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k Her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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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우 하우스, 즉 ‘수렁의 집’이라는 이름은 어떤 공문서에도 존재하지 않고, 그 이름을 박은 문패나 편지지도 없다. 공과금 고지서와 임대 계약서, 명함과 전화번호부, 부동산 중개업자의 리스트에도 실리는 법이 없다. 애초에 그건 이 건물의 정식 명칭이 아니라 대단히 비공식적인 이름일 뿐이다. 그런 슬라우 하우스의 실권을 쥔 자가 꼭대기 층에 자리한다는 뜻이다. 다만 인테리어가 어느 층이고 다 똑같이 초라한 것을 보면 세력 구조는 단순한 것 같다. 꼭대기냐, 아니냐. 그리고 꼭대기에 위치하는 사람은 잭슨 램뿐이다.
---p.26 “네가 뭘 어떻게 들었든 그건 상관없고, 좌우지간 넌 실패했어. 그래서 지금 리젠트파크에서 눈부신 앞날을 향해 경력을 쌓는 대신 여기서 초라한 잡일이나 하는 거야. 네놈이 얼른 그만둬서 다른 사람들 시름을 덜어주도록. 그것도 네놈 할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어림없었어.” 누런 이가 또 드러났다. “여기를 왜 슬라우 하우스라고 부르는지 알지?” 램이 물었다. “네.” “슬라우에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 그런 거죠. 압니다. 우리는 뭐라고 부르는지도 알고요.” “우리를 ‘느린 말’이라고 부르거든.” 마치 리버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계속 입 다물고 있었던 것처럼 램이 말했다. “슬라우 하우스. 슬로 호스. 그럴싸하잖아?” ---p.56 램이 물었다. “다 치웠어?” “대충은요.” “좋아. 자.” 그는 앞에 놓인 플래시 박스를 투실투실한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갖다줘.” “갖다주라니요?” “어째 메아리가 들리는데.” “갖다주라니, 어디로 말입니까?” “메아리가 들리는군.” 램이 또 말하더니 웃었다. 농담을 한 것이었다. “어디긴 어디야. 당연히 리젠트파크지.” (…) 램이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거나, 아니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게다가 왜 저더러 가져오라는 거죠.” “그런 적 없어.” 램이 말했다. “그쪽에서 원하는 사람은 시드인데, 시드가 없잖아. 그래서 널 대신 보내는 거야.” ---p.66~67 잭슨 램이 본능으로 움직이던 시절은 이제 과거가 됐다. 그건 그가 지금보다 살이 덜 쪘고 피부가 더 좋았을 때 일이다. 그렇지만 예전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니다. 벗은 허물은 만일의 사태를 위해 옷장에 걸어둔다. 집에 거의 이르렀을 대, 그는 곁길 으슥한 곳에 누가 숨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용의자 명단을 작성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적을 많이 만들었다. 솔직히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며칠 사이에도 적을 만들 사람이었다. ---p.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