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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천천히, 북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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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으로 그린 하얀 밤의 도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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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1월 02일
쪽수, 무게, 크기 352쪽 | 564g | 148*205*20mm
ISBN13 9791189856564
ISBN10 1189856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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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밖으로 나와 보니 비가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커다란 처마 밑에서 방금 산 옷의 빳빳한 태그를 제거하며 낯선 도시가 젖어 드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우산을 챙겨 오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운 한편, 무엇인가로 채워지지 않는 이 느슨한 순간이 좋았다. 평소에는 쪼개서 썼던 시간을 그냥 흘러버리는 게 이렇게 즐겁다니. 이것이야말로 여행자만이 가지는 특권이 아닐까.
--- p.33, 「비 오는 날의 미술관」중에서

저 멀리 처음에 떠나왔던 헬싱키의 구시가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비구름이 사라진 청명한 하늘 아래로 핑크빛 석양이 비스듬히 쏟아지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몹시 차가웠지만, 갑판 위에서 헬싱키 도심의 뽀얀 풍경이 석양에 물드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황홀한 그 풍경은 마치 어린 소녀의 두 뺨에 발그레 피어난 홍조 같았다. 핀란드 사람들이 이해가 됐다. 긴 투쟁의 역사 속에서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p.48, 「수오멘린나에서의 하루」중에서

작은 지류에 들어서자 바람이 잦아들며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내뢰피오르의 잔잔한 수면 위로 오후의 햇살이 와닿아 보석처럼 반짝였고, 한껏 가깝게 다가온 수백 미터의 절벽들이 좌우로 담담하게 미끄러졌다. 숲과 절벽 사이로 작게 드러난 목초지의 상큼한 연둣빛과 벽 곳곳에 하얀 실처럼 하늘거리는 폭포의 아름다움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피오르를 순항한 크루즈는 마침내 내뢰피오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세워진 구드방엔에 닿았다. 선착장에 두 발을 내딛는 것으로 황홀했던 50여 분의 크루즈 투어를 마쳤다. 행복한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진한 아쉬움이 밀려들어 시선은 자꾸만 푸른 물결 너머를 더듬었다.
--- p.211, 「거인들의 협곡」중에서

8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일몰 시간이 더 빨라졌다. 저녁 9시가 넘어가자 서쪽 하늘이 벌겋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을 집어삼킬 듯 강렬한 일몰이었다. 오늘 태어난 태양의 마지막 빛이 브뤼겐의 수백 년 된 낡은 건물 여기저기에 다가와 찬란하게 부서졌다. 베르겐에 찾아온 화려한 이별의 세리머니를 한적해진 부둣가에 걸터앉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동안 이 도시는 수없이 많은 아침과 저녁을 맞이했다. 오늘이라는 시간은 이 도시에 찾아온 무수한 파편 중 한 조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한순간에 잠시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러웠다.
8월의 베르겐. 그 아름다운 여름밤 속에 내가 있었다.
--- p.258, 「플뢰이엔 전망대」중에서

이곳에 방문한 사람들은 한 번쯤 서 본다는 절벽의 끝. 아슬아슬한 경계에 다가서는 것이 무서워 주저하고 있을 때였다. 거대한 신이 입김을 내뿜기라도 한 것처럼 짙은 안개가 주위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바위도 피오르도 사람들의 실루엣도 안개 속에서 서서히 우윳빛으로 지워졌다. 눈을 감은 듯 닫힌 시야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서서히 다른 감각들이 깨어났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 빗소리와 발아래에 닿아 있는 땅의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위와 나와의 강한 유대감이 느껴지자, 신기하게도 두려움과 불안함이 잦아들었다. 절벽을 향해 한 발짝 내디딜 수 있는 작은 용기가 솟아났다. 마침내 절벽과 허공의 경계에 서자, 두려움과 해방감이 뒤섞인 쾌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 p.287, 「안개와 절벽」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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