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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스크린은 서로를 바라본다
괜찮아, 목요일에 다시 들를게 B! D! F! W! 나, 슈프림 베티 블루 해저생활 자가 수술을 위한 구부러진 공간에서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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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소설 비슷한 걸 쓰고 싶은데 마땅한 소재가 없었다. 친한 동료 작가에게 무서운 이야깃거리 없냐고 물었다. 동료는 잠깐 고민하더니 곤지암에서 살던 어릴 때 이야기를 들려줬다. 자기는 기억이 안 나는데 윗집에 갓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 살았단다. 어머니는 신이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무당이 특히 용하다는 얘기를 듣고 점을 봤다. 아이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했던 것이다. 무당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 자식은 커서 소설가가 될 거라고 말했단다. 그때만 해도 동료 작가는 가나다도 제대로 모르는 유치원생이었는데 말이다.
“소름 돋네요.” 내가 말했다. “어떻게 맞힌 걸까요?” 동료 작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이 이야기를 며칠 전에 어머니에게 처음 들었다고 했다. “엄마도 무서웠대요. 하나뿐인 애가 진짜 소설가가 될까봐. 그래서 삼십년 동안 말 안 했는데 이젠 별 수 없으니까 말한다고 하시더라구요.” “아.” 동료는 이 이야기에서 무서운 건 무당이 아니라 어머니인 것 같다고 했다. “자식이 등단하고 책까지 냈는데 말 안 하고 수년을 버티신 거잖아요.” ---「우리의 스크린은 서로를 바라본다」중에서 JS가 나를 자신의 아들과 동류로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JS는 나를 아들로 착각했다. 그가 벨을 눌렀을 때 내가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JS는 “잘 있었냐”고 하더니, 영문을 모르고 있는 내 손을 잡고 집에 가자고 말했다. 그의 손은 땀으로 흥건했고 시퍼렇게 물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조 칩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 칩은 잠깐 나갔어요.” “헛소리는 집어치워.” JS가 말했다. “어서 가자.” “죄송한데, 저는 윤이 친구고요, 윤이는 조금 이따 들어올 거예요.” 나는 조 칩을 윤으로 바꿔 말했다. 그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니가 지금 여기 있는데 무슨 소리냐.” “저는 아드님이 아니라 친구예요.” “너희 엄마가 많이 아프다. 너는 그걸 알아야 돼.” “아, 그러면 제가 윤이 찾아올게요.” ---「괜찮아, 목요일에 다시 들를게」중에서 아기를 진짜로 죽여야겠어. 진양이 말했다. 뭐? 잠꼬대라도 하는 거야? 내가 말했다. 내가 아기를 진짜로 죽일 테니까 니가 그걸 찍어. 진양이 붉게 충혈된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진양은 진심이었다. 우리가 충분히 급진적일 수 있을 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건 범죄야. 1983년, 카를 카르스텐스가 독일연방공화국에 핵무기를 설치하려고 했을 때 귄터 안더스는 이렇게 썼어. “현실은 시작되어야만 한다.” 진양은 영화에서 현실이 시작된다고 믿었다. 그게 진양의 리얼리즘이었다. 그렇다고 아기를 죽여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B! D! F! W!」중에서 그날 밤, 차코이 마을을 떠나는 보트 위에서 또또는 해안가의 풀숲 사이에 피워놓은 횃불을 보았다. 그건 보트가 올 방향을 알려주기 위해 켜져 있는 거라고 누군가 알려줬다. 또는 그건 꿈에서 본 것이지 현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마약 성분의 구름이 밤의 강 위를 떠돈다. 보트의 짐백에는 또또와 59가 쓸 무기가 가득하다. 또또는 자신이 너무 멀리 왔음을 깨닫는다. 모든 일이 너무 쉽거나 너무 어렵다. 트랑킬로, 아미고. 진정해라, 친구야. 하람베의 얼굴을 한 앵무새가 말한다. 인간의 언어는 죽은 언어이니 언어를 살아 있게 하라. 부서지고 조악한 언어들로,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언어들로, 끝없이 반향하는 언어의 그림자로 가득하게 하라. ---「나, 슈프림」중에서 병원에서 전화가 와 베티 아줌마를 데려가라고 했다.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우야노,라는 감탄사 비슷한 의문문을 반복하는 것밖에 없었다. 간호사인 듯한 상대방은 어머니를 다그쳤다.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모른 척하시면 안 돼요.” “우야노.” “환자 분이 유일하게 기댈 분인데 그러시면 안 되죠.” 그러니 어머니가 전화를 끊고 나에게 구조요청을 한 건 당연한 일이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그렇다고 베티 아줌마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올 생각은 없었다. 베티 아줌마에겐 멀쩡한 집이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 집은 전혀 멀쩡하지 않았다. 베티 아줌마의 말에 따르면 벽이 말을 건단다. ---「베티 블루」중에서 블룸 앤 블룸 L.P.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더 대단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문장은 블룸타워 로비의 우주비행선 모양의 모니터에서 24시간 쉬지 않고 번쩍거린다. 하지만 직원이라면 누구나 진짜 모토가 뭔지안다. ‘남의 돈으로 내 일을 하자.’ 나는 블룸 앤 블룸의 진짜 모토가 마음에 들었다. 가난한 부모를 둔 아시아계 미국인이 성공할 수 방법이 그것 말고 어디 있을까. 오리엔테이션 첫날 간부급인 사십대 후반의 백인 남성이 연단에 올라 전통에 따라 소리쳤다. “쇼 미 더 머니!” 그의 선창에 따라 명문대 출신 머저리들이 소리쳤다. “쇼 미 더……”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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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천외한 사건들, 유별난 인물들
정지돈이 직조해내는 우리 곁의 특별한 세계 「우리의 스크린은 서로를 바라본다」는 연인 사이가 아니면서도 일년간 동거생활을 한 적 있는 ‘나’와 안젤라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신체절단애호증이라는 기묘한 정신질환을 앓는 안젤라가 어느 날 ‘나’의 노트북에 있을 자기가 쓴 글을 돌려달라며 연락을 해 온다. 그리고 나는 안젤라와의 추억들을 되짚어나가기 시작한다. 연애감정 비슷한 마음을 느끼며 나는 안젤라의 연락을 기다리지만 그 이후로 안젤라는 연락이 없다. 그리고 파일이 담긴 외장하드를 받기 위해 나타난 것은 안젤라의 친구인데, 그와의 불편한 한때가 기묘한 웃음을 자아낸다. 「괜찮아, 목요일에 다시 들를게」에는 화자와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조 칩’이 등장한다.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조 칩은 어느 순간 인생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일인 밴드를 결성해 알 수 없는 기계음을 음악이라고 만드는 조 칩, 그가 변한 원인은 그의 아버지 JS 때문이다. 성공적인 치과의사였던 JS는 알코올중독으로 정신이 파괴되었다. 십수년 이상 아들과 왕래가 없던 JS는 어느 날 조 칩을 찾아나선다. 이윽고 만난 둘 사이에서 펼쳐지는 대화는 끊임없이 어긋난다. 한편의 부조리극을 연상시키는 이들의 만남이 선사하는 유머가 맛깔스럽다. 「B! D! F! W!」는 예술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는 ‘나’가 ‘진양’의 졸업영화 조연출을 맡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얌전하기로 소문 난 진양은 졸업작품으로 입에도 담기 힘든 험악한 시나리오를 가져와 엄청난 비난을 받는다. 전설의 ‘촬영감독’까지 합류해 제작을 시작한 영화는 중간중간 삐걱거린다. 결국 진짜 범죄를 결심하는 진양과 이를 막기 위해 뛰어다니는 나의 좌충우돌이 벌어지는 등 소동 끝에 촬영은 마무리된다. 이 한바탕 소동이 남기는 폭소는 예술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맞물리며 독자의 마음과 공명하게 된다. 때로는 웃음 가득하게, 때로는 긴장감 넘치게 팔색조 같은 매력으로 무장한 소설집 「나, 슈프림」은 ‘나’가 우연히 어느 블로그를 발견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블로그의 주인은 유년시절 친구 ‘또또’. 그의 블로그에는 방대한 관심사가 펼쳐져 있으나 그 가운데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이야기들이 유독 눈에 띈다. 일찍 컴퓨터를 접한 또또는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활동해왔고, 2015년 나무위키 설립 당시에는 가장 활발한 기여자였다. 또또는 나무위키가 더 발전하는 데 운영진이 걸림돌이라 판단해 그들을 ‘처리하러’ 나무위키의 본사가 있는 파라과이로 향한다. 동행인 59와 함께 권총까지 구입한 또또는 강도사건에 휘말리는데, 여기서 한바탕 전투가 펼쳐진다. 이 전투 끝에 남는 여운과 미스터리가 인상적이다. 이 소설에는 또또의 블로그 글 형식으로 다양한 텍스트가 병렬되어 있는데, 한국사회에 대한 통찰이 인상적일뿐더러 정지돈식 유머로 단단하게 무장되어 있다. 「베티 블루」는 유년 시절 ‘나’의 아버지와 바람을 피운 베티 아줌마가 길에서 쓰러져 발견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바람’ 사건 이후 베티 아줌마와 나의 어머니는 절친한 친구가 된다. 베티 아줌마가 보호자로 지목한 것도 어머니다. 병원에서 나온 베티 아줌마는 벽이 말을 건다는 둥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섬뜩한 미스터리 같은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이윽고 충격적인 반전이 펼쳐지는데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독자의 숨을 붙드는 작품이다. 「해저생활」은 대구에서 살았던 ‘나’가 펼쳐내는 유년시절의 기록이다. 학교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 주인공은 ‘수성하와이’라는 목욕탕의 온탕 안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윗집에는 조폭으로 알려진 ‘석이 아저씨’가 살고 있는데 그도 단골이다. 어느 날 수성하와이에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사람이 나타나는데, 자세히 보니 야구선수 양준혁이다. 양준혁과 ‘나’가 나누는 대화, 그리고 석이 아저씨와 양준혁 사이에서 벌어지는 시트콤 같은 한 장면이 독자를 폭소로 이끈다. 「자가 수술을 위한 구부러진 공간에서」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아무 일 없는 일상이 이어지던 어느 날, ‘블랙아웃’이라 불리는 700여일간의 거대한 정전이 지구를 강타하고 인류는 멸망의 위협을 겪는다. 그 이후 선지자로 부각된 것인 ‘배리 보바’,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블랙아웃 전에는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으나 블랙아웃을 예견한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점점 늘어난다. 배리 보바는 자신의 뇌를 개조해 인류가 언어를 넘어 소통하는 수술을 창안하는데, 이윽고 그 수술을 생중계하기에 이른다.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는 챗GPT와 함께 쓴 소설이다. 작가가 시놉시스를 끊임없이 제안하고, 챗GPT와 작가가 번갈아 문장을 작성하는 식으로 쓰였다. ‘블룸 앤 블룸’이라는 회사와, 그 건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버라이어티한 전개가 인상적이다. 작품 창작 후기인 에세이 「인공신경망과 함께한 일주일」도 일독을 권한다. 『인생 연구』는 여덟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었지만 책 전체를 읽고 나면 각각이 하나의 조각처럼 거대한 상을 이룬다. 이 상은 읽는 이의 경험에 따라 저마다 달리 재구성되는데 이러한 놀라운 독서는 정지돈의 서사만이 줄 수 있는 경험이다. 작가는 이번 책을 펴내며 “『인생 연구』에 등장하는 인물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건 이들이 익숙하지 않은 어떤 종류의 만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고 비인간적이라고 생각되는 이런 만남은 그러나 우리가 크고 변화하는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한다”라고 썼다. 우리가 속한 세계를 더듬어보는 작업(독서)이 이토록 즐겁고 유쾌할 수 있다니. 그런 의미에서 『인생 연구』는 작가에게도, 또 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도 자그마한 변곡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출발하기 위해 여기에 있다.” 작가의 말 『인생 연구』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건 이들이 익숙하지 않은 어떤 종류의 만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고 비인간적이라고 생각되는 이런 만남은 그러나 우리가 크고 변화하는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한다. 고정된 가치를 지키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매순간 생성되는 낯선 세계 속에서 윤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지키는 일은 새로운 차원의 도전을 요구한다. 우리는 그러한 순간에 와 있다. 우리는 출발하기 위해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