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는 언제까지나 젊은 모습 그대로도 남아 있고,
그림이 나 대신 점점 나이를 먹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람들은 때때로 이렇게들 말하지. 아름다움은 한낱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라고. --- p.47
“얼마나 서글픈 일일까요!” 도리언 그레이가 여전히 자신의 초상화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이렇게 중얼거렸다. “얼마나 서글픈 일일까요! 나는 점점 늙고, 추하고, 끔찍해지겠지요. 하지만 이 그림은 언제까지나 젊음을 간직하고 있을 거예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유월의 오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거라고요……. 아, 그와 정반대로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는 언제까지나 젊은 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 그림이 나 대신 점점 나이를 먹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난 무슨 짓이든 다 할 거예요! 그래요, 그럴 수만 있다면 온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무엇이든 가져다 바치겠어요!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바칠 거예요!” --- p.54
도리언 그레이는 그의 친구들 혹은 그의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야릇한 억측들이 난무할 정도로 비밀리에 장기간 집을 비우는 때가 잦았다. 그렇게 떠난 후 다시 집에 돌아오면 곧바로 슬그머니 계단을 올라가 자물쇠를 채운 방문 앞에 서서, 한 번도 몸에서 내려놓은 적이 없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바질 홀워드가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 앞에 서서 캔버스 위의 늙고 사악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 곁에 윤이 나게 닦인 거울 속에서 자신을 보고 활짝 웃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얼굴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 현저한 대조가 그의 쾌감을 자극했다. 그는 점점 자신의 미모에 반했고, 점점 자신의 영혼이 타락하는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 때로는 소름 끼치도록 기괴한 환희를 느끼면서, 때로는 죄악의 흔적이 더 끔찍할지 노화의 흔적이 더 끔찍할지 궁금해하면서, 주름진 이마를 시들게 하고 늘어지고 음탕해진 입을 쭈글쭈글하게 만드는 흉측한 주름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그림 속의 붇고 거칠어진 손 옆에 자신의 하얀 손을 올려놓으며 미소를 짓기도 했다. 보기 흉한 몸과 노쇠해가는 팔다리를 보며 조롱도 했다. --- p.237
헨리, 도리언을 망가뜨려서는 안 돼. 그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말아줘.
“난 영원히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것들 모두를 질투해요. 당신이 그린 내 초상화에도 질투를 느껴요. 나는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걸 어떻게 이 초상화는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거지요? 순간순간 시간이 흐를 때마다 내게서는 무언가가 사라지고, 이 그림에는 무언가가 더해지겠지요. 오, 정반대가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림은 시들어가고, 나는 언제까지나 지금 모습 이대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왜 초상화를 그리셨나요? 언젠가 이 초상화가 나를 비웃을 거예요…… 끔찍하게 나를 비웃을 거란 말이에요!” 그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넘쳐흘렀다. 그는 손으로 눈물을 닦고 소파 위에 몸을 던져 마치 기도라도 하는 것처럼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자네가 이렇게 만들었지, 해리.” 화가가 비통하게 말했다.
헨리 경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것이 진정한 도리언 그레이의 모습이야…… 그뿐이라고.”
“그렇지 않아.” --- p.55
“……그녀는 나 때문에 그렇게 됐을 거예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권리가 그녀에게는 없어요. 그건 이기적인 행동이라고요.”
“이보게, 도리언.” 헨리 경이 담배 상자에서 담배 하나를 꺼낸 다음 금으로 도금된 성냥갑을 꺼내며 말했다. “여자가 한 남자를 개선시킬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남자로 하여금 세상일에 대해 눈곱만 한 흥미까지 완전히 잃게 만들어, 그를 아주 따분한 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네. 자네가 그 아가씨와 결혼했더라면 자네 역시 그처럼 비참해졌을 거야. 물론 자네는 그녀에게 무척 자상했겠지. 본래 사람은 자기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친절하게 대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자네가 그녀에게 전혀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그녀는 금세 알아차리게 될 거야. 그리고 남편이 무관심하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보통 여자들은 지독하게 촌스러워지거나, 아니면 다른 여자의 남편이 지불해주었을 게 틀림없는 아주 근사한 보닛을 쓰고 다니거나, 둘 중 하나가 된다네. 사교계에서 일으키고 다니는 실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어. 그런 일이 일어나면 정말 비참하지. 물론 나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테고. 하지만 분명히 말하겠는데, 결국은 그런저런 모든 일들이 자네를 철저히 실패자로 만들어버렸을 걸세.”
“아마 그랬을지도 모르죠.” 젊은이가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로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투덜대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도리 때문에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런 끔찍한 비극이 벌어져 올바르게 처신하려는 제 의도를 방해했으니, 이건 제 잘못이 아니라고요. 선하게 행동하겠다는 결심과 비극적인 운명에 대해 언젠가 당신이 한 말이 기억나요. 선하게 행동하겠다는 결심은 언제나 너무 늦게 이루어진다고 하셨지요. 제 경우가 꼭 그렇군요.”
“선한 결심은 과학적인 법칙을 간섭하는 쓸모없는 시도지. 그런 결심은 순전히 허영심에서 나오는 것이라네. 그런 결심은 철저히 ‘무無’, 그러니까 아무런 가치도 없어. 물론 우유부단한 사람들에게는 이따금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요란스럽기만 할뿐 내용은 하나 없는 감정들을 제공하긴 하지. 선의의 결심에 대해 이렇게 말하면 딱 적당하겠군. 선의의 결심이란 계좌도 없는 은행에서 빼내 쓰는 수표일 뿐이라고 말이야.” --- p.187
“앞으로 선해지겠다고 말해봤자 소용없네.” 헨리 경이 장미 향수가 가득 담긴 붉은색 구리 사발에 하얀 손가락들을 담그며 큰 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지금 아주 완벽해. 그러니 제발 변하지 말게.”
도리언 그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해리, 지금까지 전 무시무시한 짓을 많이도 저지르며 살았어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을 거예요. 어제부터 선행을 시작했는걸요.” …〈중략〉…
“어떤 선행을 행했는지 아직 말하지 않았네. 아닌가, 선행을 베풀었다고 벌써 여러 차례 말했던가?” 헨리 경이 작은 피라미드 모양의 진홍색 딸기들을 접시에 쏟아 붇고, 조개 모양의 구멍이 숭숭 뚫린 숟가락으로 그 위에 흰 설탕을 뿌리면서 물었다.
“당신한테라면 말할 수 있어요, 해리. 아무한테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어제 전 어떤 여인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고 그녀를 곱게 보내주었어요. 시시하게 들리시지만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실 거예요. …〈중략〉… 문득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처럼 꽃같이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그녀를 지켜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어요.”
“그러한 감정에서 비롯된 새로운 경험이 틀림없이 자네에게 진정 짜릿한 쾌락을 느끼게 해주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도리언.” 헨리 경이 말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내 자네를 대신해 자네의 전원시를 마무리해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자네는 그녀에게 훌륭한 조언을 해주었고, 그녀의 가슴은 찢어졌다네. 하지만 이것은 자네 개심의 시작에 불과하네.”
--- pp.383~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