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좋은 이유가 없다면 절대로 모험을 거절하지 말라는 말을 좌우명 삼아 살고 있다. (...) 세상에는 집과 학교, 사회에서 가르치는 규범 속에서 도무지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없고, 나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새로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에 멀리 여행한다. 자신의 집을 새로 발명한다. 물려받은 집을 태우고, 맨땅에서부터 집을 새로 짓는다. 이것은 글쓰기에 대한 은유이다. 글쓰기는 먼길을 떠나는 여행인 동시에 집을 짓는 일이기도 하다. 길 위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아름다운 것들을 볼 것이다. 숨을 거두기 전까지는 최선의 상태로 살아있고 싶다는 욕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지은 집은 당신이 이제서야 제대로 쉴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프롤로그」중에서
나의 글쓰기 버튼은 언제나 슬픔과 혼돈이었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써도 지치지 않았다. 글의 시작은 언제나 감정의 정체를 알고 싶어서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다 아는 것에 대해서는 쓰고자 하는 욕구가 수그러들기 때문에 차분하고 통찰력 넘치는 글을 쓸 기회를 매번 놓친다고 생각한다. 어쩔 수는 없다는 것, 그게 나라는 것도 받아들였다. 자기수용과 자기사랑이라는 선물을 글쓰기가 줬다.
---「당신의 글쓰기 버튼은 무엇인가요」중에서
이렇게 불안한 일을 왜 이토록 성실히 할까. 글쓰기 수업에 왜 오냐는 질문을 던졌다. 울지 않고 잘 쓰고 싶어서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답은 의외였다. “살려고 와요.” 표현은 다양했으나 뜻은 하나였다. 살기 위해. 매일이 어지러울 정도로 불안하고, 그 불안을 일주일마다 직면하고 소화하기 위해 글을 쓴다는 말이었다. 직장인이든 프리랜서든 아이가 있든 없든 마찬가지였다. 표현은 생존이다. 그리고 생존을 위한 그 표현이 재능이기도 하다. 너의 불안에 이름을 붙여주자, 불안에 언어를 만들어주자고 다짐하고 권유했다.
---「그냥 단숨에 굴러떨어지면 된다」중에서
잘하고 싶으면 생각 과잉이 되는 버릇이 있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시작도 전에 탈진 상태가 되었다. 뇌를 쉬기 위해서 잠깐 손을 놓았는데 1년이 훌쩍 지나 시들해져버린 프로젝트가 한둘이 아니었다. 과잉된 생각이 무엇인지 분석해보았다. 불안해지면 잡념이 생겨난다. 이 잡념의 베이스는 ‘걱정’이었다. 필라테스를 할 때 동작이 어렵고 쇠로 만든 기구가 무서워지면 여지없이 걱정이 찾아들고 그러면 오만 가지 잡생각이 끼어들었다(심지어 운동 마치고 장 볼 리스트를 짜기도 한다. 어묵, 고사리, 파프리카, 두부……). 무서워서, 불안해서, 잘 안될까 봐, 다칠까 봐, 계속 딴생각을 한다. 머리가 안 비워진다. 부정적 감정에 대한 회피 반응이다.
결국 너무 잘하고 싶어서 준비를 아주 철저히 하고자 한 일은 하나도 이루지 못했고, 우연히 시작한 일로만 인생을 꾸렸다. 얼결에 시작해서 결국 잘하게 된 일은 공통점이 있었다. 욱하는 마음에, 계획 없이, 무작정 시작했다는 것이다. (중략) 그 과정에서 세상의 거의 모든 일이 그러하다는 걸 알게 됐다. 단순하게, 무심하게 할수록 잘하게 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꼭 지켜나가는 루틴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
---「그냥 딱 10분만 달리고 와서 쓰자」중에서
나의 역사를 쓰는 것은 심리치료와 비슷했다. 매번 글을 쓸 때마다 장소는 바뀌었는데 인물은 같았다. 한번은 길에서 지폐를 주운 기억을(인생을 바꿀 순간이 당신에게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주제로 수업을 한 날이다) 썼다. 1억짜리 지폐를 주운 중학생의 나는 유럽으로 날아가 공부를 시작한다. 단 5분 동안 쓴 글이었는데도, 기어코 엄마에게 유럽행 비행기 티켓을 보내 집에서 탈출시키는 결말을 냈다. 지긋지긋했다. 친구들은 1억밖에 안 되는데 그냥 혼자 잘 먹고 잘살지 그러냐며 웃었다. 이때 심리상담을 시작했다. 상담사가 치료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내가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써야 했다. 가장 두려워하는 장소로 매번 돌아가야만 했다. 덮어도 덮어도 솟아오르는 상처는 조개들이 바위에 달라붙은 듯 특정한 장소에 붙어 있어서, 나는 시간여행자처럼 이곳과 저곳을 날아다녔다. 창에 비친, 싸우는 가족들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던 골목 앞, 어떤 일이 생겨도 내가 지켜주겠다며 남동생을 끌어안고 웅크렸던 작은 방. 문제집을 집어 던지며 오열하던 내 방 안. “지금은 여기 있잖아요”라는 소리가 들리면 상담실 안을 둘러봤다. 2020년, 어른이 된 나는 지금 이곳에 있구나. 내 힘으로 돈을 벌어 심리상담을 받는 어른. 상담일마다 작고 달콤한 케이크를 구워놓고 차를 우리며 나를 기다리는 남편이 있는 내 집. 나는 이제는 약한 아이가 아니다, 내 힘으로 새 가족을 만들었다, 현실로 돌아오는 주문처럼 되뇌었다.
과거의 장소에 돌아갔다 나올 때마다, 산을 넘는 것 같았다. 넘는 만큼 나는 강해졌다. (중략) 과거의 기억이 붙어 있는 장소로 되돌아가는 것. 애써 도망쳐 나온 장소로 다시 돌아가는 일. 그 일을 유예한다면 한 줄도 쓸 수 없는 일이, 나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장소도 나를 지배하도록 두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세상의 무엇으로부터도 숨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장소를 바라보는 일은 마음 안의 모든 용기를 그러모아 과거와 맞서는 일이었다. 자기 직면이었다. 시인 존 헤인스가 말했다. “예술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장소를 표현하기 위해 무모함과 위험, 항복,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작가 배리 로페즈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 데서도 일어나지 않는 이야기를 쓸 수는 없다. 어떤 장소에서 상처를 받아야 한다.”
상처를 받은 장소로 되돌아가 다시 한번 상처를 받기 위해 글을 쓰고 상담을 이어나갔다. 매번 고통스러웠다. 무언가
---「나의 역사를 씀으로써 나를 바로 세우기」중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깨닫는다. 나를 드러내도 공포스러운 일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우리의 상처와 고민에 조명을 비출 때, 좋은 청중은 자신의 것에 조명을 비춰 보여준다. 막연했던 두려움은 떨어져나간다. ‘말을 하게 되면 무시무시한 일이 생길지 몰라’라는 모호한 기분은 사라져버린다. 내 상처를 고백하는 행위는 다른 사람의 자기 고백을 돕는 강력한 힘이 된다.
---「글을 쓰다가 눈물이 흐르면 캐러멜을 먹자」중에서
우리는 언제 쓰는 존재가 될까. 타인의 견해라는 외부 자극과 그로 인한 내부의 감응. 그 과정을 통해 각자는 글 쓰는 존재로 나아간다. 남과 다를까 봐 주저하는 마음을 기어코 극복하고 나의 오롯한 의견을 말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의견이 힘의 차이에 따른 위계에 의해 무음 처리되지 않는 경험을 했을 때 비로소 노트를 꺼낸다. 누군가 “제 의견은 좀 달라요”라는 반박 멘트로 나의 의견을 ‘있는 것’으로 대해주었을 때, 종종 나는 산다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었나라는 생각을 하며 희열을 느낀다. 이럴 때, 쓰고 싶어진다. 쓰게 된다.
---「나는 문학을 배운 일이 없다」중에서
상처에 숨은 감정을 바라보고 그것의 정체를 밝히고 이름을 붙이면서, 인생은 점점 더 넓어진다. 상처를 지닌 인간은 외딴방의 바깥으로 걸어 나와 상처를 햇볕에 널어 말린다. 누군가는 상처에 선과 색을 입혀 전시장에 걸고, 누군가는 노랫말과 멜로디를 입혀 음악으로 만든다. 누군가는 글로 쓰고 종이에 새겨 책을 만든다. 그뿐이다. 상처에 대해 쓰는 것. 그것은 잠시 동안 당신을 우울의 바다에 밀어 넣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수영을 배우게 될 것이다.
---「왜 상처를 쓴 후 더 우울해질까」중에서
우리의 장점에 연연해하는 것만이 우리를 책상 앞으로 데려다주는 마법이다. 지금 당신의 단점을 보라. 그리고 단점에게 말을 걸어라. “몸 좀 뒤집어줄래? 네 등에 내 장점이 있거든.” 누군가 말수가 적다면 상대가 이야기를 좀 더 할 수 있도록 들어주는 여유가 있을 것이다. 잘 웃지 않는 사람이라면, 당신이 가끔 웃었을 때 누구나 믿을 것이다.
---「전체를 쓸 수 없다면 부분으로 장면 묘사하기」중에서
우리의 글쓰기가 이러했으면 한다. 희곡 작법을 배운 일 없이, 어린아이들이 대사를 지어 만들어내는 연극놀이였으면 한다. 힙합에 심취해 버스를 기다리는 찰나도 참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랩을 하는 중학생처럼 글을 쓰고 싶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허벅지에 드럼 스틱을 두드리던, 직장인 밴드가 뭐라고 그것에 미쳤던 내 친구 같았으면 한다. 그렇게 도리 없이 터져 나오는 글만 쓰고 싶다.
그러면 어떤 일이 생길까. 쓰는 시간이 때로는 명상 때로는 페스티벌 같아진다. 극도의 고요 혹은 극도의 흥분. 쓰는 동안 현실의 삶은 약간 모호한 색을 띤다. 배도 고프지 않고 메시지에 반응하기도 귀찮고 잃어버린 사랑도 이제는 괜찮고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나아가 내가 누구라도 상관이 없는 그런 상태. 글 속에 등장한 ‘나’와 사랑에 빠지는 그런 황홀경. 온전히 그 세계 안에서 유영하고 싶다. 그렇게 황홀한 상태를 맛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일 일기를 쓰게 된다. 글을 쓰는 몸이 된다. 자다가 일어나 쓰게 된다. 글을 쓴다. 공고한 비밀 우주를 하나 만든다. ‘바깥세상’은 이 우주의 벽 안으로 절대 들어오지 못한다. 누구도 나를 내 허락 없이 해칠 수 없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만의 우주를 만드는 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