서도 나왔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 pp.432-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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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배반한 것은 유다가 아니라 바울로다!
기독교와 불교, 노장(老莊) 사상,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하나로 꿰는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 체계를 세운 다석 류영모의 사상으로 '요한복음'을 다시 읽는다.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은 무엇이며, 그 뜻은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다석 사상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평생을 바친 류영모의 참제자 박영호가 바울로의 교회 신앙, 대속 신앙을 비판하면서 예수의 영성신앙의 핵심이 담긴 '요한복음'을 꼼꼼히 따져 읽는다.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을 하나로 꿴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다석 류영모는 생전에는 함석헌과 김흥호 같은 20세기 한국 기독교를 이끈 ‘지도자들의 스승’으로서 알려졌다. 1981년에 세상을 떠난 후에야 예수의 가르침을 줄기로 불교, 노장 사상,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하나로 융합하여 독창적인 종교철학의 체계를 세운 철학자로서 조명받기 시작했다. 함석헌과 류영모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함석헌 사상은 다석의 갈비뼈 하나를 풀어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은다.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 등과 문우(文友)로서 교유했으며, 191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던 류영모는 31세 때 고당 조만식의 뒤를 이어 오산학교 교장을 역임했으며, 한학, 기독교, 불교, 동양철학, 서양철학에 두루 능통한 대학자였다. 1928년부터 YMCA에서 연경반(硏經班) 모임을 맡아 1963년까지 30년이 넘도록 강의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나아가 이름을 떨치는 대신 은둔하여 농사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깨달음의 길을 걷는 데 평생을 바쳤다. 특히 그는 51세에 삼각산에서 하늘과 땅과 몸이 하나로 꿰뚫리는 깨달음의 체험을 한 뒤로, 하루 한 끼만 먹고 얇은 나무판에 홑이불을 깔고 잠을 잤으며 새벽 3시면 일어나 정좌하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했다. 세 끼를 합쳐 저녁을 먹는다는 뜻에서 호를 다석(多夕)이라 하였다. 하루 하루를 평생으로 생각하며 산 류영모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기인 중의 기인으로 손꼽힌다. 모든 종교와 사상은 하나로 통한다 류영모는 평생 예수를 스승으로 섬겼으나 성경을 절대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석가, 노자, 장자, 공자, 맹자, 소크라테스 등 인류 역사에 등장한 모든 성인들을 두루 좋아했다. 그는 성경과 함께 동서고금의 다양한 사상과 종교를 공부하고 일상에서 성인의 삶을 실천한 끝에 근본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생사(生死)와 애증(愛憎), 욕망의 노예인 ‘제나(自我, ego)’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인 ‘얼나’로 솟나야(부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류영모는 바로 이것이 예수와 공자, 노자, 붓다가 인류에게 가르쳐주려 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모든 성인들의 가르침은 하나로 통한다. 예수가 ‘자유를 얻는다’라고 한 말과 붓다가 말한 ‘불성을 깨닫는다’는 같은 말이었다. 다만, 예수가 ‘성령’이라 부른 것을 노자는 ‘도’라 말했으며, 석가는 ‘다르마’라 불렀을 뿐이다. 모든 종교와 사상이 외형은 달라도 근원으로는 하나임을 밝힌 다석 사상은 시대를 앞선 종교 다원주의적 철학으로서 많은 학자들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다석 류영모의 참제자가 쓴 ‘다석 사상으로 다시 읽는 '요한복음'’ [잃어버린 예수]를 쓴 박영호는 다석의 직제자로서 오늘날 다석이 남긴 말과 글의 뜻을 온전히 풀이해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다석에겐 함석헌이나 김흥호 같은 세상에서 유명한 제자들이 있지만, 다석의 가르침을 몸과 마음으로 오롯이 실천한 참제자는 박영호뿐이라 할 수 있다. 박영호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평생 동안 소박하게 농사 짓고 진리를 탐구하며 스승의 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힘쓰며 살아 왔다. 류영모가 생전에 자신의 전기 집필을 박영호에게 맡긴 것은 그가 다석 자신의 삶과 사상을 가장 온전히 이해하고 충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참제자임을 인정한 것이었다. [잃어버린 예수]에서 박영호는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을 드러내기 위해 다석 사상을 토대로 '요한복음'을 새롭게 읽는다. 오늘날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쓰여진 말씀이 곧바로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믿으며, '사도행전'으로 대표되는 교회 중심주의 신앙이 오늘날 기독교의 근본 줄기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육체 부활 신앙, 대속 신앙, 교회 신앙은 사도 바울로의 것이지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다. 예수 사후 바울로와 그를 따르는 무리가 예수의 제자들을 제치고 성경 편집과 그리스도교의 주도권을 잡고서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해 전파했던 것이다. 저자 박영호는 바울로에 의해 세워진 지금의 기독교 신앙은 유대교의 변형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바울로는 몸나의 영생을 갈구하는 육체 부활 신앙이다. 또 예수가 제물이 됨으로써 아담의 원죄가 대속되었다는 ?속신앙이다. 끝으로 바울로는 교회 지상주의자라 할 정도로 교회에 집착하는 교회신앙이다. 그러나 예수의 영성신앙은 제나(자아)가 죽음으로써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부활하는 것이다. 예수의 영성신앙은 석가가 말한 불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서 예수의 영성신앙이 쇠락하고 바울로의 대속신앙이 득세하게 된 것이다. (/ pp.30~31) '요한복음'은 예수의 말씀을 본래 뜻에 가장 가깝게 전하는 영성신앙의 핵심이다. 다석 사상의 출발점도 다름 아닌 '요한복음'이었다. 저자 박영호는 다석 사상을 따라 바울로의 육체 부활 신앙과 대속 신앙, 교회 신앙을 해체하고, 영성에 의한 자기 구원과 끝없는 사랑의 실천이란 가르침을 전해준 예수의 참모습을 드러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