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서툰 구석이 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감성의 뇌와 마음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죠. 얼마 전 우울증이 깊어진 분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힘들어 보이시네요”라며 말을 건넸더니 “오늘은 선생님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여요”라고 하셔서 함께 한참을 웃은 기억이 있습니다. 삶은 단 한 번뿐이어서 어느 누구도 두세 번 고쳐 살 수 없기에 우리 모두 인생에서 초보이고 신입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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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공할 수 있어! 나 자신을 극복할 수 있어!! I can do it!!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끝없는 주문과 강박 속에서 자발적 노동에 시달리다 탈진에 이릅니다. 사람의 의지력이란 게 화수분처럼 끝도 없이 솟아나는 게 아닙니다. 정신력이란 것도 고갈되고 소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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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 중 가장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아이가 있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그 아이만 보면 자꾸 화가 나고 저렇게 살아도 되나 걱정되고, 자주 언성이 높아지고 잔소리하게 되는 아이가 있는데요. 정신분석적으로 보면 그런 아이일수록 가장 자신과 닮은 아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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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의 문제는 결국 내가 얼마만큼 주체적으로 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나에게 스며든 수많은 고정관념을 분리수거하면서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이 삶에서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게 바로 자존감을 회복하고 ‘나답게’ 사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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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첫사랑을 잊지 못해 상담하러 온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에게 “첫사랑을 왜 떠나보내지 못합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첫사랑 상대에게 미련이 남아서 잊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상담을 깊이 진행하면, 이야기의 강조점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야기의 초점이 ‘상대’가 아닌 ‘나’에게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은 상대를 잊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 시절의 나를 잊지 못하는 거죠. 순수하고 뜨겁게 사랑했던 나 자신, 상대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던 그때의 나에 대한 미련인 겁니다. 이러한 분들이 다시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기 위해선, 상대를 떠나보내려 애쓰는 것보다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이 담긴 기억 앨범을 먼저 내려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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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자신을 무결점 이미지로 만들려 애쓰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연애는 서로 부족한 부분이 없으면 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상대에게 호감을 얻으려면 오히려 상대가 나를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상대의 이해라는 틀 안에 완전히 들어가 버리면 오히려 연애 감정이 식어버리는 경우가 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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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외롭기 때문에 늘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모임을 만들거나 편지나 문자를 주고받죠. 지금은 기술이 발전해서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연결을 시도합니다. 자신의 일상이나 이야기를 SNS에 올리고, 거기에 반응하는 사람을 보며 혼자가 아님을 느끼죠. 그런데 SNS에 소비하는 시간과 외로움의 관계를 조사한 연구결과를 보면, SNS에 소비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더 외로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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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라면, 고독이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라고요. 즉 외로움이 누군가 곁에 없어서 ‘불안’한 상태라면, 고독은 상대가 없어도 혼자 있는 게 ‘자유로운’ 상태라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고독은 잘 다스리면 내적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 p.74
그런데 왜 하필 운전할 때 더 심하게 욱하는 걸까요. 평상시에는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기에 체면 때문에라도 화를 억누르는 자제력이 발동합니다. 하지만 자동차 내부는 외부와 단절된 공간, 익명의 공간이죠. 단단한 철갑옷을 두른 자동차를 조종하는 자신이 마치 파워레인저나 트랜스포머가 된 것 같은 심리적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 p.85
자주 ‘욱’하다 보면 신경계통이 변하게 됩니다. 사람의 몸속 신경회로는 지하철이나 버스 노선과 비슷해 늘 가던 길로만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화를 습관적으로 내게 되면 ‘분노 중독’이란 새로운 노선이 만들어집니다. 분노 중독 노선이 생겨나면 화가 나서 뚜껑이 열릴 때 브레이크 역할을 해주는 전두엽을 거치지 않게 되어 그 부분이 녹슬게 됩니다.
--- p.88
저는 상담할 때 너무 천사처럼 보이는 사람을 경계하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세상에 호인(好人)으로 알려진 사람, 화를 낼 줄 모르고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은 내면에 분노나 화, 공격성 같은 면을 꾹꾹 눌러 놓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p.90
악몽에는 최악의 장면이 빠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자에게 공격당하는 꿈을 꾸더라도 다쳐 피를 흘릴 수는 있어도 사자에게 완전히 잡아먹히진 않습니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악몽을 꾸더라도 최악의 장면 직전에 멈추게 되어 있습니다. 악몽을 반복적으로 꾸는 건 악몽을 통해 끔찍한 트라우마를 좀 더 순화된 불안으로 바꾸어서 견디게끔 도와주는 우리 정신의 노력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악몽이 스펀지 같은 완충작용을 하는 것이죠.
--- p.113
저 또한 어릴 적 큰 화상을 입어 지금도 오른팔 전체에 화상 흉터가 있습니다. 저는 계란 프라이를 할 때도 뜨거운 기름이 튈까 봐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불을 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트라우마로 인해 몸속 위험 감지기가 민감해져 어떤 물건, 작은 실마리도 위험 상황과 결부시켜 대비하는 행동을 취하게 됩니다.
--- p.115
부모에게서 해결되지 않은 무의식적인 문제가 자녀에게 대물림됩니다. 알코올에 의존하는 부모를 둔 경우 자녀 또한 알코올에 의존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특히 여자아이는 아빠가 알코올 중독자일 경우, 아빠를 미워하지만 커서 아빠와 비슷한 남자를 만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정신분석에서는 ‘무의식적인 의리’ 때문이라고 봅니다. 부모가 자신이 살길 원했던 삶을 무의식적으로 자식에게 강요하는 경우, 아이는 커서 자신의 삶을 사는 것보다, 부모의 못다 한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 p.120
정신분석학에서는 우리가 믿고 있는 현실이 바로 환상이고 방어기제라고 말합니다. 환상이라 부르는 이유는 언제든 찢어질 수 있기 때문인데요. 트라우마란 결국 우리가 믿고 있는 현실이 갑작스레 파열되고 찢어질 때 생기는 겁니다. 현시대는 모든 것이 분명하고 매끄러워 보입니다. 일상이 물 흐르듯 매끄럽게 흘러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에 익숙해져 있다 보면 사소한 관계 변화만으로도, 일상의 실밥이 툭 터지는 것만으로도 정신적 충격을 느끼며 트라우마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분명하다, 답이 있다, 안전하다 믿게끔 만드는 사회가 우리를 트라우마로부터 더욱 연약하게 만드는 것이죠.
--- p.126
조언에도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심리상담학에서 ‘조언은 가장 게으른 대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이자, 대화의 문을 닫을 수 있는 말이 바로 조언이기 때문이죠. 조언은 하나의 결론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거기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집니다. 때문에 조언은 대화의 가장 마지막으로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뤄야 합니다.
--- p.149
저는 상담을 할 때 환자분들이 하는 말을 이어받아서 들려주는 편인데요. 부정어일 경우 긍정적인 말로 고쳐서 들려 드립니다.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 “말씀하실 때 신중하시네요.”
“제가 감정 기복이 심해서” → “감수성이 풍부하신가 봐요”
“제가 꼼꼼하지 못해서” → “너그러운 편이군요”
--- p.153
대화에서는 말을 잘하는 것보다 상대의 말을 잘 듣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대화를 잘 못하는 사람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이, “나는 말주변이 없다”는 건데요. 말 잘하는 달변가라 해서 인간관계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말만 하면 소통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내 말을 상대가 들어줬으면 하는 마음, 공감받고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대화를 잘하기 위해서는 대화의 주도권을 상대에게 넘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 p.155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사람에게, 주변 사람들은 위로의 말로 이런 얘길 합니다. “이제 그만 잊어버려.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는 마음에서 지워야지.” 슬픔 속을 헤매다 저를 찾아온 분들은 저런 말이 자신들을 더욱 화나게 하고 상처가 아물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상처를 떠나보내려면 ‘잊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억’해야 합니다. 상실로 인한 슬픔은 잊으려 할수록 오히려 내 안에 악착같이 달라붙습니다.
--- p.169
‘세상에는 어떤 완벽한 선택도, 완벽한 결정도 없다’는 걸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결정은 선택하는 순간에 있는 게 아니라, 선택한 후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과정에 달렸다는 걸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설사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실패한 경험이 있더라도 그걸 통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면 그것은 ‘빛나는 흑역사’가 될 수 있습니다.
--- p.191
우리가 겪는 심리적 어려움은 대개 ‘거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 조금은 안심하고 쉴 수 있는 여유 공간을 둬야 합니다. 매일 연락하고 죽고 못 사는 관계보다, 가끔 연락해 안부를 묻고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가 더 오래 유지되는 법입니다.
--- p.195
여행은 또 다른 나를 끄집어내어 새로운 길 위에 세우는 경험입니다. 일상 속에서의 나와 낯선 여행지에서의 나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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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여행의 선물은,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늘 생활하던 일상이 다르게 보이는 그 순간 말이죠. 똑같이 직장에 출근하고 똑같은 일상을 살게 되지만, 여행을 다녀오면 일상의 GPS가 바뀌어 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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