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였던 아침과 훌쩍 늙어 노파가 된 저녁 사이에는 다양한 나이의 ‘내’가 존재한다. 같은 하루에 소녀인 ‘나’도, 젊은 아가씨인 ‘나’도, 40대와 50대인 ‘나’도, 여든 살 먹은 호호할머니인 ‘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도대체 ‘어른’이란 무엇이며, 어른의 조건은 무엇일까. 도통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저절로 ‘어른’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또 수없이 많은 경험을 해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소화하지 못하면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른의 끝맺음’이라는 제목을 앞에 두고,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마치 숙제를 내팽개쳐두고 여름방학 내내 신나게 놀다 개학이 코앞에 닥친 저 먼 옛날의 어린아이처럼.
어른은 ‘끌어들이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닐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숙제에서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내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 p.16
한 번 손에 넣은 것을 내어놓는 것은, 무언가를 손에 넣기보다 더 어렵다. 많이 가질수록 손에 쥔 것을 놓아버리기 힘들어진다. 그리고 지킬 게 많아질수록 정신적으로 보수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언제까지 ‘더 많이’를 바라야 직성이 풀릴까. 일정한 연령대에 들어서면 ‘더 많이 갖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삶이 불가능해지지 않을까.
실제로 나이를 먹으면 기억력, 체력, 집중력이 부쩍 떨어지며 예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자신을 의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무언가를 얻으면 예전에 얻은 다른 무언가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신의 손바닥에 쥘 수 있는, 정말로 소중한 무언가는 꼭 부여잡고, 나머지는 그만 놓아주는 ‘끝맺음’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인생의 짐’은 ‘여행의 짐’과 매한가지다. 가벼우면 가벼울수록 홀가분해진다.
이기지도 못할 짐을 무리하게 이고 지고 산다면 말 그대로 ‘짐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악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짐’을 선별해 불필요한 짐을 덜어내야 한다.
--- p.30~31
일은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정체성, 그 자체에 가깝다. 그런데 내 눈앞에서 일이 점점 줄어들고 어느덧 사라져 간다.
급여생활자는 내가 회사에서 필요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 서운해진다. 또 청춘을 바쳐 열심히 일한 대가가 고작 이거냐며 후회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갑작스럽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심경이 아닐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정년퇴직 후에는 기존의 직함이나 직위가 확실히 사라진다. 그럴 때는 내가 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전임자가 그 자리를 잃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자. 기업이 존재하는 한 되풀이되는 일이다.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르고 나면 본격적으로 중요한 과제를 생각할 시간이 온다.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전념하고 열정을 바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으면 충분할까?
우리가 ‘일’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자신이 열정을 바치며 보람을 느끼고 만족할 수 있으며, 그 일을 하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통틀어 일컫는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해본다.
많은 사람이 평생 현역으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역일 때 느낀 고양된 감정을 오로지 ‘일’에서만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일에 쏟은 열정과 의욕, 능력을 그간 발휘해왔던 장소, 지금까지 사용한 명함에 적힌 회사와 다른, 또 다른 활동 중에서 찾아낼 수도 있다. 의외로 이런저런 곳에 다양하게 존재한다. 많은 퇴직자가 시민단체 모임에 의욕적으로 덤벼드는 이유에서도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p.54~55
인간관계를 정리하면 상대방은 물론 주위 사람이 ‘차가운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줄 때가 있다. 그러나 그 꼬리표가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참고 사는 자신’을 평생 바꿀 수 없거니와, 상대방이 앞으로 달라질 가능성마저 박탈하게 된다. 그래도 괜찮다면 상관없겠지만, 아무래도 찜찜하다면 내가 바뀌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상대방 쪽에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내 쪽에 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를 이러이러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건 싫다’는 감정이 아마 있을 터이다. 그러다 가까스로 깨달았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내가 ‘좋은 사람’이고 싶은 관계는 내가 존경하고 공감하는 사람과의 관계다.
존경이 사라지고 공감이 멀어지며 표면상의 친밀함만을 유지하게 된 건 내 책임이다. 모든 방향, 모든 날씨에 적응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가 언제나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적어도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의 마음만은 저버리고 싶지 않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 마음은 오히려 나이와 더불어 강해져 간다고 생각한다.
--- p.101~102
원래 물건이 없는 단순한 공간을 좋아하는데 슬금슬금 물건이 늘어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맙소사, 소리가 나올 지경이다.
또 하나 깨달았다. 무언가를 ‘내 것’으로 삼으려고 할 때는 자각하지 못해도 스트레스가 쌓였을 때다. 정신적으로 충만한 때는 ‘갖고 싶다’는 욕망도 그다지 생기지 않고 물건도 늘어나지 않는다.
모든 욕망에서 해방되었다고 단언할 수 없으나, 해가 갈수록 ‘갖고 싶다’는 생각이 줄어들며 원래 내가 좋아하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다.
그림과 장식이 서서히 사라져도, 채반 위에 잘생긴 가지와 오이가 각각 가지색과 오이색으로 빛나고, 토마토는 토마토색으로 빛나는 모습만 보아도 멋진 그림이고 장식이다. 실제로 채소는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아름답다. 줄곧 곁에 두고 싶을 정도다. 오이는 쌀겨에 소금을 넣고 발효시켜 장아찌를 담그거나, 식초에 간장과 맛술을 넣어 만든 양념에 미역과 함께 넣고 조물조물 버무린다. 가지는 된장 양념으로 맛깔스럽게 볶아내고, 토마토는 샐러드로 만들어서 내 뱃속에 넣어둔다. 가까이에 제철 채소만 있어도 소박한 방에 계절의 바람이 지나간다.
--- p.192~193
귀가가 늦어지는 날에는 남는 에너지가 있으면 외출하기 전에 저녁식사를 준비해 둔다. 간단히 미리 손질해 두기만 할 때도 있고, 가끔 스튜나 카레, 어묵탕처럼 뭉근하게 끓여야 맛이 나는 요리는 외출 준비를 하면서 얼추 완성해 둔다.
제철 채소가 한창 맛있는 시기에 손이 큰 나는 무심코 많은 양을 사버린다. 버려지지 않도록, 예를 들어 토마토라면 미트소스와 토마토소스 등의 보존식품을 넉넉하게 만들어 냉동실에 넣어 둔다. 이 작업이 밤까지 걸릴 때도 있지만, 원고를 쓰다 지쳤을 때 요리는 좋은 기분전환이 되어 준다.
나는 여러 사람과 함께 왁자지껄하게 한 집에 모여 살았던 적도 있고 혼자 산 경험도 있다. 혼자 살다 보면 대파 한 단, 양배추 한 덩어리가 시들기 전에 다 먹어 치우는 것이 아무래도 버겁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주신 생산자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다 먹지 못하고 썩혀서 버릴 때 엄청난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서 생각할 수 있는 대로 모조리 요리로 만들어 어떻게든 소비하려 애쓴다.
한 상 가득 요리를 담은 접시가 올라와 있는 풍성한 식탁을 좋아해 많이 만들 때가 있다. 그런 날에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저녁에 밥 먹으러 올래?”라고 초대한다.
여럿이 떠들썩하게 식사하는 날이 이어지면 이번에는 ‘녹찻물에 간단한 고명만 얹어서 밥만 말아 먹어도 좋으니 혼자 조용히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두레 밥상과 혼자 밥상. 모두 풍요롭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다.
--- p.23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