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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부 알고 싶어요 12 기대 14 필사 16 두 번째 시집 18 바닷가 끝 집 20 거리두기 22 서바이벌 24 자화상 26 세일즈맨 28 막내 30 아내의 기도 32 한 끗 차이 34 세월호 36 핑계 38 2부 파노라마 42 우주여행 44 디카시 46 익명 48 디오라마 50 큰 언니 52 수개리 이장님 54 꼭두새벽 56 늦가을 58 앨범을 넘기며 60 뜬구름 62 산벚나무 64 퇴임 66 근황을 묻다 68 3부 응원 72 하품에 대한 짧은 보고 74 봄의 초입 76 You Quiz 78 빈집 80 천 개의 바람 82 중년 84 별 86 노후대책 88 새옹지마 90 유언 92 나비 94 경고 96 4부 해운대 100 아침의 위로 102 떡볶이 1인분에 김밥 한 줄 104 비대면 106 그해 여름 108 기적 110 마馬 112 꼭, 있다 114 독거 116 몇 날 며칠 고요로 출렁인다 118 유년의 5월 120 노인 A 122 행위예술 124 해설 | 저 낮은 곳과 높은 곳의 비경 _ 오민석 126 |
천융희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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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융희 시인의 디카시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그녀의 디카시들은 우선 사진부터 눈길을 끈다. 디카시가 카메라에 순식간에 포착된 이미지에서 시작한다면, 그녀의 사진들은 출발부터 이미 그 자체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어찌 보면 디카시에 최적화된 상태의 것들이다. 사진 자체가 이미 많은 의미를 방출하고 있으므로, 짐작건대 그녀는 이미 사진을 찍는 순간 해당 시의 절반 이상을 썼을 것이다. 그녀의 사진들은 대부분 디카시를 쓰려는 다른 시인들이나 독자들에게도 상상력과 영감을 강하게 자극할만한 것들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디카시 창작의 필수 과정인 시적 이미지의 순간 포착에 이미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는 시인이다.
천융희 시인의 디카시 「알고 싶어요」에서 담쟁이가 건물을 기어올라 만든 초록 십자가의 모습은 그 자체 누가 봐도 독특하지 않은가. 이 사진에선 십자가의 이미지가 너무 강력하여 그것을 보는 순간 그것에 ‘인접’해 있는 어떤 것을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이 사진은 매우 강력하게 환유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진이다. 이럴 때도 시인은 ‘십자가’라는 ‘설명’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사진과의 화학반응이 없다면 이 시 속의 “가신 발걸음”, “이 길”이라는 문자들의 의미는 미지의 사막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시인은 환유적 상상력을 가동하면서도 애써 설명을 회피한다. “알고 싶어요”라는 제목을 뒤집어 읽으면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라는 고백이다. 이 겸손한 고백은 환유적 상상력이 뻔한 의미로 닫히는 것을 방지하는 안전밸브이다. ‘잘 모르겠다’는 진술은 피사체의 의미를 신비로운 ‘비결정성(indeterminacy)’의 상태로 남겨둔다. 이 비결정의 상태야말로 시적 의미가 머무는 공간이다. 또한 천융희는 신을 살해한 19세기의 정신에 동의하지 않으며, 문제의 궁극적인 열쇠가 그들이 죽인 신에 있음을 다시 확인한다. 시인에게 있어서 삶의 여러 사건 혹은 국면들에 대한 해석의 기본 원리는 인간이 아니라 “신의 인도”(「새옹지마」)이다. 그리하여 “밖으로 밀려났다”는 인간의 판단은 언제든지 “기회”로 전복될 수 있다. 저 높은 곳의 문법은 이렇게 인간사의 다양한 굴곡들을 “새옹지마”로 만든다. 시인이 볼 때 신의 새옹지마는 피조물에 대한 사랑과 용서를 향해 있다. 그것에 대한 믿음이 세계에 대한 시인의 긍정적 태도를 만든다. 니체의 19세기가 애써 신을 살해한 상태에서의 자기 긍정 혹은 자기 사랑을 요구했다면, 시인의 긍정은 신의 존재 상태에서의 긍정, 신이 인도하고 가르쳐준 긍정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20세기 모더니스트들과 달리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부정이 아니라 긍정을 노래한다. 디카시 「기대」를 살펴보면 사진의 피사체들은 그 ‘지하무덤’에서 나와 생명의 “햇볕”을 쬐며 부활을 꿈꾼다. 식물들의 그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시인은 스스로 식물이 되어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겠지”라고 말한다. 식물 화자가 된 시인의 “기대”는 모두 무덤의 반대쪽에 있는 생명의 신, 부활의 신에게서 오는 것이다. 천융희의 시는 이 낮은 곳에서 그 높은 곳으로 가는 먼 길 위에서 써진다. 이처럼 천융희 디카시들은 크게 두 방향을 향해 있다. 그것은 그녀의 옆과 위이다. 그녀의 옆은 저 낮은 곳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결핍과 고통에 시달리는 것들을 따스한 시선으로 끌어안는다. 그녀의 위는 저 높은 곳이다. 그곳에서 시인은 낮은 것들을 향해 있는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들을 읽는다. 그녀 그리고 그녀의 옆과 위는 따로 놀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문법 안에 통합되어 있다. 천융희의 디카시들은 이 문법과 마주치는 독자들에게 넘치도록 그윽한 희망과 평화를 준다. 그것은 저 낮은 곳과 저 높은 곳을 오래도록 궁구해온 시인의 따뜻한 선물이다. 천융희 시인의 디카시집 『파노라마』의 이미저리 속에 숨어있는 시인의 은유와 환유의 철학이 깊은 심해(心海)처럼 깊고도 아름답다. ● 시인의 말 그들이 머금고 있는 말에 귀 기울여 단지, 대리인으로서 받아 적었을 뿐이다 순간의 느낌이라 한 줄로도 충분했으며 존재마다 또 하나의 우주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