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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꿔다가 시를 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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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서정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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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부

빚을 진 날
시절인연
멧밭쥐
그곳
미나리 어매
마을회관에서 외친 통일
관계의 유통기한
존재의 이유
느림의 미학
사랑의 침략자
바람과 풍경
새로운 길
이사하는 날
기다린다는 것
마지막 소원
사량도 지리산을 오르며
살아가는 법
어린 순례자
눈물에게
채송화와 쇠비름

2부

대추 한 알
고모 집 가는 길
보리수 이야기
또 다른 나
딸아 내 딸아
1/2 ,
간절한 바람
묵은지가 되고 싶다
시를 캐는 심마니
나의 지느러미
가을에 쓰는 편지
반딧불이 세상
마음이란 것
서투른 길
산다는 건
묵언수행
뿌릴까 말까
겨울 풍경
가시에게
성장통

3부

팽이
빨간불
봄의 왈츠
보고 싶다
여름 채집
가을의 안단테
다알리아 꽃길을 걸으며
시간을 거슬러
유월이 오면
인생의 숲길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낙화
그럴 수만 있다면
길을 찾아서
꽃씨 하나
빈 손
깃발이 되어
퀘렌시아
별을 담다
밤송이

4부

당신과 나
까치와 이
내 어머니
강변에서
이별 주의보
그 손
지독한 사랑
마음 비우기
다시 개벽
나에게
천 개의 공
나도 봄
평화의 시작
얼음새꽃
그랬으면
가을마중
불귀의 매
친구
빈 방 없습니다
여주의 사랑
시집해설

저자 소개 1

경남 김해 진영 출생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22년 《문학사계》 등단 시집 『꽃바람 부는산』, 『자연을 꿔다가 시를 빚는다』, 『무름 위에 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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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8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24쪽 | 168g | 125*205*10mm
ISBN13
9791192374574

출판사 리뷰

상처의 심연에서 탄생한 절제미 넘치는 시
- 오봉옥(시인,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1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체로 순박하고 여리고 예민하다. 자기 이익을 챙기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순박하며, 측은지심이 있어 시선을 늘 그늘에 두고 살아서 여리다 할 수 있다. 또한, 대상 하나하나를 깊이 파고들어 그 속마음까지 들여다볼 수 있으니 예민한 촉수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김영혜 시인은 그중에서도 유독 순박하고 여리고 예민한 촉수를 지닌 사람이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를 정도로 순박하고, 너무 여려서 작은 일에도 상처를 잘 받으며, 예민한 촉수를 지녀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도 남들이 쉽게 보지 못하는 무늬를 찾아내 읽어내곤 한다.

그와 나는 대학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났다. 그는 집안 형편상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야간 대학을 다닌 후,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사이버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한 늦깎이 학생이었다. 여덟 번의 유산 끝에 연년생 두 아이를 키우느라 힘겹게 살아온 김 시인은 처음 본 순간부터 눈에 띄었다. 상처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독특한 내음을 풍기고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예사롭지 않았다.

그의 첫 시집 『꽃바람 부는 산』이 눈물의 승화를 보여준 시집이라면, 이번에 출간하는 두 번째 시집 『자연을 꿔다가 시를 빚는다』는 ‘상처의 심연에서 탄생한 절제미 넘치는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절제된 상처를 어루만지다 보면 마음이 아팠고, 원고를 읽다 말고 한동안 천장을 바라봐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뭇한 것은, 첫 시집에 비해 한층 더 완숙해졌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군더더기는 없어졌고, 울림은 커졌다.

2

이번 시집에서 눈에 띄는 점은 능수능란하게 모어(母語)를 부리는 데 있다. 그가 쓰는 구어는 시적 주체와 맞물려 생동감을 자아낸다.

성한 다리로 태어나지 못한 것도 내 팔자려니 여기며 살았습니더. 엘리베이터 바닥에 온갖 발자국 흔적 핥아내고 그늘진 계단을 기어 다녔습니더. 똥 묻은 변기통이며 휴지통을 빤질빤질 하도록 닦았습니더. 끝물 맞은 생의 보따리 홀쭉해진 것도 모르고 죽어라고 일만 했습니더. 엉겨 붙은 밀대의 숱 많은 머리카락 사정없이 비틀어 짜고 병동마다 속웃음을 밀고 다녔습니더. 난생처음으로 내 한 몸 뉘일 오동나무집 하나 장만하고 부음을 알리는 종소리 울릴 때쯤 비로소 저 밀대도 허리를 꺾어 눕겠지예. 구부러진 세월 살아오는 동안 다만 잘못이 있다면 남몰래 병원 샤워실에 들어가 땀에 저린 몸을 씻은 죄밖에 없습니더. 그러하니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들어갈 때 적적하지 않게 저 밀대도 같이 갈 수 있도록 쪼매만 봐 주이소.
부디 나무라지 마시고 너그러이 받아 주이소.
-「마지막 소원」 전문

박박 우겼으면 똥 묻은 바지라도 팔아서 공부를 시켰을 낀데 안 한다고 하니 하기 싫어서 그런갑다 여겼지. 일 많은 집안 살림살이 보고 커면서 차마 대학 보내달라는 말을 못하고 마음에도 없는 상고를 갔으니 그 속이 어떨고. 가슴이 휘어지도록 묻어 두고 사느라 욕봤다. 어미는 사시사철 죽어라 일만 하다가 뒤늦게 야학에 가서 코끼리 발톱만큼 글자를 배웠다. 아궁이에 불 때다 말고 땅바닥에 부지깽이로 익힌 글로 평생을 우려묵고 살았다. 그래도 너는 고등학교씩이나 시켰으니 어디 가서 못 살겠노 싶었다. 너무 속 끓이지 말고 힘닿는데 까지 살아라. 나는 무섬증도 없이 차를 쌩쌩 몰고 다니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자랑스럽다. 미안하고 고맙다 참말로 미안하고 고맙데이.
-「딸아 내 딸아」 전문

「마지막 소원」의 시적 화자는 병원에서 일하는 청소부이다. 이 시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온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구어체로 이루어진 이 시의 언어는 매우 직설적이고 현실적이며, 주인공의 처지와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청소부의 마지막 소원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자신이 살아온 세월 동안 잘못한 게 있다면 ‘남몰래 병원 샤워실에 들어가 땀에 저린 몸을 씻은 죄밖에’ 없다는 말과 자신이 죽어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들어갈 때 적적하지 않게 저 밀대도 같이 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이 가슴을 친다. 시 전체에 걸쳐 느껴지는 감정은 절망과 체념, 그리고 약간의 안도감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고통을 인정하면서도, 마지막 소원에 대한 간절함을 표현하고 있다. ‘엘리베이터 바닥’, ‘변기통’, ‘밀대’ 등의 이미지는 주인공의 비참한 삶을 상징한다. 특히 ‘밀대’는 주인공의 삶의 고단함을 상징하며, 마지막에 밀대와 함께하고자 하는 소원은 주인공의 삶과 일체된 도구로서의 밀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화장을 할 때 ‘밀대’를 함께 넣어달라는 호소는 읽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딸아 내 딸아」는 시인의 경험을 토로한 작품이다. 이 시의 화자는 시인의 어머니이다. 이 시는 부모의 애정과 미안함, 그리고 자랑스러움을 감동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시인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진솔하게 그려내며, 가슴 뭉클한 감정을 자아낸다. 언어는 솔직하고 담담하여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안겨준다.

시인은 가정 형편상 일반계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하고 상고를 진학하면서도 부모에게 원망 한번 하지 않은 모양이다. 어머니는 딸에게 ‘박박 우겼으면 똥 묻은 바지라도 팔아서 공부를 시켰을 낀데 안 한다고 하니 하기 싫어서 그런갑다 여겼지’하고 말하며 미안해한다. 시 전체에 걸쳐 느껴지는 감정은 사랑과 미안함, 그리고 자랑스러움이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희생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자식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면서도, 자식이 잘 성장해준 것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서 가슴을 치는 대목은 ‘너무 속 끓이지 말고 힘닿는데 까지 살아라. 나는 무섬증도 없이 차를 쌩쌩 몰고 다니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자랑스럽다.’고 말한 부분이다. 나이 든 자식은 그 어떤 상처를 입고 친정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위로를 받는다. ‘야학에 가서’ 뒤늦게 글자를 배웠다는 어머니의 격려와 위로가 가슴을 저미게 한다. 이 시는 부모와 자식 간의 깊은 애정을 담고 있어 감동적이다. 부모의 희생과 자식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식을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이 진솔하게 담겨 있어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이 시집엔 상처의 심연에서 품어져 나온 절제미 넘치는 시들이 많다.

미끈거림 없이 뽀득하게 그릇을 헹구어내듯
기름진 감정의 때는 사정없이 문질러 씻어내기

눅눅한 이불을 옥상에 널어 바짝 말리 듯
마음속 우울한 진드기는 매몰차게 털어내기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생기겠지만
너무 오래 그늘에 머물지 말고 제때 흘려보내기

거실 한 복판 나무기둥에
엄지손가락으로 단단히 압정을 눌러 박는다
-「마음 비우기」 전문

이 시는 마음의 정화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일상의 소소한 행위들을 통해 감정의 정리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이미지와 행동을 통해 마음을 비우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언어는 간결하고 직설적이며, 독자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시인은 일상적인 행동들을 통해 감정의 때를 벗겨내고, 우울한 마음을 털어내며, 예상치 못한 변수들을 흘려보내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 시는 상처의 구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다짐을 쓴 종이를 ‘나무기둥’에 붙이는 방식으로 은연중 상처를 드러내는데, 그 다짐 하나하나를 음미해보면 그 상처가 얼마나 크고 깊은 지 느끼게 된다. 얼마나 상처가 깊었으면 ‘기름진 감정의 때는 사정없이 문질러 씻어내기, 마음속 우울한 진드기는 매몰차게 털어내기, 너무 오래 그늘에 머물지 말고 제때 흘려보내기’를 써놓았을 것인가. 시적 화자는 지금 마음속에 가득한 ‘감정의 때’와 ‘우울한 진드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고, 그런 차원에서 스스로 ‘너무 오래 그늘에 머물지 말고 제때 흘려보내자’고 다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마음의 정화와 비움을 주제로 하여 읽는 이에게 강한 인상을 안겨주고 있다. 시인은 일상적인 행동을 비유적으로 사용하여 감정의 정리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는 읽는 이가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곧 태풍이 몰아칠 텐데
배롱나무에 꽃망울이 조롱조롱 맺혀

거센 빗방울에 수없이
흔들리며 가까스로 매달려 있네요

햇살 알갱이로 엉킨 비바람을
털어내고 나면 곧 몽글몽글 꽃을 피우겠지요

살아가는 일도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삶의 모서리를 견디다 보면

서로를 붙들어주는 대나무처럼
단단한 마디가 되어 있을 테지요

태풍 속에 꽃망울을 피우는 배롱나무처럼
우리도 역경 속에서 더 깊이 뿌리 내릴 테지요
-「당신과 나」 전문

이 시 역시 ‘상처’를 절제된 감정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이미지들을 통해 삶의 역경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 그리고 사랑과 연대의 중요성을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배롱나무의 꽃망울과 태풍, 대나무의 마디 등을 통해 인생의 시련과 이를 이겨내는 힘을 비유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시에서 '배롱나무의 꽃망울', '태풍', '대나무의 마디' 등의 이미지는 삶의 역경과 이를 이겨내는 과정을 상징한다. 특히 '태풍 속에 꽃망울을 피우는 배롱나무'와 '서로를 붙들어주는 대나무'는 사랑과 연대의 힘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 ‘당신’을 향한 시적 화자의 호소로 이루어져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자신을 향한 위로와 다짐으로 느껴지게 만든다는 점에서 마음을 움직인다. ‘휘몰아치는 삶의 모서리를 견디고자’하는 마음, 그리하여 언젠가는 ‘서로를 붙들어주는 대나무처럼 단단한 마디’가 되어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자하는 간절함이 이 시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다. 이 시집은 상처를 절제된 감정으로 드러내는 것 이외에도 삶의 일상들을 완숙한 솜씨로 그려내고 있어 눈길을 사로잡는다.

고라니가 왔다간 모양이다
불어대는 샛바람에 얼어붙은 빈집은
잠긴 열쇠 통을 움켜쥐고 지루함을 달랬을 터인데
산 속에서 내려온 고라니는
내가 잠시 비워둔 빈집이 잘 있는지
한 바퀴 휙 둘러보고
두어 평짜리 텃밭에 콩알만 한 똥을 누고 갔다
바스락대는 내 마음을 모락모락 데워주고 갔다
나는 또 빚을 졌다
-「빚을 진 날」 전문

이 시는 고라니가 방문한 빈집을 통해 고요하고 고독한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시인은 자연과 인간의 소소한 상호작용을 통해 따뜻한 감정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얼마나 고독했으면 ‘고라니의 방문’에서 ‘따뜻함’을 느꼈을 것인가. 시적 화자는 지금 ‘바스락대는 내 마음’이라고 하여 고독한 상태임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고, ‘고라니’가 찾아와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빚’을 졌다고 하여 그 외로운 정서를 간접적으로 확인시켜 주고 있다. '고라니', '빈집', '잠긴 열쇠 통', '콩알만 한 똥' 등의 이미지는 자연과 인간의 소소한 상호작용을 상징한다. 특히 ‘두어 평짜리 텃밭에 콩알만 한 똥을 누고’ 간 고라니의 행동은 자연의 순수함과 그것이 주는 위안, 그리고 인간과의 교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빚을 진 날」과 함께 맛깔난 시로 느껴지는 작품은 「팽이」이다.

아이구, 아지매예 내 좀 살리 주이소.

어머니의 회초리 한 대에
살려 달라 고래고래 나발을 불어대는 오빠는
뱅글뱅글 돌아가는 팽이처럼 마당을 뱅뱅 돈다

오빠의 종달음질에 어머니의 엇나가는 매질은
삭은 고무바퀴처럼 힘이 빠지고 만다
저런 문디 자슥

울밑에 줄줄이 입을 틀어막고 서있던
동네 아이들이 손을 툭툭 털고 일어나자
오빠는 따라나서고 싶어 엉디를 들썩거린다
-「팽이」 전문

이 시는 어머니의 매질과 오빠의 도망치는 모습을 중심으로 한 장면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시인은 가족 간의 역동적이고 현실적인 순간을 포착해 어린 시절의 한 단면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이 시의 주제는 어린 시절의 가정 내 갈등과 동네 친구들과의 상호작용이다. 시인은 어머니의 매질과 오빠의 도망치는 모습을 통해 가정 내의 긴장과 해소, 그로 인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팽이', '삭은 고무바퀴', '울밑에 줄줄이 입을 틀어막고 서있던 동네 아이들' 등의 이미지는 시의 주요 장면을 생생하게 상징한다. 특히 '팽이'와 '삭은 고무바퀴'는 오빠의 도망치는 모습과 어머니의 매질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어휘이다. 이 시의 묘미는 ‘저런 문디 자슥’이라는 어머니의 욕설과 혼이 난 뒤에도 ‘동네 아이들’을 따라나서고 싶어 ‘엉디를 들썩거리는’ 오빠의 실감 나는 형상에 있다. 우리 모두 그런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수밖에 없어서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지나간 시절의 풍경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은 여럿 있는데 그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은 「여름 채집」이다.

쏟아지는 빗줄기 따라
얼떨결에 장화 속에 뛰어든 청개구리
저도 놀라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나도 놀라 물웅덩이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네

앞마당에 모여 수다를 떨던 수레국화는
멍석에 둘러 앉아 먹는 찐 감자 내음에
자꾸만 곁눈질하며 군침을 흘렸네

한 평 남짓 그늘을 아이들에게 내어준
느티나무는 마른 먼지 풀풀 날리는
고무줄놀이에 적적함을 달랬네

해질녘 못다 논 친구들이 보고파
돌멩이로 담벼락에 얼굴을 새겨 넣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달랑거렸네

아버지가 마당에 모깃불 피워 올리면
우리들은 청마루에 누워 별을 보고
어머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헤쳤네
-「여름 채집」 전문

이 시는 여름날의 생생한 기억과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 시인은 자연과 일상 속의 작은 순간들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독자에게 여름날의 따뜻함과 추억을 전달한다. 이 시의 주제는 여름날의 소소한 일상과 그 속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추억이다. 시인은 여름날의 다양한 장면들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그려내고 있다. 시 전체에 걸쳐 느껴지는 감정은 따뜻함과 향수이다. 시인은 여름날의 다양한 순간들을 통해 독자에게 따뜻하고 포근한 감정을 전달한다. '청개구리', '수레국화', '느티나무', '고무줄놀이', '모깃불', '별' 등의 이미지는 여름날의 다양한 장면들을 상징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시의 생동감을 더하며, 독자가 시 속의 장면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쏟아지는 빗줄기', '얼떨결에 장화 속에 뛰어든', '청마루에 누워', '적적함을 달랬네' 등의 표현은 여름날의 다양한 감정과 장면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 시의 풍경은 우리가 살아온 전형적인 농촌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우리로 하여금 추억으로 가는 열차에 오르게 한다. 이 시의 묘미는 ‘빗줄기’를 따라 얼떨결에 장화 속으로 뛰어든 ‘청개구리’의 모습에 있다. ‘저도 놀라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나도 놀라 물웅덩이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네’라는 대목은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럴 경우, 누가 더 놀랠 것인가. 정답은 없다. ‘얼떨결에 장화 속에 뛰어든 청개구리’일 수도 있고, 장화 속에 뭔가 뛰어 들어와 꿈틀거렸을 때에 당황했을 어린 화자일 수도 있으리라. 이 시는 그렇듯 우리에게 상상의 재미를 선사한다.
이 시집에서 김영혜 시인의 역량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는 작품은 「대추 한 알」이다.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축담너머
옆집 할머니네 텃밭이 보인다

닭 벼슬 오글오글 긁어모아 붉게 핀
맨드라미는 줄지어 울타리를 치고

촘촘한 상추 틈에 까치발을 하고 선
고춧대는 너불거리는 잎 사이로
붉고 푸른 고추를 영글고 있다

키 발을 딛고 고개를 빼꼼 내밀은
감나무도 능갈치게 눈알을 굴려댄다

문짝 없는 뒷간에 앉아 볼일을 볼 때면
대추나무 한 그루 눈 하나 깜짝 않고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쳐다보지 말라 했제?

우리 집 뒷간을 허락 없이 넘어다 본 죄로
잘 익은 대추 한 알

와작, 와자작!
-「대추 한 알」 전문

이 시는 일상 속의 소소한 순간들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유머러스하고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시인은 텃밭의 풍경과 뒷간에서의 경험을 통해 독자에게 친숙하면서도 흥미로운 장면을 제공한다. 이 시의 주제는 자연과 인간의 일상적 상호작용이다. 시인은 텃밭과 뒷간의 풍경을 통해 자연의 풍요로움과 인간의 소소한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시 전체에 걸쳐 느껴지는 감정은 친숙함과 유머이다. 시인은 일상적인 장면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며, 독자에게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맨드라미', '고춧대', '감나무', '대추나무' 등의 이미지는 자연의 풍요로움과 일상을 상징한다. 또한 '닭 벼슬 오글오글', '까치발을 하고 선 고춧대', '또랑또랑한 눈망울' 등의 표현은 독자에게 생생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특히 '대추 한 알'은 시의 유머와 반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의 묘미는 이야기의 재미와 자연과의 교감에 있다. 대추나무가 ‘뒷간’을 넘겨다보고 있다는 이야기 설정, 그 대추나무에게 ‘쳐다보지 말라 했제?’라고 말하는 시적 화자의 입말, 그리고 감히 ‘우리 집 뒷간을 허락 없이 넘어다 본 죄’로 ‘대추 한 알’을 따먹는다는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 재미를 안겨주고 있고, 특히 그 재미를 배가시키고 있는 것은 ‘똑’과 ‘와작, 와자작!’이라는 실감나는 의성어 사용에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높은 기량을 엿보게 한다. 시인은 자연과 인간의 일상적 상호작용을 섬세하고 생동감 있게 묘사하여, 독자에게 즐거운 독시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3

김영혜의 최근 시편들은 상처 입은 자의 영혼이 어른거려 마음을 아프게 한다. 시인은 상처의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기보다는 그것을 억누르고 견디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헤집고 있는 모습까지를 그려냄으로써 읽는 이의 가슴을 더욱 아리게 한다. 이 시집은 상처의 심연에서 탄생한 절제미 넘치는 작품으로 기록될 것이다. 아울러 능수능란한 모어(母語)의 사용, 완숙한 솜씨로 그려낸 삶의 일상들, 그리고 실감나게 펼쳐지는 지나간 시절의 풍경들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을 것이다. 또한 이 시집은 읽어볼 만한 시편들이 많았는데, 이 시집의 제목이 포함된 「존재의 이유」를 비롯하여 어머니를 노래한 「미나리 어매」, 「가을의 안단테」, 「시간을 거슬러」, 그리고 「나에게」, 「관계의 유통기한」, 「묵은지가 되고 싶다」, 「 1/2 ,」, 「사량도 지리산을 오르며」 등이 그러했다. 김영혜 시인이 더 좋은 시인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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