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Peter Hedges
강수정의 다른 상품
|
나는 신을 봤다. 이 여자애가 바로 신이었다.
무슨 말이든 얼른 해야겠는데,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등 뒤로 다가갈 때 그 애가 이렇게 말했다. “사마귀. 수컷이 암컷한테 몰래 다가가지. 수컷은 짝짓기를 하고 싶거든. 하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암컷이 돌아서서 머리를 씹어 먹을 거야. 그래도 수컷은 본능 때문에 계속 짝짓기를 해. 하지만 나머지 몸뚱이가 일을 끝내면 암컷이 남은 것마저 먹어치우지. 이게 사마귀들의 짝짓기 방식이야. 재미있지? 내 이름은 베키야.” 그 여자애는 뒤로 돌아서더니 안경을 내리며 나를 쳐다봤다. “어.” 내가 한 말은 이게 전부였다. --- 59쪽 “한 번만 더 어니를 때렸다간 그냥…….” 엘렌은 얼굴을 가렸지만 내가 자기 눈물을 똑똑히 볼 수 있을 만큼만 가렸다. 집안의 남자이자 그레이프로서 난 많은 걸 참고 살았다. 누나, 여동생, 엄마, 이 마을. 뭐든 참아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아무도 어니를 건드리면 안 된다. 아무도. 어니를 위해서라면 사람도 죽일 수 있다. --- 106쪽 그녀에게 다가가 쏘아붙였다. “왜 나를 선택했죠? 응? 누구라도 차지할 수 있었잖아요. 랜스 닷지를 가질 수도 있었잖냐고요! 그런데 당신은 날 선택했어요. 지금이라도 이 마을엔 기꺼이 당신에게서 음…… 한 수 배우려는 아이들이 많아요. 잘생긴 애들, 근육질 애들, 농장의 일꾼 타입 같은 애들. 그런데 대체 왜 나를 골랐느냐고요!” “그래. 다른 사람을 가질 수도 있었지. 하지만 난 너를 선택했어.” “왜요? 왜 그랬죠? 네?” “왜냐하면.” “얼른 말해요.” “왜냐면 네가 너희 가족을 절대로 떠나지 않으리란 걸 알았으니까. 넌 절대로 엔도라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으니까.” --- 135쪽 “길버트.” 계속 웃었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그런 웃음이었다. “아무도 네가 마지막으로 울었던 게 언젠지 기억하지 못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길버트, 기다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전력질주를 했다.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호이스 씨네 마당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중앙로를 건너, 램슨식품점을 지나, 램프카페 앞을 달려갔다. 메퍼드 씨네 뒷마당을 지나다가 새 모이용 물그릇을 넘어뜨렸다. 집에 돌아온 다음에는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걸어잠갔다. 다리와 팔의 땀을 닦고 얼굴에 흐르는 땀은 베개에 머리를 파묻어 말렸다. --- 213쪽 ---본문 |
|
스물네 살의 길버트는 램슨식품점의 점원이다. 조용하기 짝이 없는 고향 엔도라를 떠나본 적이 없다. 아니, 떠날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아빠는 길버트가 어렸을 때 집 지하실에 스스로 목을 맸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한때 온 동네 남자들의 우상이었을 만큼 매력적이던 엄마는 아빠의 자살 이후 폭식을 거듭하더니 이제는 앉아 있는 마루 밑을 꺼지게 할 수 있는 거대 뚱보가 되었다. 형제 중 가장 손위인 누나 에이미는 집안의 살림들 도맡고 있다. 아빠의 자살 현장을 처음으로 발견했던 형 래리는 1년에 딱 한번, 막내 동생 어니의 생일에만 집에 온다. 승무원으로 일하는 제니스 누나도 마찬가지다. 길버트의 바로 아래 동생 어니는 지적장애아다. 병원에서는 열 살까지만 살아도 기적일 거라고 했었는데 이제 곧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는다. 막내 여동생 엘렌은 이제 막 이성에 눈뜬 철없는 사춘기 소녀다.
길버트는 엔도라에 남아 엄마, 에이미 누나, 어니, 엘렌을 보살펴야 하는 가장 아닌 가장이다. 자신의 남편 켄 카버를 두고 젋은 길버트의 육체를 탐하는 베티 카버 부인과 정사를 나누곤 했지만 켄의 뜻밖의 사고사 이후 다행히도 그들의 관계는 끝나버렸다. 고등학교 때부터의 단짝 친구 터커는 거대 패스트푸드점 버거반에 취직하는 게 일생일대의 꿈이다. 그렇고 그런 따분한 일상과 가족들의 뒤치닥거리에 지친 길버트는 가끔 자신이 이곳을 훌쩍 떠날 수도 있을까, 생각만 해본다. 어느날 마을에 베키라는 여자애가 등장하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수군댈 정도로 매력적이다. 길버트도 우연찮게 베키를 만나 사랑인지 뭔지 모를 신열을 앓는다. 맹랑하고 편견 없는 베키는 가족과 책임과 자신이 아닌 껍데기에 짓눌려 사는 길버트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 선문답같이 아리송한 말들로 길버트의 마음을 두드리곤 한다. 가족 모두가 고대하던 어니의 열여덟 번째 생일, 더 이상을 바랄 수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하루가 펼쳐졌다. 생일 파티는 훌륭했고 버거반에서의 이벤트도 멋졌다. 어니는 신이 났고 엄마를 비롯한 나머지 다섯 형제들도 모처럼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그러나 이날의 정점은 엄마였다. 자신의 방도 침대도 무시하고 거실을 방 삼아 소파를 침대 삼아 TV와 함께 생활하던 엄마가 몇 년 만인지 몇 달 만인지 2층의 방으로 힘들게 올라간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아이들과 작별을 한다. |
|
디테일의 승리, 책을 따라올 만한 영화는 없다
작가 피터 헤지스는 길버트 그레이프를 영화화하는 작업에 각색자로 참여하면서 영화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그가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를 보고 나서 한 말은 이랬다. “영화화된 길버트 그레이프가 정말 마음에 든다. 그러나 영화와 책의 분위기는 다르다. 영화는 책보다 더 따듯하고 인간적이지만 유머와 위트, 통렬함은 책에 더 잘 살아 있다. 화면과 글의 차이다. 그래도 이야기의 정서, 원래의 의도는 영화와 책이 같다.” 소설의 작가이자 영화의 각색자인 헤지스가 보기에도 영화는 책을 다 담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 대개가 그렇듯 영화에서는 많은 내용이 생략되었다. 영화에서는 사진 한 장으로 지나가는 래리 형과 아예 언급도 되지 않는 제니스 누나가 소설에서는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냉소적이기만 한 것 같은 길버트 그레이프는 사실 유머 있고 세상을 보는 지혜와 자신만의 철학이 있는 청년이다. 모든 것이 지루하고 시시하고 역겹던 길버트에게 베키가 가르쳐준 것은 사랑만이 아니었다. 따듯하지 않다, 그러나 가슴을 두드린다 소설 〈길버트 그레이프〉는 친절하거나 따듯한 책이 아니다. 길버트의 시니컬한 시각이나 독백, 엘렌의 버르장머리 없는 말투는 차갑고 냉정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삶이 원래 그렇지 않은가? 사실 다정한 말과 따듯한 위로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 혹은 디즈니 영화에나 나온다. 현실은 늘 냉정하고 싸늘하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잘라내어 낱낱이 보여주는 피터 헤지스의 문체는, 인간은 그래도 언제나 위로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애잔하게 느끼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