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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그것은 어디로 갔을까?
제1부 시간의 편린 위에 서다 제1장 망각 불능증 제2장 바로 이 순간의 짧은 역사 제3장 시각화하라! 제2부 신이 아닌 존재 제4장 양자 얽힘 제5장 영원의 상 아래에서 제6장 눈 깜짝할 사이 제3부 우주에 끝이 있을까? 제7장 다른 사람들이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우주 제8장 엄숙함 제9장 측정하기 좋게 만들어진 우주 제4부 자유의 심연 제10장 자유의지 제11장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 제12장 근심과 원한을 벗어던지고 후기 감사의 말 주 참고 문헌 더 읽어볼 만한 책 인명 색인 |
William Eggin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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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가정에 따르면, 가장 위대한 마법사는 강력한 마법을 부려 헛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믿도록 그 자신마저 속이는 마법사였다. 그는 “우리가 꼭 그렇지 않은가?”라고 물었다.……“우리는 세계를 꿈꿔왔다. 우리는 세계가 공간상으로 고정되어 있고 불가사의하며 눈에 보이고 어디에나 존재하고 시간상으로 영속적이라고 꿈꿔왔다.”
--- p.22~23 칸트가 깨달은 바에 따르면, 우리의 지각은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마음속에서 그 사물에 시공간적으로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구성하게 된 그것의 별형이다. --- p.24 지식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우리가 실재를 이해하는 방식이지만, 실재의 궁극적 성질은 그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 p.27 우리가 정작 경계해야 할 것은 실재란 어떠해야 한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부단히 넓어지는 미래의 발견을 가로막고 그럼으로써 그 벽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 p.60 우리는 항상 자연 그 자체가 무엇을 하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자연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말하는 데에 그치게 된다. 우리가 안개상자 속에서 전자의 경로를 보는 까닭은 입자들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연속으로 이동한다고 우리의 이론이 일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연속성은 전자의 실재를 구성하는 일부가 아니라 우리의 실재를 구성하는 일부일 수 있다. --- p.252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하거나 지켜보고 있으면 양자 냄비가 끓지 않는 경우처럼 위와 같은 결과가 역설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간단하다. 우리가 실재에 대한 기대─실재는 단일하고 지속적이고 안정적이리라는 기대─를, 시공간상 다른 점들을 연결하는 것일 뿐인 관찰에 투사하기 때문이다. --- p.256 우리의 자유, 그리고 우리가 내리는 선택에 대한 책임은 우리의 물질적 존재 안에서 찾아야 할 것도 아니고, 그 존재에 매이지 않은 유령 같은 실체도 아니다. 자유와 책임은 다르게 선택했을 경우를 상상할 줄 아는 존재의 필수적인 가정이자, 지금 이 삶을 여러 갈래의 길 중 내가 선택한 하나의 길로 이해할 수 있는 조건이다. --- p.367 우리 주위에는 무의식적인 편향이 넘쳐난다. 일례로 로벨리가 형이상학적 편견이라고 명명한 것이 있다. 실재가 바깥에, 우리와의 상호작용과 독립해서 존재하며, 그 존재 방식이 지구 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의 삶과 일치한다는 믿음이다. 공간상 펼쳐져 있고 시간상 연속적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 믿음, 세계가 우리의 예상과 일치하기를 바라는 이 욕구는 대단히 강해서 그것을 뒷받침하기만 하면 어떤 구성 개념도 무모하지 않다고 본다. --- p.372 |
세계는 파편화된 인식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통합하는 “나”가 있다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천사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이다 여기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가 있다. 그는 자신이 겪은 모든 순간의 모든 장면을 이파리 한 장까지 정확하게 기억하지만, 이 순간을 다음 순간과 연결하지 못한다. 하루를 회상하는 데에는 또다른 하루가 꼬박 걸리며, 한 마리 개의 앞얼굴과 옆얼굴은 같은 개체의 것으로 인지되지 않는다. 보르헤스의 소설 「기억력의 천재 푸네스」는 이처럼 감각 세계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지각하지만 그것을 선별하고 조합하지 못하는 인물 푸네스를 통해 “자아”와 “실재”의 관계에 대해서 묻는다. ‘만일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시공간의 편린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실재를 탐구할 수 있는가?’ 이는 시공간상으로 통일된 “자아”를 발견한 칸트의 철학과 연결된다. 세계는 실제로 푸네스의 세상처럼 단절되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통일된 자아를 통해서 그것들을 인과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 즉 자아는 그 자체로는 경험할 수 없지만,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자아를 통해서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러 명제 중 우리의 상식에 부합하는 것만을 취해서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칸트는 이처럼 우리가 이해한 방식을 세계 그 자체라고 생각할 때, 우리가 우상을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 그로부터 100여 년 뒤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발견했을 때 그것이 불러온 반발 또한 우리가 시공간을 통해 총체적인 실재를 파악할 수 있다고 가정한 결과였다. 시공간의 연속성을 가정한 고전물리학과 달리, 양자의 세계에는 불연속성과 단절만이 존재했다. 전자는 중간에 여행한 흔적도 없이 새로운 궤도에 나타났고, 탐지될 때까지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다가 탐지된 순간에야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를 “결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전적인 과학의 세계관을 뿌리째 뒤흔드는 그 세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시공간상 2개의 다른 순간을 연결하는 일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묘사하는 물리법칙이란 물체가 어떻게 운동하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관찰하는가에 관한 법칙이라고 보았다. 실재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으며, 우리는 그것에 우리 나름의 자아를 투사함으로써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른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관계”로 이루어진 실재 하이젠베르크, 칸트, 보르헤스는 총체적인 실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절대적인 존재 혹은 원인 없는 자연발생을 가정하는 대신 그 자리에 “관계”를 놓았다. 그들에 따르면 세계를 감각하고 그것을 연결하는 “나(관찰자)”를 비롯한 모든 실체의 본성은 관계로서만 존재한다. 세 명의 천재 중에서 최고의 존재, 즉 시공간의 연속성을 부정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에 직면했던 사람은 단연 하이젠베르크일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 아인슈타인과 지속적으로 논쟁하면서, 관찰 행위와 그 정보들을 연결하는 노력 너머에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실재가 존재한다는 가정을 기꺼이 무시했다. 그는 시공간 속의 물체가 항상 다른 물체와 관계를 맺으며, 관찰자는 그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존재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최고의 존재가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준점으로 삼아야 할까? 칸트는 삼각형의 정의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삼각형을 우리가 볼 수 없듯이, 핵심적인 인간 지식은 감각 세계와 무관해야 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알려고 하는 것은 객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대신 관찰 대상들 사이에 관계를 맺음으로써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술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가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물질세계가 전체적으로 통합되어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실재를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을 가정해야 한다는 칸트의 생각은 보르헤스가 소설 「알레프」에서 보여준 “영원성”의 탐구와 연결된다. 우리는 시간에 얽매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우리 내면의 어떤 것은 회상과 기억 등을 통해 시간성을 벗어난다. 그런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를 탐구하기 위해서 보르헤스는 죽은 연인의 집 지하실 속에 “알레프”라는 작은 원반이 있고, 그 안에 우주가 숨겨져 있다고 상상했다. 소설 속에서 “알레프”는 사랑과 상실을 경험한 주인공에게 끝없는 우주를 펼쳐 보이면서 우리의 자아가 어떤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영원성”과 같은 궁극적인 개념을 가정해야 함을 보여준다. 비록 인간이 영원성을 고찰할 수는 없지만, 흘러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가 존재해야만 그것들을 모음으로써 우리가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매혹적인 세 천재의 삶이 던지는 질문 칸트와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최고의 업적을 남긴 천재들이지만, 그들에게는 각기 크고 작은 인생의 흠이 있었다. 보르헤스는 칠레의 군사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하이젠베르크는 나치에 속해 핵분열을 연구했다. 칸트는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지만, 국가의 검열 앞에서 굴복하며 스스로의 논리를 어겼다. 자신의 잘못(혹은 실수)을 부정하거나 후회하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와 책임이라는 오래된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삶의 길을 자유롭게 선택할까, 아니면 우리의 모든 선택이 물리적 세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자유의지의 존재 여부를 묻는 질문은 시공간에 예속되지 않은 위치를 가정하는 맹점을 지닌다. 자유의지가 실제로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초월적인 존재든, 입자 수준에서부터 축적된 거대한 우주든 시공간을 벗어난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인지를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으며, 따라서 책임도 질 수 없다. 저자 윌리엄 에긴턴은 시공간 바깥에 절대적인 무엇인가를 가정하는 대신, 우리 앞에 놓인 세계가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의 출발점이며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 자유의지라고 말한다. 우리는 시공간의 물리적 존재인 동시에, 여러 가능성을 시각화하고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이성적인 행위자이다.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자유의지는 이성의 필요조건이다. 선택에 대한 책임 역시 여기에서 비롯된다. 보르헤스의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은 잘못된 선택에 대한 후회의 궤적을 보여준다. 한 가지 가능성을 선택하면 다른 가능성은 사라지는 현실과 달리, 보르헤스는 자기 선택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했을 경우를 상상하며 무한히 증식하는 길들을 그렸다. 이처럼 모든 가능성이 실현된다면 우리는 어느 쪽에도 책임을 지거나 공을 내세울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가능성이 실현되는 순간 우리에게는 선택할 자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경우 행위자는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즉 자유와 책임은 다르게 선택했을 경우를 상상할 줄 아는 이성적 존재의 필수적인 가정이자, 여러 갈래 중 내가 이 길을 선택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지난 선택에 대한 이해는 실재를 헤아리는 인간의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지나간 일에 영향을 주었을 요소들을 선별하고 조합함으로써 그것을 하나의 줄거리로 완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치에 속해 핵분열을 연구한 하이젠베르크의 선택은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를 던져준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과 자신의 연구팀이 핵무기를 만들 기술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것을 무기 생산에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독일 과학자들을 취조했던 네덜란드 출신의 물리학자 사무엘 구드스미트는 그들이 자발적으로 나치에 봉사했다고 보았다. 어느 쪽이든, 오늘날의 우리는 그의 선택에 다양한 인과관계를 부여하고 그것을 필연처럼 만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은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앎과 무관하게 벌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판단은 그 자체로 어떤 도덕적 가치를 띤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치의 손에 가족을 잃었으면서도 끝내 하이젠베르크를 용서하기로 선택한 구드스미트의 모습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보르헤스는 소설 「바벨의 도서관」에서 우주보다 크지만 유한한 공간을 상상하며 그 공간의 중심에 바로 “당신”이 있다고 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칸트의 철학 역시 광대한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보았다. 모든 실체는 결국 그것들을 선별하고 연결 짓는 “관계”로서만 존재한다. 이 책은 물리학과 철학, 문학을 가로지르며,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때 우리가 확고한 편견에서 벗어나 이성의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듯 우리의 세계가 “천사들의 엄격함”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엄격함을 따르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 불확실성 속에서 또다른 무엇인가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
보르헤스의 소설에서 제목을 따온 이 책은 위대한 세 지성의 생각, 아이디어, 발견을 놀랍도록 훌륭하게 엮어낸다. 에긴턴은 얽히고설킨 수많은 주장과 명제를 꼼꼼히 살피며, 스스로도 그 못지않게 흥미진진하고 도발적이다. - 「월 스트리트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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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고 지적인 책. 윌리엄 에긴턴은 물리학, 형이상학, 문학의 역설들이 눈에 보이는 세계의 한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가능성을 어떻게 빚어내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 역설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반전시킨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예술과 과학을 결합해서 참을성 있게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최선의 인문주의적 탐구임을 깨우치게 된다. - 「뉴요커(The New Yo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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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인 성찰! - 카를로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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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긴턴은 가장 대담한 한계 이론가인 보르헤스, 칸트, 하이젠베르크 사이에 강력한 연결고리를 만들어낸다. 결국 우리는 실재라고 하는 그 손에 잡히지 않는 원천을 우리 인간이 얼마나 많이 거머쥘 수 있는가에 경이를 금치 못하게 된다. - 숀 캐럴 (『우주의 가장 위대한 생각들』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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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는 실재를 설명하고자 하고, 시인은 실재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어루만지며, 철학자는 지적인 연결을 짓고자 노력한다. 이 모든 노력이 불확실성에 시달린다. 하이젠베르크, 보르헤스, 칸트는 이 불확실성과 평생 씨름했다. 에긴턴은 눈부신 여정으로 우리를 초대해서 그들의 지적 궤도에 뒤엉켜 있는 교묘하고 매혹적인 미로를 헤치고 나간다. - 마리오 리비오 (『호기심의 탄생』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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