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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함정
브리슬 방식(方式) 비정(非情)의 드라마 0차원(次元)의 집합 방정식의 파탄(破綻) 미완(未完)의 고백 |
李炳注, 호: 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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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숙경의 이름이 신문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의 잡담에만 남았다. “참말로 평양으로 갔을까?” “평양으로 갔으면 강제로라도 대남 방송에 이용할 텐데.” “윤숙경은 깡치가 있는 여자야. 호락호락 이용당하진 않을걸?” “놈들이 납치한 이유가 뭘까?” “대스타가 월북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굉장한 선전 자료가 될 테지.” “김일성이 호색가(好色家)라니까, 과잉 충성 하는 놈이 예물로써 바친 것 아닐까?” “그런 꼴이 되었으면 윤숙경이 혀를 물고라도 죽었을 거야.” “윤숙경이 납치된 것도 벌써 한 달이 넘지 않았는가? 그게 사실일 것 같으면 북괴 방송이 야단법석을 떨 건데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납치되었다는 건 공연한 소리가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됐지?” “아마 죽었을지도 몰라.” “그런 불길한 소리 하지 말게.” “북괴에 납치되었다는 건 불길한 소식이 아니던가 뭐?” “대한민국의 스타로서의 위신과 충성을 과시할 수 있진 않겠나? 납치당했을 경우 말야.” “바늘만 한 것도 홍두깨처럼 말하고 없는 것도 꾸며서 말하는데 윤숙경 같은 대스타가 거게 가 있다고 해 봐. 북괴놈들이 가만있겠어? 아무래도 납치설은 조작인 것 같애.” “그렇다면 구용택의 조작이란 말 아닌가?” “아무래도 그자가 수상해.” --- p.67~68 “자네의 말대로라면 이 지상에 평화가 올 날이 없겠구나.” “당분간 올 날이 없겠지요.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어도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평화의 불가능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이 세상에 폭력이 있는 한 그 폭력을 능가하는 폭력을 확보하고 행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개인으로 볼 때 모두가 그럴 수는 없죠.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들은 폭력을 가꾸려고 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의식을 가지려고 해도 무방한 노릇이죠. 그래서 세계의 어느 지역에선 억지로 평화에 유사한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기도 합니다만……” 유한일의 말을 들으며 나는 이 사람관 더불어 얘기할 수 없다는 씁쓸한 마음으로 빠져들었다. “천지가 개벽을 하고 세상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인간성에 위배되는 행동은 옳지 못한 것이고, 아무리 불가피했어도 사람을 죽이는 일은 옳지 못한 것이다. 하물며 조금만 조심하면 피할 수 있었던 것을, 즐겨 극한 상황으로 자기를 몰아넣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옳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물론 동기도 있을 것이고,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을 테지만 아무래도 나는 자네의 행동을 납득할 수가 없구나. 그러니 여러 가지를 알고 싶진 않다. 윤숙경 씨의 사건만을 알았으면 싶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나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 p.380 |
최은희 납치사건이 모티브인 반(anti)추리소설
“소설 『미완의 극』은 한 편의 추리소설이라기보다 우리의 경애하는 여배우 최은희를 기념하고자 하는 내 나름대로 부른 추억의 엘레지이다.” 1982년에 소설문학사에서 2권짜리로 펴낸 『미완의 극』은 연애소설도 아니고 (근·현대사를 다룬) 역사소설도 아니다. 이 소설을 쓰게 한 직접적인 계기는 영화배우 최은희 납치사건인데 실제적인 최은희 납치사건을 르포르타주 식으로 그린 것은 아니다. 시대소설이라고 해야 할지 사회소설이라고 해야 할지 이름 붙이기도 애매한 이 소설은 이병주를 거론할 때 전혀 언급되지 않은, 평가의 대상에서 누락되고 만 소설이다. 이병주가 이 작품을 가리켜 추리소설이라고 하지 않고 추억의 엘레지라고 한 말이 인상적이다. 이 소설은 이병주의 여러 소설 중에서 아주 특이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평가는커녕 거론조차 된 일이 없었다는 것이 안타깝다. 추리소설이면서 문학인 소설, 그것이 이병주의 목표였다. 어찌 보면 반(anti)추리소설론이다. 냉전 시대, 민감한 주제에 정면 도전 “『미완의 극』은 결국 완전히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채 끝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경애하던 여배우 최은희 씨의 운명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나는 최은희 씨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는 어떤 타의(他意)에 의해 영락없이 침묵해 있어야 할 환경에 빠져들어 있는 것이다.” 이병주는 최은희와 신상옥 두 사람이 북한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 이 소설을 썼다. 그 당시에는 두 사람의 북한에서의 활동 사항이 남쪽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베일에 가려진 북한 생활을 추측해서 쓸 수는 없었고, 납치되기까지의 과정을 상상력을 발휘하여 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채 끝날 수밖에 없는 숙명이었다. 그럼에 불구하고 이 작품은 냉전 시대, 민감한 주제에 정면 도전한 작품이다. 그런데 사건의 전말의 알고 있는 지금, 이 소설을 쓸 무렵인 1980년대 초에 최은희가 북한에 건재해 있다는 것을 이병주는 과연 알고 있었을지 몰랐을지 추측해보면 읽는다면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것이다. 왜 지금 여기서 다시 이병주인가 “백년에 한 사람 날까 말까 한 작가가 있다. 이를 일러 불세출의 작가라 한다. 나림 이병주 선생은 감히 그와 같은 수식어를 붙여 불러도 좋을 만한 면모를 갖추었다.” 2021년은 나림 이병주가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뜻 깊은 해를 맞아 이병주기념사업회에서는 〈편찬위원회〉를 구성해 선집을 발간하기로 했다. 이 선집은 모두 1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단편 선집 『삐에로와 국화』 한 권에 「내 마음은 돌이 아니다」(단편), 「삐에로와 국화」(단편), 「8월의 사상」(단편), 「서울은 천국」(중편), 「백로선생」(중편), 「화산의 월, 역성의 풍」(중편) 등 6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그리고 장편소설이 『허상과 장미』(1·2, 2권), 『여로의 끝』, 『낙엽』, 『꽃의 이름을 물었더니』, 『무지개 사냥』(1·2, 2권), 『미완의 극』(1·2, 2권) 등 6편 9권으로 되어 있다. 또한 에세이집으로 『자아와 세계의 만남』, 『산을 생각한다』 등 2권이 있다. 『미완의 극』은 다양한 이병주의 작품 중에서도 독특한 소재를 다룬 작품이다. 그러난 그 독특함을 넘어 작가 이병주가 세계의 평화, 호혜주의, 사해동포사상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써 비롯된 드라마를 쓴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