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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장 겸산 선생과 초동서사 삼태산과 오봉산 사이의 ‘초동서사’ 조선의 마지막 선비 아호와 당호, 학문에 대한 선비들의 태도 아버지의 교육철학 2장 서당에서 배우는 것들 서당에서 처음 만난 책들 서당의 아침공부 서당체와 자신만의 책 독서백편의자현, 문리와 문안 총강, 꼴찌가 없는 평가 한시 짓기는 학문의 기본기 관주와 작대기, 시는 평이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난자집, 배운 내용을 돌아봄 책거리와 소박한 일탈 3장 서당, 끝없는 공부의 길 아버지의 권유 또 다른 공부 ‘시간표’ 없는 서당공부 동양의 사유와 서당의 공간 스승과 제자, 상호선택의 관계 상호보완적 학습관계 4장 교학敎學, 오래된 인문학의 가르침과 배움 가르침, 도의 초대 배움, 위기지학의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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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은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과거의 유산임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교육시스템에 비추어 보면 서당은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방법이란 답답하기 짝이 없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굳이 ‘서당’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일종의 ‘애례존양’의 마음에서입니다. 이미 없어져버린 ‘서당’을 통해 그 안에 스며있는 소중한 가치를 음미하고, 그러한 가치를 통해 오늘 우리가 직면한 문제 상황에 새로운 해결의 단초를 찾아보고자 함입니다. 고대의 예가 곧 오늘의 문제 상황을 곧바로 해결해주지는 못하겠지만, 그 예에 담긴 진정한 의미 속에서 우리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결코 희생되는 양 한 마리가 아깝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 p.9) 큰댁이 있는 순천에서 서당을 다녔던 형은 설날이 되어서야 서울 집으로 올라와 보름 남짓 지내다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오랜만에 한 번씩 보던 형과 줄곧 함께 지내면서 공부하게 된다는 사실에 저는 신났습니다. 그것이 엄마를 떠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채 말입니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저는 학교가 아닌 서당을 선택했고, 서당은 그렇게 운명처럼 제게 다가왔습니다. (/ p.34) ‘면추’라는 서당의 붓글씨 기준은 붓글씨가 반드시 예술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붓글씨는 아무렇게 써도 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예술의 경지는 아닐지라도 추해서 보기 싫을 정도는 아닌 글씨, 잘 쓰지는 못했어도 함부로 쓰지 않은 글씨, 그것은 곧 반듯한 글씨입니다. 한 획, 한 획, 정성껏 써내려가서 글씨를 쓰는 반듯한 정신이 담긴 글씨, 그것이 곧 서당의 ‘면추’가 지향하는 글씨입니다. (/ pp.54~55) 우리가 글을 만날 때, 우리가 글을 읽어내야지, 글이 우리에게 맞출 수는 없는 법이지요. 특히 글이 먼저 있었고 문법은 그 글을 읽기 위해 고안된 틀에 불과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문법으로 글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글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본다면, ‘같은 형태의 글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해석되어야 하는 곳에서는 이렇게 해석하고, 저렇게 해석되어야 하는 곳에서는 저렇게 해석하는 것’이 맞는 것이지요. 서당의 문리는 바로 그 결을 읽어내고 느낄 줄 아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서당에서는 날마다 100번씩을 읽고 암송하고, 그 글들을 다시 ‘밑글’이라 부르며 또 암송하는 것입니다. (/ pp.67~68) 날이 더운지 추운지도 모르고, 꽃이 피는지 지는지도 모른 채,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무엇인가를 하염없이 머릿속에 저장했지만 그 과정이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5년간의 입시준비 기간 동안 수없이 많은 것들을 암기했지만, 그중 어떤 것도 제 자신을 성찰하게 하거나 제 마음을 충만하게 해주는 것은 없었습니다. 저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제 몸이 아팠던 것도 단순히 소음이나 공해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제 몸이 이런 방식의 공부를 견뎌내지 못해 아팠다는 것을 저는 대학에 들어와서야 알았습니다. (/ p.118) 옛사람들은 사람의 모습을 한다고 해서 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우리들이 사는 세상 역시 다 같은 세상이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람도 사람다울 때 사람인 것이고, 세상도 세상다울 때 세상이라 보았습니다. 그 ‘~다움’의 내용, 즉 어떤 것을 어떤 것일 수 있도록 하는 길에 해당하는 것이 말하자면 ‘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존재로서 나에게 그 ‘도’는 무엇보다 절실한 것입니다. 그 ‘도’를 알고 그 ‘도’를 실천했을 때 비로소 나는 진정한 사람이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소중한 ‘도’를 내게 전해줄 수 있는 분을 나는 스승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 p.158) [논어]를 비롯한 동양의 많은 고전들은 대나무를 쪼개서 손질한 죽간(竹簡)에 기록되었습니다. 대나무를 죽간으로 만드는 데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 정작 죽간에는 많은 내용을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은 기록하고 싶은 내용을 주절주절 소상하게 기록하지 못하고 핵심과 요점만 간추려서 그것도 압축적인 표현으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이 자료를 저장할 공간이 부족할 때 파일을 압축해서 저장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어]를 포함한 고대의 동양고전들을 일종의 압축파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저장 공간이 부족해서 파일을 압축하여 저장했다면, 그것을 다시 꺼내어 쓸 때는 파일을 풀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논어]를 포함한 고대의 동양고전들이 이미 기록하는 단계에서 핵심과 요점만 간추려서 압축적인 표현들로 기록해두었다면,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압축되어 있는 의미들을 푸는 것이 중요합니다. (/ pp.195~196) 배움을 통해 앎을 얻고, 그 앎으로 인해 나의 관점과 사유가 성장하고, 그 결과 성숙한 인격을 가진 내가 됩니다. 이것을 하나의 흐름이라고 할 때, 이 흐름의 전개양상을 잘 살펴보십시오. 배움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나서 나의 인격을 성숙시키기까지 이 흐름은 온전히 내 안에서만 흐르고 있습니다. 나를 벗어나지 않고 내 안에서 나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흐름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나를 위한 배움’입니다. (/ pp.217~218) ‘남을 위한 배움’은 반드시 남의 평가에 의해서만 그 가치가 결정된다고 믿습니다. 바꿔 말하면,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서 뛰어난 지식을 취득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면 그 배움은 가치가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 배움의 결과가 이렇게 귀결되고 만다면, 그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불만과 노여움뿐일 것입니다. 이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을 포함해 세상 모두를 원망하며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품으로서의 자신의 지식을 ‘떨이’의 방식으로 파는 것입니다. 이 두 번째 방식이 바로 ‘곡학아세(曲學阿世)’입니다. 즉, 배움을 왜곡하고 세상에 아부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세상의 눈길을 끌어보겠다고 자신이 배운 학문의 본질 정신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방법이든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했던 배움은 남이 알아주지 않았을 때 자신도 파괴하고 세상도 병들게 합니다.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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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훈장 한재훈이 전해주는 생생한 서당공부의 풍경
옛공부에서 길어 낸 참공부의 길 서당공부를 통해 오늘과 미래를 비쳐주는 배움의 길을 찾다 학동들은 낭랑한 목소리로 글을 읽고, 훈장님이 회초리를 든 서당 풍경은 옛그림의 한 장면으로 우리 머릿속에 아로새겨져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서당에서 어떠한 공부를 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서당공부의 ‘혜택’을 듬뿍 받은 저자는 서당의 커리큘럼, 일과, 평가 등을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막연하고 멀게만 느껴지는 서당공부의 의미를 지금여기로 뚜렷하게 소환해낸다. 끊임없이 글을 외면서 그 뜻을 깊게 이해하는 문리와 문안을 터득해간다. 처음 공부하는[사자소학]을 통해 부모, 형제, 스승, 벗들과 관계윤리의 기본을 배우고,[추구]를 통해서는 세상만물의 이치를 깨우쳐간다. 어렵게 시를 지으면서 학문의 기본기를 다지고 세상에 대한 관찰을 심화시켜간다. 서로 선택한 사제와 서로 돕는 학동과 관계는 인간관계의 근본적 태도를 함양케 한다. 이처럼 이 책은 서당공부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절실한 인문학의 정수에 해당된다는 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서당공부는 더 이상 한물간 낡은 것이 아닌 현재에 생생하게 깃든 소중한 유산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서당공부에서 진정한 인문학의 길을 찾다 서당의 풍경은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우리는 정작 서당에서 어떻게 공부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이 책의 저자 한재훈은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입학통지서를 받은 일곱 살, 서울의 학교가 아닌 시골의 ‘서당’으로 내려가 15년 동안 한학을 공부했다. 그런 저자가 몸소 체험한 서당의 커리큘럼, 일과, 평가 등을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막연하고 멀게만 느껴지는 서당공부의 의미를 지금여기로 뚜렷하게 불러낸다. 그럼으로써 저자는 서당공부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절실한 인문학의 정수에 해당된다는 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서당공부는 더 이상 한물간 낡은 것이 아닌 현재에 생생하게 깃든 소중한 유산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1장 겸산 선생과 초동서사]에서는 저자가 공부했던 서당과 스승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조선의 마지막 선비 겸산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초동서사를 마련한 이야기는 현대까지 이어진 옛배움의 사연을 소상히 전해준다. 아울러 또 저자 자신이 어떻게 서당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는지 잘 이야기해준다.[2장 서당에서 배우는 것들]에서는 서당에서 구체적으로 공부하는 내용을 다룬다. 서당에서 처음 공부하는[사자소학]과[추구]를 통해 인간관계의 윤리와 자연의 이치를 배운다. 소박한 서당체를 연마하고 직접 책을 필사해 자신만의 소중한 책을 만들어간다. 또 운자와 성조에 맞추어 어렵게 시를 지우면서 배움의 기초를 튼실히 다져간다. 암송을 통해 글의 뜻을 깊게 이해하는 과정은 우리의 옛배움에서 진정한 인문학 가치가 깃들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3장 서당, 끝없는 공부의 길]에서 현대학문을 하게 된 사연과 힘겨웠던 과정을 이야기한다. 서당공부를 쭉하다 검정교시와 입시를 치르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한 저자는 서당교육의 시선으로 현대학문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저자의 날카로운 지적과 혜안은 현대학문의 문제점을 극복할 대안교육의 가치를 제시해준다.[4장 교학敎學, 오래된 인문학의 가르침과 배움]에서는 가르침의 요체는 도(道)를 안내하는 것이요, 배움의 요체는 ‘위기지학’의 길임을 이야기한다. 공자와 퇴계 등을 통해 스승이 어떻게 제자들에게 지극 정성으로 도(道)를 전수하려 했는가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아울러 배움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전통 교학의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다. 서당, 끝없는 공부의 길 21세기 훈장 한재훈이 전해주는 생생한 서당의 풍경 김홍도의 [서당도]를 비롯해 우리에게 전해지는 서당의 풍경은 매우 익숙하지만 서당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공부하고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남들이 다 들어가는 초등학교 대신 서당으로 들어가 전통교육을 받은 저자 한재훈은 우리에게 서당공부의 생생한 풍경을 전해준다. 저자의 아버지에게 "교육은 한 사람을 ‘된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이에 적합한 곳이 서당이었다. 이런 교육철학 때문에 저자의 형제들은 모두 서당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저자는 주위에서는 자식들을 다 서당에 보내 공부시키는 것을 만류했다는 점을 고백한다. 하지만 서당을 하나의 소중한 운명으로 여긴 한재훈은 스스로를 "전통서당의 마지막 은혜를 입은 한 사람의 후예"라고 한다. 이에 서당에서 직접 공부하고 경험한 것을 소중하게 남길 책무로 이 책을 썼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책은 사라져가는 옛교육에 대한 보고서의 성격을 갖는다. 하지만 그저 사실을 기술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 안에서 현재에도 되살리고 길어 낼 참공부의 길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서당에서는 가정 먼저[사자소학]으로 공부를 시작한다. 글공부의 시작은 앞으로 쌓아갈 지식의 올바른 방향을 잡고, 몸이 올바른 방식을 자연스러워하도록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관계윤리를 중시하는 전통교육의 마중물 역할을 한다. 이어 배우는[추구]는 주변사물들의 이름과 그것들의 상태, 사물과 자연의 이치를 다룬다. 우리 전통교육이 어떠한 바탕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커리큘럼에서도 여실히 보여주는 셈이다. 또 우리의 상식으로는 서당 하면[천자문]과[명심보감]을 많이 연상하는데 실제로는 많이 익히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글공부가 한 단계 질적 도약을 할 무렵[소학]을 배우기 시작한다.[소학]은 여러 면에서 이전의 교재와 많은 차이가 있는데, 훨씬 구체화되고 심화된 윤리적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이 책을 공부한 뒤 본격적으로 사서삼경을 배우기 시작한다. 서당공부의 백미는 무엇보다 글 읽기, 암송에 있다. 퇴계의 제자 김성일은[퇴계선생언행록]에서 "닭이 울면 일어나셔서 반드시 장중한 목소리로 글을 한동안 외우셨다"고 적는다. 이처럼 서당의 하루는 글을 암송하면서 시작한다. 서당의 학도들은 매일매일 새로운 글을 배워서 백 번 정도 읽고 외우게 된다. ‘독서백편의자현’은 글을 지속적으로 반복해 읽고 암송함으로써 글의 섬세한 결을 느끼고 글이 담은 깊은 뜻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를 "문리가 났다" "문리가 트였다" "문안이 뜨였다"고 표현한다. 글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이 마음에 남아 각자의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쳐야 한다. 이처럼 배운 바를 완벽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익힘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서당의 붓글씨는 화려하지 않지만 정성스럽고 써내려간다. 소박한 서당체는 글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 더욱 힘을 쏟는다. 이런 서당체로 책 하나를 그대로 필사함으로써 자신만의 책을 만들어간다. 또 암송했던 글을 붓글씨로 쓰는데 이를 일과를 쓴다고 한다. 이처럼 서당의 글 읽기와 글 쓰기는 온몸을 쓰는 배움의 과정으로서 끈기있게 배움을 체득해가게 해준다. 서당의 학동들을 고심하게 만드는 건 무엇보다 한시 짓기다. 오언과 칠언의 절구와 율시로 쓰는 한시는 운자와 성조를 고려해 써야 하기에 여간 힘들지 않다. 운자와 성조가 맞지 않아 기껏 구상했던 시를 포기하고 새로 구상해야 한다. 이처럼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운율이 있는 시적 표현으로 담아내는 시 짓기는 학문의 기본기를 다지는 과정이다. 스승은 제자의 시를 보고 잘된 부분에는 ‘관주’를 고쳐야 할 부분에는 ‘작대기’를 표시하면서 제자와 학문적 교감을 나눈다. 이처럼 서당의 풍성한 교육은 인간과 자연을 이해하는 전인적 인간을 양성하는 데 있다. 서당, ‘오래된 미래’의 참공부 서당을 통해 오늘의 교육을 돌아보다 저자는 15년 동안 서당교육을 받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현대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입시를 치르고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들어가 졸업 이후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저자는 이처럼 두루 전통교육과 현대교육을 거친 이색적인 경험을 갖고 있는데, 그로 인해 좀 더 넓은 안목으로 지금의 교육 전반을 조망해낸다. 저자는 시간표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이야기하는데, 저자가 보기에 시간표는 몰인정하고 야멸치다. 시간표는 이미 권력으로 작동해 학생들을 배움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반면 서당에서 분배된 시간은 대강의 울타일 뿐 완고한 담벼락은 아니며 대체로 자율적으로 편성된다고 한다. 또 서당에서 공부하는 내용은 자연의 조건에 맞게 변화를 주기 때문에 각 계절에 따라 일과가 조금씩 달라진다. 가령 여름에는 시문을 읽거나 한시 짓기에 주력하고, 겨울에는 글공부를 위주로 한다. 일반적인 현대의 학교는 동일한 연령대가 한 교실에서 통제되는 방식이다. 반면 서당의 공간배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구조로서 서로서로를 마주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구조다. 서당의 수업은 학교처럼 선생님 한 분이 수십 명의 학생을 향해 일시에 강의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 사람과 일대일로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게다가 여러 연령이 한 공간에서 공부를 하는데, 저자를 이를 ‘계단꼴’ 구성이라고 명명한다. ‘계단꼴’ 구성은 나이와 수학능력 사이의 조화로운 공존양상을 보여주며, 경쟁이 아닌 학도들간의 상호보완적 학습체계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고, 전통의 축적과 전승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다. 또 눈여겨봐야 할 것은 서당의 평가방식이다. 일반적인 학교에서 평가란 순위 매기기로서 경쟁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서당에서 훈장님 앞에서 배운 글을 외는 것을 ‘강을 해 바친다’고 한다. 이런 강은 하루 단위의 일강, 열흘 단위의 순강, 월 단위의 월강, 1년을 마무리하는 총강으로 나뉜다. 서당의 강은 석차를 산출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은데, 특히 총강에서는 장원을 가릴 뿐 꼴찌가 없기 때문에 축하는 있지만 좌절이 없는 축제의 장이 된다. 그런데 저자가 공부한 초동서사에서는 그날그날 밑글을 외는 정도였지 순강, 월강, 총강은 없었다고 한다. 이는 강이 학교의 시험과 본질적으로 다름에도 최소한의 타율적 구조가 공부에 개입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서당에서 공부한 것도 어떤 측면에서 보면 대안교육을 받은 셈"이라고 말한다. 사실 서당에서 이뤄지는 이런 교육과정에는 오늘날 교육의 여러 문제점도 돌아보게 하고 보완할 수 있는 측면을 보여준다. 비록 서당교육이 퇴조했지만 경쟁교육, 서열화 교육으로 심하게 굴절된 지금의 교육에 풍성한 대안적 가치를 제시해주는 것이다. 전통교육과 현대교육을 두루 거친 저자는 경계에 서서 그 지점을 적시해준다. 서당, 소중하게 되돌아봐야 할 인문학의 전통 전통교학을 통해 참된 가르침과 배움의 길을 돌아본다 교육을 ‘백년지대계’라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현대에 교육은 기능인을 양성하고 경쟁교육에 몰입하는 경향이 강하다. 전통교육에 담겨 있는 ‘가르침과 배움’의 자세를 들여다보면 지금 우리 교육에 대해 많은 것을 성찰하게 된다. 서당공부는 이러한 전통교육의 정수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전통교육에서 스승의 역할 즉 ‘가르침’의 핵심은 도(道)를 전해주는 것이다. 스승이 도를 전해준다는 건 아직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결정하지 못한 이들에게 삶에서 소중히 여겨야 할 가치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스승은 이처럼 도를 전수해주는 분이며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알게 되는 내용이 바로 도다. 스승으로 인해 그 도를 전수받음으로써 각자는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 저자가 예로 든 퇴계의 이야기는 도를 전수하는 스승이 스스로에게 엄격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퇴계는 세상을 떠나기 나흘 전에 제자들을 불러모아 "평소 그릇된 식견으로 제군들과 강론을 하였는데 이 또한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는 고백을 한다. 이는 당대 세계 최고 반열의 학자로서 최선을 다했음에도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누군가를 가르치면서도 스스로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으로, 스승은 단순하게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가르침과 배움이 자신 안에서 상호성장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저자는 배움에서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의미를 깊게 해석한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자신만을 위한 배움’으로 이기적 공부처럼 비쳐지기도 하며, 오히려 ‘남을 위한 배움’ ‘위인지학’이 긍정적으로 보여질지도 모른다. 배움을 통해 앎을 얻고, 그 앎으로 인해 나의 관점과 사유가 성장하고, 그 결과 성숙한 인격을 가진 내가 된다. 배움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나서부터 나의 인격을 성숙시키기까지 이 흐름은 온전히 내 안에서만 흐른다. 나를 벗어나지 않고 내 안에서 나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흐름, 이것이 바로 ‘위기지학’ 즉, ‘나를 위한 배움’이다. 반면 ‘위인지학(爲人之學)’에서 앎을 취득하는 이유와 앎을 활용하는 방법 그리고 앎을 통해 기대하는 결과는 현저히 달라진다. ‘남을 위한 배움’은 취득한 앎을 상품가치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활용하게 된다. 남의 평가에 연연하고 세상에 아부하게 되는 어떻게든 세상의 눈길을 끌어보겠다는 자신이 배운 학문의 본질정신을 왜곡하는 것으로 ‘곡학아세’로 귀결된다. 저자는 나를 철저히 변화시켰을 때 비로소 남에게도 그 배움의 영향이 미친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배움은 결코 남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고 세상에 이로움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배워서 남 주냐?’는 속담은 ‘나를 위한 배움’과 맞닿게 된다. 저자는 여기에 배움의 본질적 의미가 있다고 강력하게 역설한다. 이런 ‘가르침과 배움’의 자세는 사실 지금 위기에 처한 인문학의 핵심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서구의 문물이 질풍처럼 밀려들어와 많은 전통들이 뒤로 밀려났다. 가끔 전통은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하찮게 취급되곤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렸고 뒤늦게야 그에 따른 폐단들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21세기 훈장 한재훈은 생생한 서당공부의 경험을 통해 그 지점을 선명하게 보여주는데, 특히 서당공부가 우리의 소중한 ‘인문학적 전통’이었음을 일깨워준다. 이 책을 통해 ‘오래된 미래’의 공부로서 서당공부가 우리에게 생생하게 다가온다. 아울러 저자가 말했듯이 이 책은 "오늘 우리가 직면한 문제 상황에 새로운 해결의 단초"를 제시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