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우리 제주에 가서 살까.?거기가 어딘데요??오륙도 건너에.?태식은 발끝을 세우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안 보이는데요.?배 타고 하루만 가면 돼.?그렇게 먼 데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아버지는 그의 조그만 정수리를 내려다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넌 아들이란 놈이 전우애가 없냐. --- p.13
눈이 왜 그렇게 나빠요, 라고 누가 물으면 말문이 막혔다. 어릴 때 우리 아버지가 안경테는 안 바꿔 주고 안경알만 바꿔 줘서요, 라고 말하기도 싫었고, 나는 남들보다 입학을 늦게 해서 수업 끝나고 청소하는 걸 몰랐거든요. 반장이 저 새끼 도망간다고 휘두른 빗자루에 눈두덩을 맞는 바람에요, 라고는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고 여전히 말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저 가난은 모든 사건을 심화시키거든요, 우울하고 모호하게 회피했다. --- p.29
전우도 없이 사는 삶과 전우만 있이 사는 삶, 아버지가 그토록 자주 이사를 다녀야만 했던 이유와 키우던 개를 두고 온 사정에 대해 처음으로 궁금했다. 아버지가 결정한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결과 이전의 선택, 선택 이전의 이유, 이유 이전의 형편에 대해서. --- p.47
예식이 끝나고 하객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 뒤로 태선과 남편의 얼굴이 힐끗 보였다. 태식은 의자에서 반쯤 몸을 일으켜 태선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 태식은 쇼핑백을 뒤져 자기 이름이 적힌 봉투를 도로 꺼냈다. 5만 원을 더 집어넣었다. 방명록의 마지막 장을 펼쳐 일십만 원을 지우고 일십오만 원이라고 고쳐 적었다. 막 예식을 마친 부부를 가운데 두고 아버지와 어머니, 구태식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이제 다섯에서 셋이나 떨어져 나갔다는 생각은 애당초 하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