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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 서문 1장 와츠지 테츠로의 풍토 개념과 문화적 의의 하이데거의 현존재를 넘어서 풍토란 무엇인가? ‘탈자적 존재’와 공동의 자각 지역 결정론을 넘어서 다자 간 차원의 윤리 풍토적 한계를 넘어서는 개인과 ‘간풍토성間風土性’ 2장 개방성과 풍토: 일본 전통 가옥에서 재발견한 지속가능성의 의미 일본 전통 가옥에 대한 비판 개인주의와 복도의 등장 고정벽과 환풍구 일본 전통 가옥의 개방성 근대성과 안팎의 이원성 공동 대응과 공간의 구조 공동성에서 프라이버시로 풍토성과 현대주택 3장 연대와 ‘온기’의 생태학: 리처드 노이트라의 생태 건축 정신분석학과 실증주의를 넘어서 다양한 기운과 조화로운 균형 정박과 기운의 조율 모태공간의 재현과 빛의 양수 온기와 다자 간 차원의 일본 전통 마주봄과 ‘우리’의 생태학 에코스와 연대 4장 지역성과 초지역성의 변증법 비판적 지역주의를 넘어서 지역주의에 대한 비판 풍토와 건축적 ‘코드’의 신체적 효능 풍토와 대립항의 변증법 대립적 균형과 삶의 양상 간풍토성間風土性과 지역적 경계를 넘어서 지역성과 초지역성 유형과 차이 결론 감사의 말 도판목록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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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만큼 타자가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몬순성과 사막성, 이렇게 서로 다른 인간성이 만나 펼칠 다자 간 관계의 드라마는 어떤 모습일까? 이 이항관계는 자폐적이 아니라 다항관계를 향해 열려 있다. 몬순성, 사막성 그리고 초원성이 서로 조우할 때 펼쳐질 다자 간 드라마는 더더욱 미답의 지평이다. 타자는 아직 내가 되어보지 못한 나의 가능성 그 자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몬순성은 사막성과 초원성을 자기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간풍토성의 영역은 서로 다른 차이들이 상호 생기하고 이 차이들이 엮이며 만들어 낼 가능성과 잠재성을 실험하는 공간이다.
--- pp.93~95 와츠지는 구조와 재료에 매인 건축가의 시야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각으로 일본 가옥의 대응방안을 밝혀준다. 그는 가옥의 개방성에 주목한다. 그것이 가져오는 환경적 이점이 다자 간 윤리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간의 개방성은 풍토에 대한 대응인 동시에 가족 구성원들 간에 자리잡은 애정의 산물이다. 무더운 여름에 방을 구획하는 구조에 융통성이 있으면 칸막이를 열어 통풍을 원활하게 할 수 있다. 드리워진 발을 통해 거리에서 바람이 들어와 방들을 차례로 거친 뒤 마지막에는 중앙에 있는 작은 안뜰에 도달한다. 그러는 동안 바람은 습기를 실어 날라 대기로 배출한다. 이 구조가 가능하려면 프라이버시를 ‘자발적으로’ 양보해야 하는데, 이는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의 한 형태다. 다른 말로 하면 맞통풍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조율된 사람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 pp.129~130 우리는 노이트라가 모퉁이에 부여한 역할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모퉁이는 단지 사람의 시야를 먼 지평선으로 흘려보내는 시각적 장치가 아니다. 「밀러 하우스」의 모퉁이에는 사막의 풍토를 조절하고자 세심하게 디자인된 창과 함께 데이베드가 놓여 있다. 이곳은 만남의 무대다. 노이트라의 말처럼 자그마하기에 오히려 서로를 촘촘하게 묶어내 상대방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드문 기회를 만들어내는 그런 무대 말이다. 창과 데이베드가 결합한 모퉁이의 시각적 흡인력은 가족 구성원들 간의 공동점유와 대면을 염두에 두고 있다. --- pp.179~180 하지만 더 놀라운 반전이 있다. 교회 안에 들어온 빛이 차가움을 관통할 때, 그 빛은 아무리 약해도 실내 공간을 밝고 따뜻하게 물들인다. 따뜻한 빛은 어둠과 더불어 추위가 이미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더욱 효과적이다. 빛, 그리고 그 빛과 결합되어 있는 온기는 단순한 물리적 실체가 아니다. 빛으로 와서 세상에 온기를 전하는 예수의 은유물로도 인식되기 때문이다. 「빛의 교회」가 결합해 내는 추위와 따뜻함은 지적인 신자들의 이성적 태도와, 이성적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불가한 아가페가 조우하는 것이다. 엄습해오는 추위 속 어둠을 가르는 환한 온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자 빛을 향하는 행위 자체가 영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 pp.208~209 |
공간에 내던져진 현존재, 풍토적 인간
서구 전통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인식 주체인 인간과 그 대상인 자연을 분리해 놓았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사유가 인간과 자연을 동떨어진 존재로 나누어, 자연물을 인간의 편의적인 자원이나 도구로 인식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와츠지는 하이데거의 사상을 수용하되, 시공간 안에 던져진 존재의 ‘피투성’을 더욱 강조하면서 자신의 사유를 심화했다. 그는 특히 ‘공간성’을 인간 존재를 규명하는 키워드로 보고, 인간이 내던져진 공간이자 모든 체험의 배경이 되는 자연조건을 ‘풍토’라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파악했다. 저자는 와츠지의 풍토론을 이어받아 기후변화와 자원고갈의 위기를 맞고 있는 오늘날, 건축과 도시가 나아갈 지향점을 다시 설정한다.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 개인에게 ‘풍요로운 공간 경험’을 제공하는 데에 집착하느라 기후와 삶의 내밀한 관계를 놓쳐버린다면, 사회 전체의 측면에서는 윤리, 즉 ‘에토스’의 영역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가’를 발견하게 해주는 거울, 풍토 저자는 철학자 에라짐 코하크의 말을 빌려 자연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양태야말로 실재하는 세계의 모습이라 말한다. 실제로 우리는 어떠한 사물을 접할 때,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환경이나 맥락 속에서 인식한다. ‘물’을 인식할 때면 H₂O라는 기호로 표기되는 물질이 아니라 더 구체적인 양태, 예컨대 ‘고즈넉한 화장장의 반사 연못의 물’처럼 특정의 환경과 정서적 분위기가 수반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은 인간과 동떨어진 객체가 아니며 인간 또한 자연을 맘대로 조작하는 주인이 아니다. 자연 현상은 인간의 성정과 맞물리고, 이 양자의 융합 속에서 ‘의미’로 가득찬 풍토의 세계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풍토는 인간 성정의 다양한 양상을 발견하게 하는 은유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다양한 풍토와 그에 관련된 인간 유형을 몬순의 인내심, 사막의 끈질김, 초원의 합리성 등으로 정의하는 경우가 바로 좋은 예이다. 일본의 전통 가옥과 노이트라의 건축에서 발견한 풍토성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은 폭염, 홍수, 태풍 등과 같은 기후 현상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공동체의 차원에서 상호 연대하는 삶을 살아왔다. 이 과정에서 풍토는 서로 다른 개인들을 하나의 ‘나’로 묶어내는 것, 즉 ‘공동의 자각’이라는 현상이 탄생하는 동인이었다. 이 공동의 자각에 기반한 기후 현상에 대한 대응은 삶의 패턴으로 자리 잡게 되고, 이 패턴은 다시 어떤 상황에서 벌이는 특정 행위의 적절성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 이것이 바로 윤리의 어원인 에토스이다. 현대에 불문율처럼 여기는 ‘프라이버시’를 구현하는 공간과는 대척점에서 극적인 개방감을 구현한 일본의 전통 가옥은 바로 다자간 연합을 통해 일구어낸 에토스의 공간이다. 캘리포니아 사막에 자리 잡은 리처드 노이트라의 주택 또한 풍토에 대한 대응을 담고 있다. 불과 바람, 불과 물의 만남을 조율한다. 그리고 이 기운들 사이의 균형을 회복하는 전략적 위치에 사람을 모아주고 정박시키는 데이베드와 같은 가구를 위치시켰다. 노이트라의 작품은 일견 모더니즘 건축을 표상하는 백색의 오브제처럼 보이지만, 그의 관심은 세련된 이미지의 창조가 아니라, 풍토가 지닌 다양한 특질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조율하고 사람을 불러 모으는 정박지로 삼는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초지역적 표상과 풍토의 결합, 안도 다다오의 「빛의 교회」 카탈로그를 보며 재료를 주문하고, 공조 시스템이 보편화된 현대에 풍토와 지역성을 논하는 것이 여전히 유효할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지역주의를 비판한 앨런 콜퀴훈은 더 이상 대지에 뿌리를 두지 않고 이리저리 부유하는 초지역적 표상으로 인해, 오늘날 지역성을 논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는 초지역적 표상과 풍토가 훌륭하게 결합한 사례를 거론하며 풍토론이 여전히 유효함을 입증한다. 안도 다다오의 「빛의 교회」는 습도가 높고 대기가 흐려서 명암의 대비가 낮은 몬순 지역에 지어졌다. 건축가는 건물 남쪽 벽에 십자가를 뚫어 직사광을 받아들이고 나머지 부분은 어둡게 하여 명암의 극적인 대비를 구현해낸다. 이를 통해 어둠을 찬란히 밝히는 빛의 십자가가 탄생한 것이다. 게다가 콘크리트 벽의 한기는 빛의 십자가를 통해 들어오는 온기를 더욱 따스하게 만든다. 어둠과 빛이, 그리고 추위와 온기가 서로 결합한다. 대립항들이 상호의존하는 이 네트워크 속에서 십자가는 지적으로 해독되는 기표가 아니라 찬란함과 따뜻함이라는 기운으로 먼저 다가온다. 그리고 어둠과 추위에 사로잡힌 신자의 신체 속으로 거침없이 파고 들어간다. 십자가라는 초지역적 표상의 지각적 효능을 극대화시킨 안도의 건축물은 풍토론의 관점에서도 매우 훌륭한 사례가 된다. 풍토 위에서 새롭게 표현되는 삶의 전형성 저자에 따르면 인류에겐 지역성을 뛰어넘는 삶의 이상과 전형성이 있고, 이것이 개별적인 시공간에서 풍토를 만나며 확증되고 실현된다는 것이다. 권위와 평등, 개인성과 공동성, 출생과 죽음, 유한성과 무한성, 일시성과 영원성 같은 인간의 이중적이고 영속적인 조건은 시대와 사회를 초월한 삶의 전형성을 논할 수 있게 하는 토대이다. 집단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원형으로 모여 앉거나 춤을 추는 것은 시대, 인종, 지역을 초월하여 목격되곤 한다. 그리고 수학자가 먼저 원을 그린 후 그 모양을 따라 춤을 추라고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니다. 즉 원은 기하학의 산물이기 이전에 구성원 간에 평등한 관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공동체적 염원을 담는 삶의 산물인 것이다. 저자는 건축과 도시에서도 전형성이 창작의 기반이라고 주장한다. 상호 간 공유되는 전형성이라는 토대 위에서만 건축가의 창작물이 담아내는 독창성을 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전형성과 차이라고 하는 이중적인 구도 속에서 건축 창작의 가치를 정립하고자 하는 저자는 풍토에 다시 주목한다. 초지역적 전형성은 풍토를 초월한 ‘발견’의 대상이지만, 그 전형성을 구현하는 구체적인 형식은 바로 풍토의 영향 아래 놓인 ‘발명’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
러스킨의 『먼지의 윤리The Ethics of the Dust』(1865)가 나온 이후로 건축의 윤리적·환경적 책임을 이토록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 책은 처음이다. 백진 교수의 연구는 특히 오늘날 더욱 의미가 있다. 우리는 여전히 자연과학에만 의존하여 지속가능성을 논하고 있는 탓에 자원 배분의 사회문화적 차원을 간과하고 있다. 『건축과 기후윤리』는 알토, 노이트라, 안도 등 위대한 건축가들의 연구를 두루 살피면서 건축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새롭게 설정한다. 더 인간적이고, 공정하고, 고무적인 해결책을 향하여. - 데이빗 레더배로우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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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 교수의 글처럼 깊이와 학식이 풍부하면서도 과도하게 기술적으로 흐르지 않은 건축학 저서는 보기 드물다. 백진 교수는 하이데거를 비판했던 일본의 철학자 와츠지 테츠로의 윤리현상학에 기초해 건축적 사유에 관한 새로운 길을 냈다. 그 위에서 우리는 ‘지속가능성’에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깨닫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건축의 도움을 받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깨우치게 된다. - 마이클 베네딕트 (미국 오스틴 텍사스대학교 건축학과 ACSA 석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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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 교수의 이 훌륭한 연구서는 와츠지 테츠로의 비이원론 철학에 기초하여 건축의 윤리적 측면과 지속가능성을 깊이 있게 통찰한다. 오늘날은 환경을 객체화하고 임의로 자의적인 실험을 하면서 이를 건축이라 내세우는 시대이다. 이 책은 그런 입장의 한계를 밝히며 ‘분위기atmosphere’와 ‘기분attunement’의 개념을 둘러싼 담론에 의미 있는 대안을 제시한다. 특히 와츠지의 핵심 개념인 ‘풍토’를 주요 근거로 사용한다. 풍토는 문화와 자연이 어우러진 ‘사회체social body’를 포용하는 초-주관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다. 백진 교수는 이 개념을 바탕으로 분위기를 주관적 효과로 보는 관점의 오류를 밝히고, 지속가능성을 양적 개념으로 축소하여 기술적인 문제로만 취급하는 시각 또한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드러낸다. - 알베르토 페레즈-고메즈 (몬트리올 맥길대학교 사이디 로스너 브로프먼 건축사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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