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저녁을 먹으러 온 미카가 지금까지 쌓인 것을 토해내듯 느닷없이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나한테는 시간이 별로 없구나.”
“갑자기 왜?”
뻐꾸기가 여덟 번 울었다. 나무꾼 콤비가 교대로 톱질을 했다.
“벌써 서른다섯 살이잖아.”
미카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는 남녀 인형이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미카의 턱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한순간 다른 사람으로 의심될 만큼 공허한 곡선을 그렸다. 영업을 마감하기까지 앞으로 한 시간. 시어머니는 이미 침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고, 가게에는 주방에서 일하는 사치코와 카운터석에 앉은 미카까지 두 사람뿐이었다.
--- p.11
“남자에게 평가를 받지 못하면 여자는 무가치하다, 딱히 좋아하지 않는 남자더라도 어쨌든 연애하는 것이 솔로인 것보다는 낫다. 이렇듯 사회에 횡행하는 낡은 규범에 ‘NO’라고 말하는 그룹, 원기왕성하고 자존감과 매력이 넘치는 그룹으로 만들고 싶어. 멤버끼리 경쟁하는 모습을 보며 즐기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이 그룹은 사이좋고 즐겁게 활동하게 하고 싶어. 슬금슬금 팬의 심기를 살피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생각이야.”
미카는 진지한 투로 말을 이었다.
“이쪽 업계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여자가 바리바리 챙겨서 서비스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풍조가 있잖아. 그러지 말고 팬과 아이돌이 연대감을 가지고 함께 신나게 놀면 좋겠어. 보는 쪽, 보여주는 쪽, 즐기는 쪽, 즐거움을 주는 쪽, 그런 담장을 허물고 싶어. 아이돌과 팬이 일심동체가 되는 거지. 누가 헌신하거나 헌신을 받지 않아도, 여자와 남자 모두 행복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
--- p.46~47
“서두를 것 없잖아. 미카는 미카의 속도에 맞추면 되지.”
어쩐지 목소리가 건조해졌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미카는 이렇지 않았다. 세상이 무조건적으로 강요하는 규범을 무엇보다 싫어했다. 시야가 넓고 공부도 열심이라 만나자마자 최신 뉴스에 대해 견해를 말하기도 했다. 피해자가 불합리하게 비난을 당하면 화를 내며 펄펄 뛰었다. 미카는 언제나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감정이입했다. 돌이켜보면 미카는 처음 만났을 당시부터 아이돌 외에는 안중에 없는 듯하면서도 늘 무슨 형태로든 세상을 좋게 만들려고 했다. 미카와 같이 있으면 세상이 넓고 선명한 색채를 띤 것처럼 느껴졌다. 미래를 믿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면 늘 당당하던 그 전사는 두 번 다시 못 만날지도 모르겠다. 그런 예감이 차가운 방을 천천히 감쌌다.
--- p.65
‘임신, 고백, 독신, 동성 친구’라는 검색어로 수없이 인터넷을 검색했다. 온갖 임신?육아 관련 커뮤니티에 드나들면서, 독신인 동성 친구에게 임신한 사실을 알릴 때는 기분, 시간, 단어 등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지금까지 어떤 매뉴얼에 따라 미카를 대한 적이 없었고 그랬다가는 도리어 어색할 것 같았지만, 지금은 낯선 사람의 경험에 매달려서라도 실점을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임신을 계기로 독신 친구와 거리가 생겼다는 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출산 후에는 친구와 거리가 생겨도 신경을 못 쓸 만큼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며, 어느덧 친구를 대신할 새로운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도 생긴다는 이야기였다.
반대로 친구가 임신한 순간 인격이 바뀐 것 같아 어색함이나 소외감을 느낀다는 출산 미경험자들의 글도 눈에 띄었다. 모두가 결혼과 임신을 계기로 우정에 벽이 생기는 걸 아주 당연하고 피할 수 없는 사태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마치 배에 시한폭탄이나 다이너마이트라도 두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느끼는 건 좋은 엄마가 될 수 없다는 증거일까. 배를 가만히 쓰다듬어도 육아 에세이에서 읽은 것처럼 뜨겁고 확고한 의지가 샘솟지는 않았다. 하여튼 아무 실수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면 된다는 소극적인 목표를 되새길 뿐이었다.
--- p.123~124
“우리는 하나도 변한 게 없는데 시간, 주변의 시선, 환경, 몸의 변화 때문에 서로 멀어지는 것 아닐까? 그걸 극복하려면, 그걸 극복하려면…….” 필요한 건 서점 여기저기서 눈에 띄던 여성 에세이 제목 속의 ‘균형 감각’도, ‘마음을 사로잡는 배려’도, ‘유연한 센스’도 아닌 것 같았다. 사치코는 자기처럼 별 취미가 없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마지막까지 망설였다.
“…… 덕후의 힘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까 사인회에서 중년 남자들이 겸연쩍어하면서도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젊은 여자들 사이에 끼어 있던 게 갑자기 떠올랐다. 주위에서 어떻게 생각하든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하는 굳은 마음. 혼자 집에 틀어박혀 몰래 응원하는 걸 넘어, 공연 현장으로 달려가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며 마음을 전한다. 보답이 없더라도 자기만 만족스러우면 개의치 않는다. 지금 사치코는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 p.191~192
“사치코, 자?”
잠시 후 미카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하고 사치코는 작게 대답했다.
“쟤들이 나보다 훨씬 어른이었어.”
잠에 빠져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하루카 같았다.
“…… 난 말이야, 남들처럼 하면 헤매지 않을 줄 알았어. 하지만 이제 됐어. 난 앞으로도 계속 헤맬 거야. 결심했어. 남들처럼 해봤자 난 분명 안 변할 테니까. 그게, 아까 같은 무대는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현상이거든.”
시선을 모으자 어둠 속에서 그 분홍색 불빛이 아른거렸다. 사치코는 갑자기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방금 전 무대를 언제든지 머릿속에 되살릴 수 있다. 좌절과 공포를 맛볼 때마다 그 노래를 흥얼거리면 된다.
--- p.304~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