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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제
1. 『논어정의』 번역의 가치 2. 원저자 소개 3. 『논어정의』 소개 4. 『논어정의』 번역의 필요성 5. 선행연구 일러두기 범 례 논어정의 권21 미자 제18 논어정의 권22 자장 제19 논어정의 권23 요왈 제20 논어정의 권24 논어서 부록 정현논어서일문 후서 색 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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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니, 『백호통의』「오행」에 “친속의 신하는 충간하되 임금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은 무엇을 본받은 것인가? 나무의 가지와 잎이 뿌리를 떠나지 않음을 본받은 것이다.”라고 했다. 하휴 (何休)는 『춘추공양전』「장공」 9년의 「주」에서 “예(禮)에 공자(公子)는 나라를 떠나는 도리가 없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동성의 신하는 임금의 곁을 떠나는 이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자는 실로 떠나지 않을 수 없는 형세에 처했었기 때문에 정군이 다시 “동성(同姓)이라 할지라도 떠나는 이치가 있다.”라고 하여 그것을 밝힌 것이다.
--- p.44 이제 살펴보니, 모기령과 단옥재의 말이 옳다. 앞 장의 일민(逸民) 중에는 백이와 숙제가 있으니 은나라 말기와 주나라 초기가 되고, 아래 장의 여덟 선비 역시 주나라 초기의 인물이니, 그렇다면 이 장의 태사인 지(摯) 등은 자연스레 은나라 말기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태사가 제나 라로 가고, 소사가 해내로 들어간 것을 생각해 보면 모두 주나라로 도망가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백이와 태공(太公)은 주(紂)를 피해 바닷가에 살다가 나중에 모두 주나라에 갔는데, 태공(太公)이 벼슬길에 나아가 태사가 된 것 역시 그런 종류이다. 정현은 이 장의 「주」에서 주 평왕(周平王) 때의 사람이라고 했지만, 안사고의 『고금인표』「주」에서는 취하지 않았다. --- p.118~119 『한석경』에는 “무(無)”가 무(毋)로 되어 있다. 또 “만방유죄(萬方有罪)” 아래 “죄(罪)” 자가 중복되지 않았고, 황간본 역시 중복되지 않았다. 『이아』「석고」에 “짐(朕)은 나[我]라는 뜻이다.”라고 했는데, 곽박의 「주」에 “옛날에는 귀하든 천하든 모두 스스로를 일컬어 짐(朕)이라 하다가, 진(秦)나라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천자의 존칭이 되었다.”라고 했다. 살펴보니, 여기에서 하늘에 고하면서도 역시 짐(朕)이라고 했으니, 이때의 짐(朕)은 아직까지는 존칭이 아니었다. 동진(東晉)시대의 고문(古文)에는 이 구절의 문구를 따서 『서경』「상서·탕고」에 삽입시켰다. --- p.232 살펴보니, 노공왕은 처음에 회양(淮陽)에 봉해졌다가, 뒤에 노(魯)에 봉해졌으며 재위 28년만에 사망했으니, 원삭(元朔) 원년(元年: 기원전 128년)에 해당하는 해로, 그가 공자의 구택을 철거한 일은 또 그전에 있었으니, 무제의 초년이 되는데, 『전한서』「예문지」에서는 무제 말년이라고 했으니, 자세히 살피지 않은 것이다. 「예문지」에는 또 “『고문상서』 및 『예기』와 『효경』 등 모두 수십 편을 얻었는데 모두 옛 글자로 되어 있었다.”라고 했고, 『위서』「강식전」에 “왕망이 섭정할 때[亡新居攝], 대사공(大司空) 견풍(甄豊)으로 하여금 문자(文字)의 부분을 개정하게 했는 데, 당시에 육서(六書)가 있었으니, 첫째는 고문(古文)으로 공자의 구택 벽 속의 글자이다. 노공왕 공자의 구택을 철거하다가 『예』와 『상서』와 『춘추』와 『논어』와 『효경』을 얻은 것이다.”라고 했다. --- p.309~310 『논형』「정설」에 “공안국은 『전』이라 부르는 것을 노나라 사람 부경(扶卿)에게 전수했고, 부경이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승진하자 비로소 『논어』라고 불렀다.”라고 했는데, 살펴보니, 『논형』에서는 “부경(扶卿)”을 사람의 성명(姓名)으로 여긴 것이고 “노(魯)”는 거주하던 지역으로 여긴 것이다. 또 부경을 공안국의 제자로 보았는데, 이는 『고논어』의 학문을 전한 것이니, 『전한서』「예문지」의 여러 글과는 일치하지가 않는다. 심지어 『논어』를 공안국 등이 제목을 달았다고 했으니, 더욱 믿을 수가 없다. --- p.395~3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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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때에 맞게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모르긴 몰라도, 대한민국에서 이 구절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주 적을 것이다. 이 구절의 의미를 탐독해 보지는 못했더라도 말이다. 설혹 이 구절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라손 치더라도, 이 구절에서 유래한 ‘학습(學習)’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논어』는 이 외에도 수많은 구절과 단어를 우리 사회에 남겼다. ‘견리사의’, ‘과유불급’, ‘살신성인’, ‘온고지신’, ‘절차탁마’ 등의 고사성어를 비롯해, ‘이단’, ‘숙맥’과 같은 일상적 표현도 남기고 있다. 그러나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논어』를 읽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적을 것이다. 한때 식자라면 누구나 읽어야 하는 필독서였던 『논어』는 어쩌다 이렇게 몰락하게 됐을까? 누군가는 지학이라는 말보다 중2병이라는 말이 특정 나이대를 대표하는 시대에 수천 년 전을 살아간 공자라는 사람의 지혜가 무슨 쓸모가 있겠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여러 사람이 말하는 대로, 한국 사회의 병폐 중 하나가 유교 문화에 근간을 두고 있다면, 그 유교가 당최 무엇인지는 갈피를 잡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동아시아가 유교의 가르침을 따른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닌가? 물론 당연히 우리가 공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렇기에 고전은 언제나 해석의 문제를 남긴다. 그리고 이처럼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정에 맞게 해석하여 마땅한 점을 취하는 것이야말로 배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천 년 전의 사람에게서도 배움이 있으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논어』,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록 『논어』라고 하면, 경전이라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기에, 아주 고리타분하고 딱딱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으리라고 지레 겁을 먹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반면에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은 아직도 찾아 읽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사실은 『논어』 역시 결국은 대화록이다. 『논어』는 공자의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엮은 책이며, 그 특성상 공자와 제자, 그리고 공자의 제자들 간의 대화로 꾸려져 있다. 때로는 제자나 주변 인물들이 공자에게 묻기도 하고, 때로는 공자가 역으로 묻기도 한다. 그리고 그 대화 중에는 우리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도 있지만, 시대를 불문하고 여전히 큰 울림을 주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논어』를 통해 ‘인간’ 공자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 도대체 동북아가 그렇게 오랫동안 떠받든 스승 공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공자는 배우고자 자신을 찾아오는 이라면 누구든 가르치고자 했으며, 스스로 더 배우고자 하지 않으면 더 이상을 가르치고자 하지 않았다. 같은 질문에도 제자에 따라 다른 가르침을 주고자 했으며, 때로는 권면하기도 하고 때로는 꾸짖기도 했다. 그리고 때로는 제자들의 행동을 보며 자신을 반성하기도 했다. 제자들 역시 자신이 모르는 부분은 공자에게 물어보고 열심히 따르면서도, 스승인 공자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을 때는 따져 묻기도 했다. 이처럼 공자와 제자들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았다. 이러한 스승과 제자의 모습은 갈수록 교권이 무너져 가고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가 형식화해 가는 요즘의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논어』뿐 아니라 많은 자료를 통해 『논어』를 주해한 유보남의 『논어정의』, 그리고 그 『논어정의』를 번역한 이 책은 우리에게 공자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공자와 제자들의 관계 등 공자의 인간적 면모를 잘 보여 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