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고민 끝에 ‘20대의 회사 생활’보다 ‘20대의 해외 생활’이 더 가치가 있다고 결론지었고, 해외 취업을 생각한 지 1년 만에 한국을 떠났다. 물론 그 선택 때문에 자발적인 백수 생활을 하며 말도 안 되는 일을 겪고 팔자에도 없던 비자 걱정을 해야만 했다. 남자 친구와도 헤어졌다. 이력서만 이백 번을 내고, 모아놓은 돈이 다 떨어져 불법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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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어찌 됐든 그때 내 행동이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 깨달으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행히 제대로 직장 생활을 시작한 회사에서는 그 전 회사에 전화를 하진 않았지만 면접을 볼 때마다 프로페셔널인 척하고 다닌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Don’t burn the bridge!” 첫인상도 중요하지만 떠날 때의 뒷모습도 중요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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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3개월 동안 미국에 있었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고, 월급도 받았다. 3개월 동안 원격 근무를 하겠다고 하면 그만두라고 말할 사람들이 많은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런 유연한 환경이 직원들의 생산성과 애사심을 더 키우지 않았을까? 그 모습을 본 내 마음속에서도 애사심이 자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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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시계를 보지 않고도 여섯 시가 거의 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매일 5시 58분, 사람들은 가방을 주섬주섬 싸서 컴퓨터 옆에 놓는다.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고 구두 위로 오른다. “Bye!” 하며 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컴퓨터 시계를 보면 정확히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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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회사에서 주고받는 이메일, 동료들과의 대화를 교재 삼아 공부했다. 멋있어 보이는 표현을 들으면 ‘다음에 써먹을 것들’ 리스트에 적어 놓고 제때 잘 써먹고는 했다. 이메일에는 업계에서 어떤 용어를 쓰는지, 경우에 따라 어떤 표현을 쓰는지 다 담겨 있었다. 이메일은 내게 최고의 족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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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문만 열고 복도를 통과하면 마리나 베이와 싱가포르의 빌딩 숲이 한눈에 펼쳐질 것이고, 언제나 꿈꾸던 그 풍경 속에 내가 있을 거였다. 마천루에 대한 환상이 있던 그 시절, 참 단순하지만 처음으로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맛’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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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 문화, ‘선배=사수’ 문화는 감정을 전제로 하지만, 감정이 아닌 계약을 기초로 하는 관계는 이성이 먼저 작동한다. 그렇기에 서로 필요하면 다시 함께 일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미 회사의 분위기를 알고 있기에 적응 기간도 필요 없다. 그래서 이런 훈훈한 ‘이혼 후 재결합’을 종종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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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 Hotter, Hottest and Rainy!”
“싱가포르에도 사계절이 있어. 덥고, 더 덥고, 미친 듯이 덥고 그리고 비!” 싱가포르에 사
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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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내내 한 계절만 있는 곳에서 살 때의 좋은 점은 바로 ‘옷’이다. 여기에선 여름옷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입을 옷이 너무 없구나. 내가 지난해에 벗고 다녔나 보다’라고 푸념하던 버릇도 사라졌다. 3개월 전, 6개월 전에 입은 옷을 여전히 입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간편한지! 옷을 사는 수고도 덜고 돈도 많이 아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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밋업을 통해 나는 아르헨티나 탱고를 배우고, 음악회에 참석하고, 영화를 감상하고, 야영을 했다. 그리고 싱가포르의 다단계 판매원도 만나며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하다’는 것도 다시 한 번 느꼈다. 지구가 만들어진 이래로 변치 않는 만고불변의 진리, 끼리끼리, 유유상종의 미덕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밋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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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라인이 있다는 것은 사람의 시야를 넓히는 힘이 있었다. 언젠가 끝이 날 관계라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살았다. 상대가 징글맞다가도 ‘내가 너를 보면 얼마나 더 보겠니. 너도 얼마나 살기 힘드니’ 하는 여유가 생겼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땅에서는 계약이 필요 없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천재지변이 일어난다 해도 그건 변함이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사회를 벗어나 다른 사회에 오니 그곳과 나의 유일한 연결 고리는 바로 이 몇 장의 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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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수많은 관계가 탄생하고 죽어간다. 자주 죽는 만큼 그에 대한 내성도 높아졌다. 나는 언제라도 이사 갈 준비가 되어 있다. 항상 싱가포르를 떠날 준비도 되어 있다. 내일 당장 떠나게 된다 해도 하루면 짐을 다 쌀 수 있을 만큼 오늘도 단순하게, 그리고 즐겁게 살고 있다. 내게 이곳은 언젠가는 떠나야 할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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