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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언 도시는 어떻게 문학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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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속에서
내가 창조적인 기록으로서 글쓰기를 하는 것, 특히 허구의 소설을 쓰는 것 역시 또 다른 유형의 혼귀들의 기억방식일 것이다. 작가로서, 특히 여성 작가로서, 또 특히‘ 음성(陰性)’ 서사의 대표로 불리는 여성 작가로서, 나는 여인 또는 여성 작가로서 귀신들의 이야기를 계속 써나갈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귀신이 몸에 붙은 상태(부신)로 혼백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갈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도 영원히 떠돌면서 안식할 곳을 찾지 못하는 귀신이다! 나도 플로베르의 명언을 따라해야 할까? “저는 보바리 부인입니다.” 나는 또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저는 루청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루깡입니다.” 리앙_「귀신들이 떠도는 도시-루깡」 31쪽 상상 속의 나라와 고향은 아마 실제의 조국이나 고향이 갖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장악력이 있을 텐데, 거기에는 이상과 배치되는 실망스러운 요소들이나 기억들이 없기 때문이다. 상상 속의 나라는 이상적인데, 모국에 대한 전망은 그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 바로 여기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닮은 점은 거의 사라진 어떤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싶어 하는 난민의 정신 상태가 지니는 아이러니가 있다. 변화나 동시대성이란 개념은 그런 정신 상태와 거의 부합되지 않는다. 어머니의 유목 마을은 나의 놀이터였다. 내가 티베트에 관하여 물어보면, 어머니는 돔파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그것이 당신이 어렸을 때 알던 티베트의 모든 것이자, 내가 인도의 다람살라와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어린아이로서 티베트에 대해 알던 모든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눈길을 통해 평원과 산맥의 절경을 보았고, 키츄―기쁨의 강―라는 이름의, 당신의 집에서 약 일 킬로미터쯤 떨어져 자갈투성이 강둑을 끼고 느릿느릿 흐르는 강도 보았다. 체링 왕모 돔파_「머나먼 고향-돔파」 35~36쪽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분리되었듯이 본질로부터의 분리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이 또 복제된 것과 같다. 이러한 분리의 복제는 여러 시대와 주제 속에서 무한히 반복된다. 예술은 정직함을 위해 미학적 형태를 찾는 노력이다. 문학에서의 정직함은 언어가 닿을 수 없는 본질의 KW, 모형에 불과하다는 고해에서 시작된다. 어떤 분야의 예술에서든 정직함은 예술가가 지나치게 대상을 미화시킬 때 끝난다. 평범함의 미학은 대상의 미화와 대척점에 있는 모험이다. 탐미주의나 대상의 미화는 전체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사고 없이 광란적으로 벌이는 KW 잔치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가짜의 미학은 지식의 본성이 가지는 독창성에 대한 고해를 요한다. 우리가 특정 사실이나 예술적 공식에 대해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려면 이러한 고해가 필요하다. 아유 우타미_「가짜와 평범함의 미학-자카르타」 49~50쪽 오늘날의 하노이에 살고 있는 나는 도시의 편리함을 누린다. 그러나 나는 그 편리함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 심지어 나는 오늘날의 하노이는 하노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까지 오늘날의 하노이에 대해 글 한줄 쓰지못했다. 나는 하노이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 하노이는 미군의 폭격을 받고 있는 하노이, 가난하고 암담한 시절의 하노이다. 실로 모순된 논리다. 어린 시절의 하노이를 생각할 때면, 나는 단지 처량함과 애통한 감정뿐이다. 그런데 나는 그때의 하노이에 대해서만 쓸 수 있다. 단지 궁핍과 전쟁, 집단적 삶의 무게에 짓눌린 하노이 사람들의 삶과 운명에 대해서만 쓸 수 있다. 전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6년간의 군 생활은 나를 전쟁을 무한정 증오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1975년 평화가 찾아왔을 때 나는 제대를 하고 하노이의 가족 곁으로 돌아왔다. 나는 평범한 삶을 살고자, 심혼의 평온을 찾고자 전쟁의 끔찍한 기억들을 빨리 잊게 되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바오 닌_「기억과 나의 문학-하노이」62~63쪽 진실에 이르기 위해 라말라에서 오랫동안 세심한 관찰이나 강렬한 삶의 체험을 할 필요도 없이, 이곳에서의 진실이란, 이 파괴의 흙먼지로 뒤덮인 도시에서는, 제 스스로는 삶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 제 속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경계들을 준수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이 도시에서는, 혼자 사무실에서 자기 책상 뒤에 숨어 있거나 자기 집에서 커다란 창문에 달린 커튼 뒤에 숨어 있는 것 외에 뭔가를 볼 필요도 뭔가를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경계 이탈을 너무나 잘 참아 내는 것이 라말라에서의 고립이기에. 사실, 이것이 이 도시에서의 삶을 무사하게 한다. 아다니아 쉬블리_ 「라말라의 경계에서-라말라」86~87쪽 나는 생계와 자유라는, 매우 차원이 다른 항목들의 삐딱한 균형 위에서 글을 써왔고, 지금도 쓰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소설 쓰는 방식은 바뀌어도 내 삶과 소설의 관계는 바뀌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러다간 굶어죽겠지 싶을 정도로 궁핍해지면 글이 조금 달라진다. 대중이 원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제도가 요구하는 수준까지는 순응하려고 꿈틀거린다. 내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쓰는 게 아니라 글이 알아서 저절로 그렇게 된다. 글도 살아야 하니까. 이러다가 너무 잘 나가는 것 아니야 싶으면, 솔직히 말해서 그런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에 장담할 수는 없지만 지금 생각에는, 또 글이 조금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언어라는 주인의 요구에만 순종하는 식으로.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거야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나서 생각해도 충분한 일이다. 권여선_ 「나는 어떻게 쓰는가」178쪽 오랜 시간 낙선의 고배를 무수히 마시며 숱하게 좌절했을 때 내 곁을 지켜주신 소중한 분들이 너무나 많다. 호명하지 않아도 알아주실 거라 무모하게 믿으며, 일일이 이곳에 열거하지 않는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바란다.‘ 내 글을 알아봐줄 눈 밝은 심사위원이 언젠가는 나타날 것’이라고 끝까지 고집을 피운 나의 끈기에 박수를 보내며, 나의 오만한 믿음을 지지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를 전한다. 당선 소식을 들은 날 하루 동안은 내내 행복했다. 그러나 다음날 눈을 뜨면서부터 두려움이 싹트기 시작하여 저녁 때 쯤에는 나를 온통 휘감았다.‘ 좋은 작가’라는 말 속에 숨은 막중함과 욕망의 두 감정에 사로잡히자 마구 두려워진 것이다.‘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이제 나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되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더 열심히 쓰는 일밖에 없다. 판에 박힌 말이라고 생각하며 우습게 여겼던 말을 내가 하게 될 줄 몰랐다. 그러나 이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상황에 놓이고 보니 처지가 이해된다. 박혜지_「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 당선소감」 28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