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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마지막 눈사람 해설 │ 얼음도시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_류신 |
崔勝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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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음의 성이었다. 하얀 빙벽을 두른 고독으로 얼음의 자아를 고집했다. 아무도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사랑의 불길조차 나에 닿으면 꺼져버렸다. 빙벽의 시간 속에서, 가족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거만하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거만하다고 생각지 않았을까. 얼음동굴의 얼음도끼들, 내 수염이었던 고드름들, 결빙의 세월을 길게도 나는 살아왔다.
--- p.15 다 죽었는데 나만 혼자 구경꾼처럼 남아 있어도 되는 것일까. 마치 지구의 종말에 대한 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어느 우울한 외계인처럼, --- p.32 내가 죽으면 나의 상처는 더 이상 상처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내면의 상처든 거죽의 흉터든 모든 상처들은 지워질 것이며 긁히고 찢어지고 피를 흘렸다는 기억조차 거대한 반죽의 힘에 뭉개질 것이다. 하지만 그때에도 참았던 슬픔을 터뜨릴 수는 없지 않을까. --- p.79 모든 상처가 진주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해 여름에서 그다음 해 여름까지, 나는 조개껍질 같은 방에서 살았었다. 뭘 하고 살았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만 쉬었다. --- p.97 어두운 사람이여, 죽음의 그림자를 오래도록 끌고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그 실체도 없는 그림자가 마침내는 힘을 얻어서 당신을 삼키게 될 것입니다. 마치 환술사가 만들어낸 환상의 호랑이가 겁먹은 환술사를 씹어 삼키듯 말입니다. --- p.121 들을 사람 하나 없는데 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일까.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기 때문이다. 봄이 와야 나는 죽을 수 있고 말을 멈출 수가 있다. --- p.126 그리하여 이렇게 밤의 옥상 위에서 고독만이 나의 뼈라고 생각하면서, 강물이 흐르고 새들이 지저귀는 먼 봄을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p.130 믿고 싶지 않겠지만 나 아닌 것들이 모여서 나를 잠시 이루었다 해체되듯이, 당신도 당신 아닌 세계로 흘러드는 날이 있을 것이다. 이슬, 바람, 흙, 별, 그것들이 본래 당신의 얼굴 아니었나. --- p.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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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있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공허와 비애와 우울과 불안, 고독과 절망감과 그리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가슴에 들어 있지 않은가. 가슴이 있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렇다고 가슴의 서랍들을 다 빼버리고 텅 빈 가슴으로 살아갈 수도 없는 일. 벽돌은 가슴이 없다. 구름도 가슴이 없다. 가슴이 있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_「가슴의 서랍들」 『마지막 눈사람』은 최승호 시인이 생애를 통해 견딘 어둡고 깊은 절망과 고통에 대한 기록이다. 시인은 염세조차 받아들이고, 어떤 거짓된 위로도 거부하며 허공과 암흑의 끝을 응시한다. 그의 이야기는 단단한 에고에 대한 담담한 타격이며,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독자에게 가까이 가고자 하는 따뜻한 노력이기도 하다. 『마지막 눈사람』에서 빙하기의 눈사람은 얼어붙은 대도시의 적막과 어둠과 절망과 고독에 직면한다. 빙하기 한복판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눈사람은 슬픔, 절망, 고독, 적막, 욕망, 괴물, 유령, 공포, 불안, 허공, 조소를 거쳐 마침내 우주가 된다. 짧고 쉽게 읽히지만, 깊은 시적 함의와 현실을 교란하는 우화의 전복을 담지한 철학적이고 기묘한 이야기이다. 『마지막 눈사람』은 눈사람이 절망하는 그로테스크한 동화로, 자신의 몸이 얼어붙는 듯한 은유로, 깊은 슬픔과 고통의 기록으로, 문명의 폭력에 죽어 가는 생태의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철저히 혼자라는 것을 함께 느껴 줄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그 안에 있다. “그리하여 이렇게 밤의 옥상 위에서 고독만이 나의 뼈라고 생각하면서, 강물이 흐르고 새들이 지저귀는 먼 봄을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눈사람』의 아름다움은 눈사람이 어떤 거짓된 위로도 거부하며 고독을 정직하게 직시하는 데 있다. 일상에서 우울과 절망, 고통은 무시로 우리를 덮친다. 우리는 속수무책 당하기도 하고 어떻게든 버텨 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지 못한다. 어떻게 버틸 것인가. 시인은 이러한 버팀의 자세를 우리에게 펼쳐 놓는다. 우리는 소통이라는 핑계로 새로운 관계 맺음에 집착한다.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과의 대화는 회피한다. 잠시라도 고독을 참지 못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릴 뿐이다. 고독이 소외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고독은 내면의 진솔한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는 청진기이다. 절대 고독은 자아를 세상 전체와 독대하게 만든다. 단독자로서 무변광대한 우주와 마주 서라! _“해설” 중에서 『마지막 눈사람』은 “고독이 소외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님을 일깨워 준다. 시인의 고독은 절망과 우울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존재를 우주의 일부라고 느끼게 한다. “없는 내가 허공으로 존재했던 6500만 년 전”의 시간부터 “나 없는 나의 고독”이 있을 억겁의 미래를 왕래하며 “태양을 2.72년 주기로 돌고 있는 소행성 2012 XE54”를 만나고, “소행성 99942 아포피스가 2036년 지구와 충돌할” “100만분의 1이하”의 확률을 느끼는 사이에 우리는 자신을 우주의 일부로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눈사람이 얼음의 “감옥”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을 때, “마네킹”이 “뛰쳐나와 울부짖”을 때, “물소”가 “음험한 뱃가죽을 내밀고 숨 쉬면서” “도살의 음모에 가담”할 때, “백지”가 “순결함을 고집하지 않으면서 누가 당신에게 먹칠을 하든 구겨서 찢어버리든 그것을 상처로 여기지 않았을” 때 단단한 우리의 에고에 균열이 생긴다. 그 순간 우리는 소행성, 별자리, 눈사람, 마네킹과 동등한 위치에 선다. 우주의 한 존재로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작은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믿고 싶지 않겠지만 나 아닌 것들이 모여서 나를 잠시 이루었다 해체되듯이, 당신도 당신 아닌 세계로 흘러드는 날이 있을 것이다. 이슬, 바람, 흙, 별, 그것들이 본래 당신의 얼굴 아니었나. _「눈다랑어」 우주의 타자들과 자신을 동등하게 바라보게 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문명과 생태에 관한 시인의 질타를 듣는다. 에고로 가득 찬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세계를 감각하며 지구와 생태를 인식하게 된다. 해설에 따르면 “최승호는 환경 위기의 원인으로 인간 중심의 자연 지배적 세계관을 지적하며 인간 우월주의를 비판하는 생태주의를 시의 화두로 붙잡고 궁구해온 시인”이다. 대도시를 “괴물”로 비유하고 “문어”로 문명을 조소하며 “낡은 외투”, “문자”, “낮”, “우주”, “지구”, “망막”, “안구”, “시선”, “눈”, “백지”, “물소”, “도살장의 소”, “배 터져죽은 두꺼비” 등이 모두 동등한 존재라고 시인은 말한다. 시인은 우리가 외면하고자 했던 그들의 죽음을 눈앞에 가져다 놓으며 에고를 담담하게 타격한다. 이윤을 위해서라면 어떤 비참에도 슬퍼하거나 반성하지 않는 문명을 어떤 빙하보다도 차갑게 질타하는 것이다. 『마지막 눈사람』은 그로테스크한 우화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로테스크’는 15세기 말 이탈리아 곳곳의 동굴에서 발굴된 특이한 고대 장식에서 유래된 말로, 식물과 동물, 식물과 인간, 동물과 인간 등 이질적인 요소들의 혼재를 특징으로 한다. 그로테스크의 미학은 현실의 질서가 파괴된 세계를 대면하는 긴장감과 섬뜩함에 있는 것이다. “망둥어”, “갈매기”, “게”, “낙지”가 사람처럼 죽어 가고, “눈사람”, “마네킹”, “가방”이 사람처럼 보고 느끼고 조소하고 성찰하는 시인의 그로테스크적 상상력은 강렬하다. 『마지막 눈사람』의 그로테스크한 우화들은 이질감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형태의 죽음을 느끼게 한다.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죽음은 우리의 에고에 균열을 내며, 삶은 이전과 다른 것이 된다. 인간 역시 많은 것들과 함께 사라지거나 죽어 가는 존재라는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를 조금은 더 알게 된다. 마침내, 우리는 빙하기와 같은 삶을 이해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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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우화는 윤리적이지도, 종교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않다. 그의 우화는 염세적이고, 실존적이며, 철학적이다. 최승호 우화의 독창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 류신 (문학평론가, 중앙대 유럽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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