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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구성
1강. 카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과 사회적인 것 _ 백승욱 2강. 에밀 뒤르켐의 비판사회학과 사회적인 것, 그 의의와 한계 _ 김주환 3강. 막스 베버의 『경제와 사회』에서 사회적인 것의 쟁점 _ 김성윤 4강. 미셸 푸코의 비판: 공리주의, 자유주의, 고전경제학 _ 조은주 5강. 뤼크 볼탕스키의 자본주의 비판과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 _ 김주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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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사회학자들에게 경제학 비판이 왜 중요했는지부터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왜 사회학자들은 뒤르켐, 베버, 마르크스 세 명을 고전사회학의 중심인물로 삼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19세기 말의 상황과 연결된 경제학 비판이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 사회학에 왜곡되어 수용된 진화론인 ‘사회진화론(사회 다윈주의)’이라는 관점을 세운 인물이 영국 학자인 허버트 스펜서인데, 그는 ‘자연적 질서가 사회에도 적용되고 있는데, 그 사회에서 작동하는 자연적 질서란 자기 작동하는 경제적 질서인 시장 경제의 조화로운 질서를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손대지 않더라도 사회는 경제와 마찬가지로 잘 진화해 간다는 생각이 사회진화론의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1870년대 이후 유럽 전체가 심각한 경제 불황을 맞으면서 사회적인 동요가 발생합니다. 이런 복잡한 문제를 자유방임의 신화에 서 있는 경제학이나 사회진화론으로는 해결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비어 있는 부분, 경제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도전이 발생합니다. 20세기 초반에 보수적인 사회학의 체계를 세운 탤컷 파슨스 같은 사람은 “누가 아직도 스펜서를 읽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자기 입론(立論)을 세우는데, 스펜서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는 이 비판점은 모든 고전사회학자의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서문」중에서 자본주의 화폐의 독특성은 이것이 사회적인 것의 의미를 부여하는 힘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본래 사회성의 출발점은 화폐가 아니라 사회적 노동입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사회적 성격은 그 자체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일단 ‘사회적 필요노동’으로 인정된 가치가 상품 속에 응결되어 그것이 상품으로 팔리고, 이를 통해 상품이 다시 화폐로 전화해 이윤이 실현된 다음에 그 화폐 일부를 노동자들한테 임금을 줌으로써 이 순환은 일차적으로 완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순환 끝에서야 임금을 받음으로써 노동자의 노동은 사회적으로 승인되는데, 다시 말해 노동이 상품에 가치로 응결된 순간에 사회성을 띠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회적 승인은 상품 유통 과정을 거쳐 사회적 노동이 시장에서 화폐로 실현된 이후의 문제고, 만일 추상노동이 응결된 상품이 판매되지 않고 재고로 쌓여 있으면, 그 노동은 사회적인 것이 아닌 것이 되죠.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일이 될 뿐입니다. 이처럼 사회적 노동이 지닌 ‘사회적인 것’의 특징은 직접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화폐의 매개를 통해서만 실현되며, 여기서 화폐는 처음에 실용적 매개 수단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다가 나중엔 군주의 위치처럼 높아져서 사회성의 인정 여부를 결정하는 권력을 형성하는데, 이 논리를 이해하는 것이 가치형태론의 핵심이죠. ---「1강_카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과 사회적인 것」중에서 뒤르켐의 현대 비판 기획은 사회 자체가 지닌 고유의 사회적 힘 또는 도덕적 힘을 통해 현대의 병리를 해결하고 사회를 새롭게 조직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사회적 힘이 막강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뒤르켐은 종교 분석을 했고, 그 작업들을 통해 결국 종교적 신성의 힘이 곧 사회적 힘임을 논증했습니다. 베버는 비록 비관주의에 빠졌지만 그것은 현대의 조건에서 종교의 힘이 위축된다는 냉정한 현실 인식의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뒤르켐은 사회적 힘의 원천을 찾기 위해 현대적 조건을 분석하는 대신 과거로 눈을 돌려 토테미즘이라는 원시 종교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베버와 비교할 때 우리는 사회적 힘의 원천을 찾고자 했던 뒤르켐의 종교 분석이 과연 현대적 조건에 대한 냉정한 분석에 기반해 사회적 힘의 실체를 찾은 성공적인 작업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 아마도 우리는 뒤르켐의 통찰을 이어받되 그가 사회적 힘의 원형적 원천으로 바라본 종교적 신성의 힘을 현대적 조건에서 다시 재구성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적 결속의 많은 메커니즘의 원형이 종교 현상이라는 점을 수용할 수는 있겠지만, 현대의 사회적 힘을 곧장 원시 공동체의 종교 현상에서 발견되는 신성의 힘에서 끌어오기보다는 종교 현상의 메커니즘이 현대적 조건에서 어떤 변형을 거치면서 사회적 메커니즘으로 정착되어 갔는지에 대한 좀 더 인류학적이고 역사적인 분석이 보완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2강_에밀 뒤르켐의 비판사회학과 사회적인 것, 그 의의와 한계」중에서 베버의 논의에서 주된 표적은 아무래도 이 현대성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 견해일 수 있겠는데, 프랑스나 영국 쪽 사상가들과는 다르게 독일 쪽 사상가들이 현대성의 문제에 관해 좀 더 뚜렷한 성찰적 깊이를 보여주곤 하는 것 같아요. 어떤 민감성이 있다고 할까요. 후발 국가로서 가지게 되는 선진적인 국민국가 형태에 대한 묘한 문명적 콤플렉스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그렇지만 후발 주자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장점을 가지는 측면들도 있겠죠. …… 어쨌든 그런 연유에서인지 지멜도 그렇고 베버도 그렇고 현대성의 복합적이고 모순적 성격을 탐문하고 있고 또 그런 만큼 중요한 지적 성취를 보여줬던 것 같습니다. 현대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이냐, 선진적인 방향이면 더 나아가는 것이냐 등의 질문이 뒤따라 나올 수 있단 말이죠. 거기에는 가치 체계의 충돌이라든가, 문화 지체 현상이라든가, 이런 부분들이 걸려 있기 마련이니까요. 단순히 주술적 세계에서 탈주술화된 세계로, 비합리적인 세계에서 합리화된 세계로, 통일된 세계에서 분화된 세계로, 이런 식으로 마치 스위치를 눌러서 한 번에 모드 전환이 일어나는 사회 변동을 거치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이들이 겪고 있는 현대화의 과정 혹은 이들이 추구해야 하는 현대화 과정을 이해하려면 제법 복잡한 사유가 필요하겠죠. 그래서 현대성을 지향하면서도 이 현대성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동시에 서술해야 되는 상황이 오게 돼요. ---「3강_막스 베버의 『경제와 사회』에서 사회적인 것의 쟁점」중에서 여기서 제가 ‘감시하는’이라고 작은따옴표를 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왜일까요? 이때 ‘감시하는’ 건, 누가 감시하는 건가요? 이것이 판옵티콘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감시하나요? 궁극적으로는 내가 나를 감시하는 것입니다. 결코 저 감시자가 나를, 죄수를 감시하는 게 아닙니다. ‘저 감시탑 안에 누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가 나를 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내가 나 스스로를 규율해야 한다’는, 그런 절차로 고안된 것이 판옵티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후에 통치 전체의 정식(定式)으로 제안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판옵티콘은 자유주의적 통치의 정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벤담이 판옵티콘이라는 건축학적 모델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굳이 이와 같은 형태의 구체적인 건축물이 아니어도 되죠. 이와 같은 원리가 작동하기만 하면 됩니다. 판옵티콘은 일종의 건축학적 은유입니다. ---「4강_미셸 푸코의 비판: 공리주의, 자유주의, 고전경제학」중에서 볼탕스키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정신이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었던 68운동의 정신에서 기원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지적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우리 주변에서 진행되는 자율성에 대한 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68운동에서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었던 이들이 요구했던 자율성은 적어도 외견상으로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는 보다 잘 실현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본주의가 정당성 문제는 물론 자본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필요로 하던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가 다시금 원활히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마치 트로이의 목마처럼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었던 68운동의 성공이 역설적으로 그 ‘적’인 자본주의의 승리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강조되고 있는 자율성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물론 자율성, 그리고 자유는 너무나 중요한 가치입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야기되는 자율성과 자유가 진정한 자율성과 자유인지 따져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자율성과 자유라는 이름으로 그것들의 진정한 발현을 막아서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숙고해 봐야 합니다. ---「5강_뤼크 볼탕스키의 자본주의 비판과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