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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1 만남: 우리가 사랑한 감독들 사실은, 그런 여자들이 있어 / 〈82년생 김지영〉 김도영 감독 소녀들의 시간은 풍부하다 / 〈우리집〉 윤가은 감독 어쩌면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 〈벌새〉 김보라 감독 이토록 웃기고 이토록 인간적인 / 〈정직한 후보〉 장유정 감독 ‘올드 레이디’의 이야기 / 〈69세〉 임선애 감독 여름 햇살 아래 소년은 푸르다 / 〈보희와 녹양〉 안주영 감독 유령이 인간을 구할 때 / 〈밤의 문이 열린다〉 유은정 감독 내가 당신을 본다 / 〈내가 죽던 날〉 박지완 감독 읽어내기를 유혹하는 영화 / 〈찬실이는 복도 많지〉 김초희 감독 욕망하라, 다르게 / 〈아워 바디〉 한가람 감독 말 못 할 사정, 하나쯤 / 〈영주〉 차성덕 감독 잃어버린 것들이 머무는 곳 /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감독 낯설고 친밀한 ‘여자-사람’들의 세계 / 〈보건교사 안은영〉 이경미 감독 2 역사: 한국영화의 전환을 이끌었던 여성들 1990~2000년대 여성영화 프리퀄 참고문헌 사진 저작권 및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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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은 그 질문에 매달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그저 “있어 보이는 무언가”에 대해 만들려고 했다는 것을. 그래서 대학생 때부
터 쭉 써왔던 노트 열 권을 찬찬히 뒤졌다. 그 안에서 발견한 것이 〈콩나물〉의 아이디어였다. 한 소녀가 심부름을 갔다가 실패한다. 하지만 그 과정만은 참 재미있었다는 이야 기.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다. 그래서 생각했다. “실패해도 괜찮다. 대단한 걸 만들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자.” --- p.36 안기는 장면도, 눈을 뜨는 장면도 아닌, 그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의 순간에 이토록 사로잡힌 것은, 그것이 벅차오르는 사랑과 아득한 상실 사이에 존재하는 좀처럼 포착하기 어려운 순간이기 때문이다. (...) 영화의 끝, 은희는 그 틈새를 충분히 살아냈기 때문에 “삶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는 영지의 말과 다시 만나게 된다. --- p.49~50 비단 주인공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조연들의 이야기 역시 이런 작은 성냥개비들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이 작은 성냥개비 하나하나에 캐릭터를 살려내는 세심한 설정들이 숨어 있다. 그는 “주연이냐 조연이냐에 따라 작품 속에서 가지는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어떤 인물도 도구로만 소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덧붙였다. 그의 영화에서 주연뿐 아니라 조연 역시 빛나는 이유다. 이 태도가 실패 없이 인간적인 코미디를 만들어낸다. --- p.69 보희는 보고 따라할 아버지를 만났기 때문에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타인의 사정 앞에서 잠깐 멈춰 서서 질문하고 스스로의 답을 찾아 공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른이 되어간다. ‘내’가 아니라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형편과 이야기들이 얽혀 있는 바로 그 세계를. --- p.95 유은정은 “2016년 이후, 페미니즘 흐름 속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섣부르게 희망을 말할 수는 없지만, 변화를 꿈꾸고 연대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 또래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고 덧붙였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 p.106~109 ‘밀레니얼 감독’이라고 불리는 윤단비의 영화는 밀레니얼 시대의 영상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남매의 여름밤〉의 카메라는 단 한 번도 서두르지 않는다. 자신의 무게에 책임을 지고 한자리에 앉아, 묵묵하게 인물과 사물에 시선을 뻗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그저 도구로 다뤄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래서였다. 영화가 자아내는 노스탤지어가 다른 무엇보다 사라져가고 있는 ‘영화적인 것’에 대한 향수로 다가왔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길이 든 전축과 낡은 재봉틀처럼, 이제는 더 이상 아무도 찾지 않는 아날로그 기계들에서 필름 영화의 질감을 느꼈다. --- p.175~176 섹슈얼리티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여성 신체를 안전지대에 놓으려 하기보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 아름다움을 여성의 힘으로 전유하는 시도가 〈러브세트〉에 서 펼쳐진다. 그렇게 등장하는 배두나의 신체는 압도적이고, 그가 틀어쥐고 있는 시선의 힘은 강인하다. 이지은의 얼굴에는 그가 배우로서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은밀한 욕망이 떠오른다. 이경미는 덧붙였다. “그렇게 아름다운데, 왜 가려야 하죠?” --- p.194 1997년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라는 모토를 내걸고 그 시작을 알렸던 서울여성영화제는 본격적으로 ‘여성영화’를 소개하고 여성들이 모여 이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친밀한 문화의 장을 열었다. 서울여성영화제는 제1회부터 제5회까지 서울 대학로의 동숭아트센터에서 개최되었는데, 영화제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 시기를 여성영화제 ‘대학로 시절’이라 불렀다. 대학로 시절, 영화 한 편의 상영이 끝나고 흥분한 여성들이 동숭아트센터 앞 작은 광장에 삼삼오오 모여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다음 영화를 기다리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영화제가 문화의 장이자 여성들의 광장 역할을 하던 시절, 그 자양분을 먹고 한국의 영화문화는 성장했다. --- p.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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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1
“나는 나에 대해서 오래 연구했다. 그 과정을 통해 깨달았다. 스스로를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이야말로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걸. 나는 내 고통에 공감하고 그에 마음을 기울였지만, 그것만이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_김보라([벌새] 감독) 감독들의 세계를 향한 힘 센 사랑, 깊은 대화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여성영화 프리퀄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에 다뤄지는 영화들은 그간 카메라 밖으로 밀려났던 여성들의 삶에 렌즈를 들이댄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일곱 살 보리([콩나물])에서 여중생 은희([벌새]), 이십 대의 자영([아워 바디]), 삼십 대의 지영([82년생 김지영]), 마흔 줄의 찬실이([찬실이는 복도 많지]), 69세 효정([69세])까지 인물들이 겪는 성장통, 우울, 육아, 정체성 찾기, 폭력 등은 동시대 여성들의 경험과 겹치며,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님”을 확인하게 한다. 한 가지 더 눈여겨볼 것은 인터뷰에서 다뤄지는 영화의 범위다. 손희정은 감독별로 대표작 한 편에 천착하기보다 필모그래피 전체를 살피면서 변주되는 서사와 이미지, 캐릭터, 대사, 메시지에 대해 질문하는데 이는 감독들이 걸어온 영화적 시간을 재구성하며 영화의 의미를 한층 세심하게 드러낸다. 예를 들어 이경미 감독의 [보건교사 안은영]의 ‘은영’(정유미 분)은 [미쓰 홍당무] 미숙(공효진 분)의 영웅 버전이자, [비밀은 없다]의 연홍(손예진 분)이 못했던 일을 해내는 인물이기도 하고, ‘서로를 구제하는 여자들’은 이경미의 영화에서 반복되는 모티프이다. 캐릭터와 모티프 외에 영화 형식의 측면에서 컷과 컷 사이의 편집 방식, 카메라의 눈높이(eye level), 타 장르의 차용 등을 다루는 대목도 흥미롭다. 클로즈업은 클로즈업이고, 미디엄쇼트는 미디엄쇼트일 뿐이다. 중요한 건 찍는 방식이 아니라 여성의 몸이 놓인 맥락이다. 물론 불필요한 노출은 피했다. 그리고 몸을 아주 디테일하게 찍으려 했다. 자영이가 옷을 벗고 달라진 자신의 몸을 거울에 비춰보는 모습을 찍을 때도, 어디에 있는 어떤 근육을 찍을지 사전에 정확하게 조율했다. 여성의 몸을 대충 훑는 것과는 다르게 보였을 것이다.” _151쪽 한편, 2부 ‘역사’에서는 1부 감독들의 작업을 가능하게 했던 토대로서,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 상업영화의 전환을 이끌었던 여자들의 역사를 다루었다. ‘작가’로서 감독이 중심이 되는 영화 비평이나 영화사 서술은 자연히 남성의 계보가 되기 마련인데 손희정은 이런 서술에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당시 여성 제작자, 영화인,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의 활동을 기록함으로써 이들을 한국영화의 새로운 성장을 이끈 뿌리로서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억해, 우리가 함께한 장면들을……” 서로가 서로의 영화가 되어 ‘다시, 쓰는, 서사’ 인터뷰는 인터뷰어가 가진 정체성을 통과한 문답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주관적인 장르이며 결과적으로 상대에 대한 평가가 빠질 수 없는 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다혜([씨네21] 기자, 작가)의 말처럼 손희정은 여성감독들의 작업을 함부로 평가하기보다,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함께 말하기’의 방법을 택한다. 그들의 전작을 살피고, 제작환경을 묻고, 관객들의 반응을 전하는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은 꽤 다른 영화지만, 놀라울 정도로 닮은 부분이 있다. 그건 바로 스크린 위로 스며 나오는 지연과 지영의 정서다. 일상을 정신없이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에 ‘퍽’ 하고 퓨즈가 나간 듯, 갑자기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순간. 그러나 그건 그저 하나의 표정, 하나의 장면이 아니다. 그 안에는 어떤 식으로도 충분히 언어화할 수 없는 공허함과 불안의 정서가 녹아 있다._22쪽에서 이러한 곡진한 과정을 거쳤음에도 “주인공이 탈코를 했다” “성적 대상화가 없다” “실화 베이스다” 같은 몇 개의 명쾌한 기준으로 여성영화를 정의하지 않는 것은 그가 여성영화를 보는 다양한 관점을 가능한 한 넓게 열어두고자 함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관습적 이야기를 뒤트는 도전을 살피고, 자신의 소수자성을 바탕으로 타자의 사정을 살피는 이야기들에 주목하는 언어는 납작할 수 없으므로. 여성영화 르네상스가 도래한 지금, 이야기는 언어를 만들고 진부하지 않은 이야기는 다른 세계를 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