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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제로의 책 / 여는 글
06 제로를 위한 디자인 잡담 / 어라우드랩 26 메타버그 세계관 / 최승준 48 재야생화: 인류세의 미래를 위한 대담한 상상 / 최명애 66 부모 예술가를 배제하지 않는 방법 / 부록1 70 모든 몸을 위한 발레 / 윤상은 81 창살과 영혼 / 손희정 101 셀카의 기술 / 고아침 110 구축 없는 건축의 구축 / 강현석 132 집과 숲 / 김영주 인터뷰 156 필패하는 말과 토대 없는 믿음 / 안팎 170 어떤 것도 버리지 않기 위한 조각들 / 부록2 176 이것은 상상력의 싸움이다 / 채효정 206 데이터셋 그리고 팅커링 / 송수연 223 퀴어 자손 / 헤더 데이비스 235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 김영옥 258 함께한 사람들 255 만든 사람들 257 도판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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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제로가 뭘까?
---「첫 문장」중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삶 그 자체는 재난 이후에도 계속된다. 체르노빌이나 허리케인 카트리나, 그리고 지금의 코로나19 사례에서 보듯, 폐허 속에서도 야생 동물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삶은 이어지고, 꿈과 희망들은 펼쳐진다. 인류세는 종식과 절멸의 서사만이 아니며, 폐허 속에서 생성되는 ‘재기’와 ‘풍성함’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 p.65 세계 인구의 36~45퍼센트 정도는 아직 인터넷에 접근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죠. 인터넷을 쓰지 못하는 곳에 대형 드론을 띄워 인터넷 접근 문턱을 낮추자는 페이스북의 아퀼라 프로젝트는 2016년에 시작해 2018년에 종료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지에 풍선을 띄워 무선 인터넷을 공급하는 구글의 룬 프로젝트는 2011년에 시작해 2021년 1월에 종료했습니다. 이러한 프로젝트에는 인터넷이라는 중요한 매체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지원하자는 ‘유통 기한’이 있는 선한 의도와 동시에 아직 인터넷에 접근하지 못하는 인류의 절반이 있는 시장을 개척하고 사업의 규모를 키우려는 영리적 의도가 공존한다고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 p.28 ‘탈석탄’에서는 석탄만 아니라 석탄노동자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탈석탄 지역의 노동자와 주민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숫자’는 알려주지 않는다. 숫자는 많은 것을 속일 수 있다. --- p.184 사실 중요한 건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맥두걸의 ‘21그램설’이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어떤 방법으로도 인간 영혼의 존재 여부는 판명될 수 없을 테니까. 그보다 ‘나만이 고결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인간의 나르시시즘이 세계를 어떻게 폐허로 만들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일이 더 중요할 것이다. 그것이 ‘영혼’이라는 찬란한 말의 효용이다. --- p.95 이 미완성 건축은 45층의 콘크리트 뼈대와 바닥, 그리고 부분적으로 시공되다 멈춘 유리 외피의 모습으로 장기간 방치됐다. 2007년부터 이 ‘죽은 거인’의 몸체에 사람들의 생기가 닿기 시작했다. 카라카스 변두리의 무허가 빈민촌에서 쫓겨난 이들이 하나둘씩 그 텅 빈 공간을 점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 2014년에는 약 3천여 명의 주민들이 다비드 타워를 무단 점유하여 거주지로 삼았다. --- p.128 비장애인의 세계에서 장애인의 몸이 충분히 준비하고 완벽히 연습된 상태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들은 언제나 시기상조인 상태로 무대에 오른다. 드랙 퍼포머들은 흔히 스스로를 성별화된 단어 ― 퀸이나 킹 ― 로 칭하면서도, 그리고 그 성별의 기호들로 자신을 치장하면서도, ‘충분히’ 그 성별이 되기를 시도하는 대신 말도 안 되는 괴상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런 무대들은 필패하는 몸짓이 여는 공간이다. --- p.162 기후위기를 시각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벌겋게 달아오른 지구, 녹아 흘러내리는 지구 이미지는 진부해졌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 자체가 지구 위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인간을 상정한다. 근대인의 관점, 지구에 불을 지른 그 인간의 관점 말이다. 나오미 클라인은 『이것은 모든 것을 바꾼다』에서 푸른 별 지구라는 표상이 지구인의 위치를 지구 밖으로 이동시켜왔다고 지적한다. 불타는 지구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선을 외부자의 관점으로 이동시킨다. 그 시점은 우리 집이 불타고 있는데도 자신을 밖에서 불구경하는 구경꾼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 p.193 심리학은 ‘네 안의 울고 있는 아이’를 만나라고 권한다. 유년기가 누구에게나 언제나 더할 나위 없이 따스하고 순연한 햇살로 빛나는 건 아니기에, 어둡고 축축한 그늘에서 여전히 울면서, 일으켜 세워줄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를 만나는 일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계보학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에 필수일 것이다. 그런데 내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유년기의 아이뿐이 아니다. 노년기의 할머니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 할머니가 내게 손을 내밀고 있다. 내게 들려줄 말이 있다. --- p.2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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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2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공예술사업 선정 프로젝트 《제로의 예술》(강민형 김화용 전유진 공동기획)을 바탕으로 한다. 《제로의 예술》은 우리 시대가 직면한 문제들을 종으로 횡으로 연결하며 예술의 견고한 프레임을 돌아보고, 창작가/시민/활동가 등 현장의 목소리를 불러모아 공공의 장을 만드는 기획이었다. 젠더 문제에서 인공지능 윤리까지, 미술 재료에서 기후위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총 46회의 워크숍과 14회의 강연을 열고, 웹진과 페스티벌 등 온오프라인을 무대로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11개월간의 프로젝트는 일단락을 맺었다. 그러나 남겨진 고민들은 아직 가야 할 길이 있다. 더 긴 호흡의 대화, 더 많은 상상과 실천을 마련하기 위해, 각기 다른 문제의식을 지닌 언어들을 새로이 모아 『제로의 책』이라는 이름으로 엮었다.
이 책을 디자인한 어라우드랩은 생산과 소비의 매개자인 디자이너의 역할을 고민하며, ‘제로’라는 단어를 나침반으로 세워 지속 가능한 디자인의 방향을 가늠해 본다. 최승준은 기술 교육에 내재한 다양한 쟁점들을 호출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과학 기술은 늘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새로운 문제가 창출되고, 논란를 야기하는 동시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공간이다. 최명애는 전대미문의 생태 위기 앞에 선 인류가 인간 중심적 시야를 버리고 자연의 자생력을 믿어볼 것을 권유하며, 국내외에서 전개된 ‘재야생화’로 자연이 복원된 사례들을 짚어본다. 윤상은은 오랜 시간 자신을 붙들어온 전통 발레 교육의 틀을 넘어 다양한 연령과 신체를 대상으로 발레를 가르치고, 그 경험을 통해 몸을 다시 사유한다. 손희정은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꼭지점 삼아, 인류가 비인간 동물을 비롯해 타자를 대상화하고 볼거리로 삼아온 ‘창살’의 역사를 누빈다. 고아침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셀카의 기술〉 워크숍을 돌아보며, 셀카라는 친숙한 행위로부터 우리가 기술과 관계 맺는 방식을 살펴본다. 강현석은 실현을 전제로 하지 않는, 그래서 물리적 한계와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건축적 접근의 사례들로부터 세계의 빈틈을 응시하는 정치적 힘을 탐색한다. 동아시아 및 국내 여러 지역에서 자본과 문명에 기대지 않는 공동체살이를 경험한 김영주는 그동안 배운 기술을 이용해 두 손으로 직접 집을 짓고 삶과 생활을 바꿔나간 이야기를 들려준다. 안팎은 삶의 터를 서울에서 지방 소도시로 옮긴 뒤 두 공간을 오가면서, 사회가 정상적인 것으로 규정해온 언어 바깥의 삶과 예술적 시도들에 관해 사유한다. 채효정은 기후위기 시대를 돌파하는 해법을 상상력의 전환에서 찾는다. 기존의 자본과 공모하는 기술적 상상력이 아니라 삶의 조건을 재생산하는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제언이다. 송수연은 인공지능의 놀라운 발달이 가져온 윤리적 딜레마를 통해, 편견을 축적할 수도 있지만 이를 해체할 수도 있는 ‘데이터’의 양면적 가능성에 관해 논한다. 헤더 데이비스는 플라스틱이라는 인류세의 물질이 ‘퀴어’한 방식으로 해양 생명체들과 어우러져 일가를 이루는 현상을 소개하며, 이들을 인류의 새로운 후손으로 명명한다. 마지막으로 김영옥은 이 모든 총체적 난국 속에서도 누구에게나 진행되는 ‘나이 듦’에 관해 썼다. 그는 담담하게 권유한다.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면 우리 내면에 있는 미래의 할머니에게 귀 기울여보라고. 이 이야기들은 서로 교차하기도 하고 때로는 합쳐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내부에 또 다른 길을 낸다. ‘제로’에서 출발한 길이 이제 독자들과 마주하고 있다. 함께 걸으며 저마다 다른 아이디어를, 상상을, 용기를 얻고, 계속해서 다음 행로를 만들어나가길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