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작가의 말 4
나는 조선의 왕자다 8 일본인이 아닌 박찬주와 결혼하다 14 운현궁으로 돌아온 이우 20 원자폭탄과 해방 34 좀 더 알아봐요 48 |
김바다의 다른 상품
허구의 다른 상품
|
이우는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고, 독립할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어요.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강한 왕자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일본인을 앞지르고 싶어서 글도, 운동도, 노래도 잘 하려고 열심히 배우고 익혔어요.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면 우리말로 소리치고 싸웠어요. 술자리에서는 일본 총독부의 금지곡 ‘황성 옛터’를 부르기도 했어요. 일본인들은 이우 왕자에게 ‘호랑이 같은 조선 황족의 핵심’이라는 별명으로 불렀어요. 그러나 이우는 조선 사람들에게는 항상 부드럽고 따뜻하게 대했어요. ---pp.14~15 이우는 일본 궁내성의 혼혈결혼 정책의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고 치밀한 작전을 짰어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금릉위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와 결혼을 서둘렀어요. 이우는 의친왕 이강과 박영효의 허락을 얻어 약혼반지와 사주단자를 박찬주에게 보냈어요. 이왕직 장관 한창수를 불러서는 “혼약은 이미 성립되었다”고 통보해 버렸어요. ---p.18 “사실 난 일본 군복을 입고 일본 군인으로 사는 게 정말 부끄럽고 싫소. 대한제국이 하루 빨리 일본으로부터 독립해야지 못 견디겠소.” “저하, 누가 들으면 어쩌시려고 그런 큰일 날 말씀을 하세요.” “들을 테면 들으라지요.” 이우는 큰 소리로 답답한 마음을 표현했어요. ---p.27 |
|
책을 쓴 작가는 2006년에 일본 야스쿠니신사를 반대하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의 평화통신사 일원으로 일본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하였을 때 이우 왕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우 왕자는 일본을 싫어했고, 민족의식이 강했으며, 해방되기 아흐레를 앞둔 8월 6일에 근무지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에 피폭되어 다음날 8월 7일 그토록 싫어하던 일본 땅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우 왕자를 비롯해 태평양전쟁에서 희생된 한국인 21,000여 명이 일제 전범들과 같이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누구에게 묻지도 않고 합사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작가는 이런 이우 왕자의 삶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강제로 합사된 우리 한국인들이 하루빨리 합사가 취하되어 한국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우 왕자》 책에는 우리가 잘 몰랐던 이우 왕자의 슬픈 이야기와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와 야스쿠니신사에 강제로 합사된 한국인 영령들이 합사에서 벗어나 하늘로 날아올라 진정한 해방을 맞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1945년에 광복이 되었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고 또 아직 해결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입니다. ‘한국인원폭피해자위령비’가 세워진 이야기와 일본 야스쿠니신사에서 벗어나 진정한 해방을 맞기를 바라며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1945년 7월 히로시마에 부임한 이우 왕자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다음날 7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우 왕자의 시신은 해방 전날인 8월 14일에 조선(서울)으로 옮겨져 해방되는 15일에 동대문운동장에서 장례식을 거행하였습니다. 하지만 해방이 되고나서 이우 왕자를 비롯한 일제에 강제로 동원되어 전쟁에서 전사한 한국인 21,000여 명이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고 맙니다. 일본은 희생자의 유족이나 어느 누구의 동의도 없이 일제 전법들과 함께 합사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일제 전범들과 같이 일본의 신으로 받들어지고 있습니다. 일본 야스쿠니신사의 합사는 하루빨리 취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분들이 일본에서 벗어나 진정한 해방을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일본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있는 원자폭탄에 희생된 한국인 피해자를 추모하는 ‘한국인원폭피해자위령비’는 1970년에 이우 왕자가 원자폭탄에 피폭된 장소에 처음 세워졌습니다. 그 뒤 여러 차례 히로시마 평화공원으로 옮기려고 하였지만 일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1999년 재일한국인과 시민단체들의 운동으로 히로시마 평화공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위령비 앞면과 뒷면에는 이우 왕자와 관련한 문구가 있습니다. 뒷면에는 ‘나라 잃은 왕손이기에 남모를 설움과 고난이 한층 더 했던 이우 공 전하를 비롯하여 … 이우 공 전하 외 무고한 동포 2만여 위…’라는 비문이 있습니다. 앞면에는 ‘이우 공 전하 외 2만여 영위’라는 문구가 ‘한국인원폭피해자위령비’ 이름과 함께 적혀 있습니다. 이처럼 이우 왕자는 일제강점기 때 태어나 일본의 억압과 감시 속에 살다 원하지 않은 죽음으로 삶을 마쳤습니다. 지금도 자신이 뜻이 아닌 그토록 싫어한 일본의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치욕을 느끼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루빨리 합사된 일제에 강제로 끌려와 희생된 분들과 함께 합사가 취하되어 야스쿠니신사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이우 왕자는 여덟 살 초등학교 입학할 시기에 전 국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현장을 운현궁에서 숨죽이며 보았을 것입니다. 이우 왕자는 열한 살이란 어린 나이에 강제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식 교육을 받으며 일본에 순응하도록 감시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일본 학교에서 저항을 많이 하는 학생이라 일본인 선생들의 골칫거리였다고 합니다. 일제에 강제 합병된 대한제국의 황실 왕자로서 겪는 분노가 얼마나 컸을지, 어쩌지 못하고 일제의 장교가 된 자신이 얼마나 싫었을지 짐작이 갑니다. 일본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던 이우왕자였으니까요." - 작가의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