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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운명과의 대면
나의 외전外傳 사랑의 헌장 꽃길 허상 마약 같은 사랑 편린 클레오파트라의 뒷목 뜨거운 고독 안부라는 말 자화상 허상과 현실 코드레드Code Red 운명과의 대면 가벼움의 무게 소원과 향로向路 2부 밥그릇 경전 잊혀진 등대 벽을 넘어서 한낮에 대한 사고思考 당신의 일생 쓸쓸한 자리엔 고독이 남았는데 관계의 법칙 아르타 왕국의 추체험追體驗 밥그릇 경전 바람의 노래 내가 누구지? 밀담 모정母情의 노래 연가戀歌 준비됐어요 3부 닫아버린 것에 대하여 달콤한 유혹 닫아버린 것에 대하여 스키마 어떤 웃음 소리의 추억 주파수 참말일까 커트 리히터Kurt Richter의 법칙 실존 확인의 오류 군중群衆으로부터의 탈출 생각을 바꾸다 24년 만의 부산 성탄 송 뜨거운 소식 4부 자아의 승리를 위하여 작은 바램 위를 향하는 목마름 무욕無慾의 말씀 점과 끝 형용사 배달부 젖어드는 사랑 노래 버림의 미학 원초적 세상에서 길에 대한 다짐 괜찮은 비행법 자아의 승리를 위하여 간절함 밀착 명상 시인, 그 아득한 이름이여 디카시집 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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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떠날 이유는 당신에게 있었고
저 너머에 존재하지 않던 낙원 마침내 다다른 카프카의 문 드나들던, 닫아버린 내가 열어야 할. _ 「닫아버린 것에 대하여」 이 한 편의 작품으로도 최희남 시인의 수준을 바로 짐작할 수 있다. 마치 요즘의 대세인 미스트롯이나 미스터트롯에 나온 가수가 한 두 소절만 불러도 전문가는 바로 그 수준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관계에 관한 시인의 깊은 진술이 돋보인다. 카프카의 단편 소설 ‘법 앞에서’에 나오는 시골 사람은 ‘법의 문’에 다다랐으나 문지기는“아직은 안 돼”라며 못 들어가게 한다. 문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려도 문지기는 들어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곤 문을 닫으려고 한다. 항의하는 시골 사람에게 문지기는 말한다. “들어가면 또 다른 문이 있다”라고. 이 장면이 함의하는 진실은 인간의 모든 관계는 내가 만든 ‘문’들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 디카시는 바로 내가 문을 만들어 놓고 문지기를 세워 놓는다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 문은 ‘단절’을 전제한다. 실재하지 않은 위험에 지레 겁을 먹고는 “이 문을 열지 못하는 이유는 당신에게 있어”라고 한다. 우리가 그렇다. 내가 만들지 않았을 땐 서로 자유로울 수 있지만, 문을 만들고 문지기를 세워 놓음으로써 불신은 시작되고 기회는 사라지며 관계는 단절된다. 그 문은 내가 열어야 치유와 회복이 시작된다. 카프카의 ‘법 앞에서’는 ‘주체의 결핍’을 상징한다. 이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타자의 환대’를 제시한다. 시를 짓는 일이 바로 타자의 환대다. 관계는 환대를 통해서만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상대에게 바라는 바가 많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은 허상을 따라가는 일과도 같다는 울림을 독자에게 선사함으로써 시인의 철학적 사고를 드러낸다. 사진과 시적 언술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이 시집을 관류하는 ‘관계 회복의 시학’으로 불릴만한 수작이다. 꽃길만 걸을 수 없어요 눈앞의 유혹은 위험해요 우리의 길은 당신과 나의 몫 차근차근 뚜벅뚜벅 바른길 걸어 봐요 꿈꾸는 피안은 만들어 가는 거죠 _ 「꽃길 허상」 디카시는 영상이라는 빛 그림으로 아직 규정되지 않은 다양한 실체를 순간적 서정성으로 파헤치고 그것을 결합한 결과물로 한 편의 시가 완성된다. 좋은 디카시는 문자시의 작품성을 뛰어넘을 수 있으며 인간 정신세계의 진보에 기여한다. 많은 사람은 꽃길이 펼쳐지길 원하지만 그런 길은 허상에 이르는 유혹이라는 점을 이 시에서는 말하고 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차근차근 뚜벅뚜벅’ 만들고 걸어가야 한다. 그러한 방법이 진정한 피안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독자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다짐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보통 우리의 자아ego는 자존심으로 나타나는데 좀처럼 자기self에게 굴복하지 않으려고 한다. 있는 모습대로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을 ‘자기수용self acceptance’라고 한다. 시에서 때로는 자기수용도 필요하지만 자기를 새롭게 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요구된다. 따지고 보면 시 짓기는 객관적 이성과 호환되지 않은 주관적 자아를 통해서 자기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이 시의 사진이 곱다. 디카시에서 요구하는 사진의 수준은 전문가적인 작품성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누가 봐도 거부감이 없는 사진이 좋다. 그리고 대상을 넓게 잡은 구도full shot는 주제를 약화시킬 수 있으므로 선택과 집중구도closeup shot를 권장한다. 끝까지 가본 사람은 알아요 실패의 눈물 흘리며 바라보던 사방이 벽일 때 고개 들고 주먹 쥐면 그곳이 시작이었다는 걸요 _ 「점과 끝」 인간의 삶은 각본 없이 펼쳐지는 한 편의 소설과도 같다. 사람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기에 드라마틱하다. 살아가는 동안 성공이 계속 보장된다면야 얼마나 좋으련만 때때로 우리는 좌절과 환란, 극한의 상황에 몰리기도 한다. 저 풍광을 포착한 시인의 시선은 따뜻하다. ‘점’은 마침이나 끝을 뜻한다. 그러나 최희남 시인은 그곳이 시작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개를 들라고 한다. 위를 보라고 한다. 이런 철학적 사고는 일종의 본능적 반응이기도 하다. 사람의 생각이란 살아가는 용기를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다, 이 시적 언술은 자신에게 다짐하는 '생활철학'일 수도 있겠다. 실패했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에 도전해봤다는 말이고 또한 성공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실패를 견디고 배우면 앞으로 더 큰 도움이 될 것이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성공한다. 그러나 실패를 모르는 사람은 인생의 그늘이 없는 재미없는 인생이다. 허수아비 같은 몸에 불을 밝혀 쏟아지는 눈물 홀로 감당하시던 그 자리에만 계셔도 사무치는 맘 덜 했으리 만장輓章이 비처럼 내리는 밤 _ 「잊혀진 등대」 최 시인의 아버지는 오랜 투병 생활 끝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지금은 잊혀져 가는 아버지의 존재를 비를 맞으면서도 불을 밝히고 있는 가로등에서 떠올린다. “허수아비 같은 몸에 불을 밝혀/쏟아지는 눈물을 홀로 감당하시던” 아버지의 마음이 이제 어렴풋이 짐작된단다. 부모는 가정과 자식들을 위하여 온갖 노력과 희생을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을 땐 가슴으로 눈물을 흘린다. 마치 지금 내리는 비처럼 말이다. 그런 아버지, 지금 살아 계셨다면 “사무치는 맘 덜 했”겠다는 회한이 묻어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부모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봉황이라 자랑했지요 내 모습에 놀랬어요 밝음 앞에 녹아 없어질 병아리였어요 _ 「나의 외전外傳」 위 디카시는 웃음이 묻어나면서도 자기 성찰의 울림이 크다. 눈으로 만든 병아리 형상, 자기가 자기를 보지 못하면 자기도취에 빠지게 된다는 점을 잘 표현했다. 자신을 겸손하게 성찰하는 능력은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기도 한다. 자기의 분수를 모르고 교만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인정받기 힘들다. 겸손은 비굴함과는 다르다. 자기의 실체를 아는 사람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행동을 당당하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반면 비굴함이나 교만함은 실패의 선봉장이 된다. 비굴한 사람은 무시당하게 되고 교만한 사람은 아무리 포장 해도 밝은 빛 앞에선 다 드러난다. 마치 눈이 녹아 없어지듯 존재감의 소멸을 가져온다. 자신에 찬 행동, 떳떳한 행동은 ‘겸손’이라는 바탕에서 성공의 열매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인간사가 증명해 준다. 하이데거Heidegger는 “모든 예술의 본질은 시 짓기Dichtung와 같다,”라고 했다. 모든 예술의 으뜸에 시가 놓인다는 말과도 같다. 그래서 시인은, 높은 자의식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눈앞의 현상이 보편적인 사람의 것이라면, 현상에 감춰진 존재의 고요한 소리를 듣는 사람이 시인이다. 특히 디카시의 시선은 ‘실체에선 보이지 않지만 존재의 일렁임을 보는 눈’을 갖춰야 한다. 그렇게 깨어 있으면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최희남 시인의 디카시 몇 편만으로도 그의 작품성은 신인의 수준을 넘어섰다. 그래도 그는 이제 디카시를 개척하는 전도자의 사명감으로 디카시 발전에 이바지하면 좋겠다. 그가 기경起耕해 갈 영토를 옥토로 가꾸느냐 아니냐는 본인의 의지에 달렸다. 그렇지만 그가 하는 여러 일과 시를 대하는 자세로 봤을 때 제대로 된 디카시의 일가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 든든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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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땅 앞에 우뚝 서서 푸른 동산을 가꾸려는 용기로 가득한 시인의 탄생
중국 전국시대의 공손룡公孫龍은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을 통해서 흰색의 말, 즉 "백마는 말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일반과 특수, 보편성과 개성의 관계로 나누어서 말을 구분해서 본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뛰어넘는 '궤변론'의 예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런 시각이 철학자나 시인에게 요구되는 자세다.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며 생각하는 철학자의 명제처럼 시인도 모든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시적 대상을 삐딱하게 보고 그 특수성을 찾아내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철학이나 시의 본질이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이기 때문이고, 이런 노력으로 인하여 세상은 훨씬 의미 있고 다채로우며 재미있고 새롭게 발전하는 원동력을 얻기 때문이다. 시는 인간의 정서를 가장 고차원적으로 풀어내는 장르이므로 모든 예술의 앞자리에 호명된다. 이 개념은 시 짓기의 생래적 특성이다. 디카시dica-poem는 여기에 더하여 디지털 시대 인간의 일부분이 된 스마트폰이나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시와 결합하여 더 큰 의미의 확장을 창출하는 문학의 진보를 이루었다. 이는 카메라가 생긴 이후 꾸준히 그 명맥을 이어온 사진시Photo-poem와는 차별된다. 사진시는 제시된 사진을 묘사, 설명하면서 길이에 구애되지 않는 시적 언술을 덧붙이는 형태라는 점에서는 디카시와 비슷하다. 그러나 사진에 구속되는 언술이거나 언술을 꾸미는 자리에 사진이 놓임으로써 사진예술도 시 예술도 아닌, 작품성을 오히려 서로 침해하는 문제로 인하여 문학의 한 갈래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비해 디카시의 특징은, 사진이나 시적 언술 서로를 설명하진 않지만, 환유, 즉 의미망으로 연결되어 울림이 있도록 창작하는, 순간성이 살아있는 예술이다. 사진시는 언술을 떼어버려도 사진의 예술성이 살아나지만, 디카시는 서로 떼어 놓으면 작품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디카시의 제목이나 사진, 언술은 하나의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제목을 먼저 쓰고 사진과 언술, 이름 순서로 배치하는 것 모두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하나의 작품임을 말해주는 형태다. 또한 실시간으로 소통 가능한 5행 이내의 짧은 문장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현장성과 즉물성의 바탕에서 언술의 길이가 5행을 넘어가면 그 현장의 서정적 감흥을 다시 기억해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 순간 만나는 대상에서 시적 영감이 떠오를 때 그 장면을 찍고 시가 가진 본래의 기능을 현대인의 감성에 맞는 의미와 울림을 창출하여 실시간으로 세계와 소통할 수 있으므로 포노사피엔스phono sapiens 시대에 최적화된 문학으로 언급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디카시학'에서는 디카시의 순간성, 현장성을 살리되, 시문학이라는 기본적 소양과 사진 영상의 가독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문학의 한 갈래로 정착하기 힘들 수도 있다고 작품성을 강조하는 이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희남 시인은 디카시의 땅 앞에 우뚝 섰다. 필자가 그를 “우뚝 섰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의 시편마다 예사롭지 않은 언술과 촌철살인적 감성이 번득이기 때문이다. 디카시의 초보자답지 않다. 앞으로 더욱 차별화된 오솔길을 만들어서 많은 독자가 찾는 푸른 정원을 가꿔보려는 용기가 당차다. 필자가 그를 “우뚝 섰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의 디카시집에 실린 시편마다 예사롭지 않은 언술과 촌철살인적 감성이 번득였기 때문이다. 디카시의 초보자답지 않다. 이제 그의 디카시 몇 편속으로 들어가서 그의 숨결을 느껴보고자 한다. - 이어산 (시인, 한국디카시학회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