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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炳注, 호: 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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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는 사실, 그로부터 나의 악(惡)은 비롯되었다. 대역(大逆)을 범할 마음의 경사(傾斜)가 있어도 동기가 없으면 선인(善人)으로 남을 수가 있다. 어느 때 사람은 자기 마음속에서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을 죽이는 경우가 있다. 입 밖으로 내서 그 범의(犯意)를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당장 목을 쳐 죽일 놈.” “칼로 배때기를 찔러 죽여야겠다.” 그래도 계기와 동기가 없으니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게 악의 경사가 생긴 것은 까마득한 옛날부터다. 그래도 무기력한 사람이라는 평은 받아도 악인이란 소리는 듣지 않았는데 바로 그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나는 보고 말았다.
그날, 점심시간을 조금 지났을 무렵이다. 청진동 골목에서 내가 단골로 하고 있는 구멍가게의 안주인을 만났다. 만난 것이 아니라 내 쪽에서만 그 여자가 여관이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으로 바쁜 걸음으로 황급히 들어가는 모습을 본 것이다. --- p.14 경산 선생의 회고담이 계속되었다. 우리들은 비로소 역사라는 것을 느꼈다. 방안의 공기가 탁해지자 경산 선생은 방문을 열라고 했다. 어느덧 조그마한 뜰에 달빛이 깔려 있었다. 그 달빛을 받고 뜰 가득히 갖다놓은 화분의 꽃들은 요란한 향연을 이루고 있었다. “보아라, 저 꽃들을 보아라. 옹덕동 골짜기의 구멍가게의 비좁은 뜰이 사람들의 호의로 인해서 황홀한 꽃밭이 되었다. 낙엽(落葉)이 모여 썩기만을 기다리던 우리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꽃밭을 이루어 놓았다. 우리는 뜻만 가지면 어느 때 어느 곳에라도 꽃밭을 만들 수 가 있다. 그러나 꽃밭이라고 해서 그저 아름답기만 한 곳은 아니다. 꽃밭엔 슬픈 과거가 있고 그 밑바닥엔 검은 흙 모양의 고통도 있다. 허지만 슬픈 과거가 있기에 화원은 안타깝도록 아름답고 밑바닥에 검은 고통이 있기에 그 아름다움이 더욱 처량하다. 인생도 또한 꽃이다. 호박꽃으로 피건 진달래로 피건 보잘것없는 잡초의 꽃으로 피건 사람은 저마다 꽃으로 피고 꽃으로 진다.” --- p.412 |
낙엽이 꽃잎으로 화하는 기적
“고목(古木)에 꽃이 핀 기적을 보았느냐. 낙엽이 꽃잎으로 화(化)하는 기적을 보았느냐. 여기 그 기적이 있다. 낙엽이 썩지 않고 다시 생명을 얻었다!” 이병주 장편소설 『낙엽』은 나림 탄생 100주년 기념 선집 중 한 권이다. 이 작품은 이야기의 재미와 삶의 교훈이 만나다는 점이 특징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범상한 인물들과 그들이 엮어내는 사건들이 빛바랜 옛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통용 가능하다. 그 묘미를 제대로 맛보기 위해서는, 소설의 서두를 보다 성의 있고 정밀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그 초동단계를 지나면 문장과 표현, 생각과 각성 등 여러 부문에 걸쳐 일종의 철리(哲理)를 방불케 하는 흔연한 실과(實果)를 건네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그렇게, 결미에 이르기까지 여러 인물의 ‘인간회복’에 도달하는 길고 고단한 과정을 견인한다. 이를테면 ‘낙엽이 꽃잎으로 화하는 기적’의 기록이다. 이야기의 재미와 삶의 교훈이 만나다 “『낙엽』에 등장하는 범상한 인물들과 그들이 엮어내는 사건들이 빛바랜 옛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통용 가능한 것이라고 납득하는 순간, 이병주 소설과 그 담론의 자장은 반세기의 공간을 훌쩍 넘어서게 된다.” 이야기의 진진한 재미와 삶의 응축된 교훈이 만나는 소설의 지경, 우리는 그것을 이병주의 『낙엽』에서 목도할 수 있다. 역사 소재의 장편, 특히 대하 장편들에 비하면 대중소설적 성향이 다분하긴 하나 그 대중성은 흥미 위주의 또는 상업주의적 대중성과는 다른 것이다. 강력한 독자 친화의 창작 태도를 대중적이라고 호명하자면, 이 소설이 바로 그렇다. 더욱이 이 소설은 그와 같은 창작의도에 반응한 뜨거운 독자 수용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를 따라 언표(言表)할 수 있는 말, 역사성과 대중성 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작가가 바로 이병주다. 그러기에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이병주인 것이다. 왜 지금 여기서 다시 이병주인가 “백년에 한 사람 날까 말까 한 작가가 있다. 이를 일러 불세출의 작가라 한다. 나림 이병주 선생은 감히 그와 같은 수식어를 붙여 불러도 좋을 만한 면모를 갖추었다.” 2021년은 나림 이병주가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뜻 깊은 해를 맞아 이병주기념사업회에서는 「편찬위원회」를 구성해 선집을 발간하기로 했다. 이 선집은 모두 1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단편 선집 『삐에로와 국화』 한 권에 「내 마음은 돌이 아니다」(단편), 「삐에로와 국화」(단편), 「8월의 사상」(단편), 「서울은 천국」(중편), 「백로선생」(중편), 「화산의 월, 역성의 풍」(중편) 등 6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그리고 장편소설이 『허상과 장미』(1·2, 2권), 『여로의 끝』, 『낙엽』, 『꽃의 이름을 물었더니』, 『무지개 사냥』(1·2, 2권), 『미완의 극』(1·2, 2권) 등 6편 9권으로 되어 있다. 또한 에세이집으로 『자아와 세계의 만남』, 『산을 생각한다』 등 2권이 있다. 『낙엽』은 작품 속 여러 인물의 ‘인간회복’에 도달하는 길고 고단한 과정을 보여주는데, 옹덕동 18번지 공동체의 변화와 그에 속한 각기 개인 생활의 혁명은 두 손을 마주 잡고 함께 찾아왔다. 이곳에서 맺혔던 원수가 이곳에서 풀린 것이다. 시대를 넘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 이야기의 매력에 빠져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