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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좀 · 9
감사의 말 · 194 옮긴이의 말 시간의 복수, 새로운 삶을 향한 여정 · 196 |
Layla Martin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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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가 물려받는 것은 낡은 침대와 울분이 전부다. 원망(怨望)과 밤에 누워 자는 곳, 이 두가지만 이 집에서 물려받을 수 있다.
--- p.11 그건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이 실제로 천사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세상의 모든 화가들은 협잡꾼들이었고, 나는 그들이 꾸며내는 거짓말에 진절머리가 났다. --- pp.27~28 옷장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그 안에서 골짜기나 저수지의 안개처럼 싸늘하면서도 축축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남자는 내 귀에 들리지 않는 웅얼거림에 홀린 듯 옷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 p.37 그것들은 벽돌의 모르타르와 벽에 바른 석회에 뒤섞여 있다. 이 집의 터와 기와, 바닥과 대들보에도 있다. 온 세상이 굶주림과 먼지로 변하고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을 구별할 수 없던 3년의 전쟁과 전후 40년 동안, 그것들은 이 집을 안전하게 지켜주었다. --- pp.40~41 이 집은 하나의 저주다. 아버지는 이 집으로 우리에게 저주를 내렸고, 그 안에 갇혀 살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여기 살아왔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계속 여기 머물게 될 것이다. --- p.41 결국 아버지는 집 안의 또 다른 어둠의 그림자로 변해버렸다. 어머니는 그로부터 다섯 달 뒤에 나를 낳았다. 나는 바로 여기, 벽들이 내 아버지를 집어삼킨 방에서 태어났다. --- pp.60~61 복도에 감돌던 안개가 걷히자, 익숙하고 오래된 분노와 증오만이 벽과 바닥에 부스럼 딱지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 p.72 이 집안 여자들이 결혼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들은 손으로 아무리 열심히 비벼 빨아도 사라지지 않는 얼룩만 침대 시트 테두리에 남기고 사라졌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이 집은 남자들이 죽을 때까지 속을 말려버린다고 했다. --- p.117 그녀는 고통스러워하는 듯한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빙긋이 웃었다. 확인을 마치고 나면 벽돌을 제자리에 끼워놓고 옷장을 벽에 밀어붙인 다음, 성호를 그었다. 저자가 살면서 겪어야 했던 고통을 죽어서도 겪게 하소서. --- p.119 하기는 그런 불행한 여자가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는가 평생 하나도 이룬 것이 없고 아무것도 가진 적이 없는 여자가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런 여자가 무슨 수로 아이에게 자신의 분수를 알도록 가르치겠는가 그런 여자가 무슨 수로 아이에게 성공과 돈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겠는가 항상 짓밟히며 살아온 여자가 무슨 수로 아이에게 남을 짓밟는 법을 가르치겠는가. --- pp.139~140 하지만 더 나쁜 것은 어둠의 그림자들이었다. 그것들은 우리의 발목을 잡아 넘어지게 하고, 옷자락을 잡아당겼으며, 머리카락에 매달리는가 하면, 옷장 안에 있던 접시와 유리잔을 꺼내 우리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 p.158 이 징글징글한 집구석에는 아무것도 찾아오지 않는다. 여기서 나가는 것도 없지만, 오는 것도 없다. 물론 죽은 자들만 제외하고. 그들은 슬픔과 고통을 문턱까지 질질 끌고 와서 문과 벽과 선반과 우리들의 머리카락과 발목 등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붙잡고 늘어진다. --- p.166 |
“모든 침대 밑에는 죽은 이들이 살고 있어.”
원한 서린 저주의 집, 역사와 환상을 엮은 괴담 문턱을 넘어섰을 때, 집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여기 수북이 쌓인 벽돌 더미와 잡동사니들도 늘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누구든 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덤벼들어 숨을 쉬지 못할 때까지 속을 뒤틀어놓는다. (…) 여기에 살다 보면 이와 머리카락이 자꾸 빠지고 살도 쑥 빠진다. 그리고 평소 조심하지 않으면 집 안을 이리저리 기어다니거나, 침대에 누워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_9쪽 스페인 산골의 황량한 벌판에 고립된 집.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이곳에는 신비한 힘을 지닌 할머니와 손녀가 살아간다. “어둠의 그림자들”로 불리는 죽은 자들의 망령으로 득실거리는 집에는 오래 전승된 저주가 있다. 남자들은 전부 속이 말라 죽어버리고 여자들은 결코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는 것. 오래전 포주였던 증조부가 여자들을 “등쳐먹”어 번 돈으로 지은 집은 억울한 혼들이 깃든 거대한 몸이자, 지난 전쟁의 참혹한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무덤이다. 나는 이 집에 도사리는 어둠의 그림자들도 볼 수 있다. 그것들은 계단과 복도를 기어다니다 천장으로 기어 올라가는가 하면 문 뒤에 숨어서 밖을 엿보기도 한다. 이 집은 그런 것들로 바글바글하다. _40쪽 이곳에 오랜 세월 살아온 할머니와 손녀는 교대로 화자가 되어 집에 얽힌 비밀을 들려준다. 그들은 이 집에 살아온 4대 가족의 삶, 대대로 마을의 권력자 가문의 하녀로 일해오며 직면한 계급 장벽, 타인을 향한 혐오와 배척, 강자들의 비겁함,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아우르는 스페인의 역사적 비극을 증언함으로써 고통과 증오, 피로 얼룩진 현대사의 섬뜩한 이면을 드러낸다. “집이라는 공간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폭력이 있어온 곳이며, 공포는 결코 해소되지 않는 집단 트라우마를 다루는 데 유용하다”는 칠레 언론 〈라테르세라〉와의 인터뷰 속 저자의 말처럼, 공포와 미스터리 장르를 적극 차용해 스페인의 한 가족사를 담아낸 서사는 “모든 가족의 침대 밑에는 죽은 이들이 살고 있”음을 일깨우며, 현대사회가 그 무수한 죽음을 망각함으로써 유지된다는 진실을 스산히 환기한다. “깨어나서 보니 내 안에 나무좀이 들어가 있었다.” 우리를 파괴하고 좀먹는 것들을 향한 복수 모든 걸 이해하게 된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있던 내 머릿속에 모든 것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 혐오감은 우리 내면으로 들어와 우리를 독으로 물들이고 마음속 깊이 자리 잡는다. 결국 우리는 혐오감이 아예 우리의 것이라고-사실은 그렇지 않지만-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러다 나는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서 보니 내 안에 나무좀이 들어가 있었다. _147~148쪽 소설의 제목인 ‘나무좀’은 집안 여성들이 대대로 시달리는 가려움증, 마치 몸속에 나무좀이 기어다니는 듯한 증상을 의미한다. 이는 외부의 공포와 증오가 내면에 깊게 전이되어 나타난 고통의 신체적 표현이다. 그러나 할머니와 손녀는 자신을 좀먹는 것들의 힘을 역이용해 복수를 감행한다. 그들은 몸속에 스며든 원한을 무기 삼아, “작은 숟가락 하나로 쉬지 않고 구덩이를 파는 것처럼 조금씩 그러나 끊임없이 계속 여자들을 파괴하는” 것들을 향해 저주를 내린다. 원망의 불길에 휩싸여 악을 쓰고 비명을 지르며 거침없이 울분을 토해내는 말들은 저주의 주문이 된다. 이러한 복수심의 폭발은 단순한 분노의 표출을 넘어, “권력과 폭력에 의해 언어에서 배제된 것들, 즉 육체가 없는 유령처럼 사람들의 무의식에 떠돌거나 망각의 늪 속에 가라앉은 것들”을 해방하려는 저항적 힘으로 발전한다. “유령들은 아직도 정의의 실현을 기다리며 출몰하고 있다” 소설만이 이룰 수 있는 독특한 정의의 건축물 “오늘날 우리는 죽은 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는 은유가 없다. 망자와 유령은 닫히지 않은 상처이자 트라우마로서 존재한다. 스페인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 복수는 주인공들이 정의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당신에게 힘도 없고 목소리도 없을 때, 박해와 탄압을 받으며 기댈 수 있는 공식적인 정의조차 없을 때 불의와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 남는 것은 복수뿐이다. 책에 나오는 주문과 저주도 그 복수의 일부다. 그들이 경험하는 불의와 억압을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_저자 인터뷰 중에서 저자 라일라 마르티네스는 《나무좀》을 통해 억압받는 자들이 운명을 거슬러 가져본 적 없는 정의를 이뤄낼 복수의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고 말한다. “미래의 언어로 말하는 미친 여자”들과 유령들이 한 몸이 되어 폭력에 맞서는 집은 억눌린 감정과 봉합되지 않은 트라우마를 해방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공간으로 살아 숨 쉰다. 더 나아가 공적 역사에서 지워진 자들이 자신만의 언어를 되찾고 새로운 세계를 꿈꿀 수 있는 유토피아를 보여준다. 그렇게 《나무좀》은 소설만이 이룰 수 있는 독특한 정의를 실현하며, 폭력적 지형으로 기울어진 세계에 맞서 싸우는 강렬하고 아름다운 복수극을 선사한다. 광기-미친 여자의 이야기는 결국 국가권력과 현실 정치 논리의 이면에 드러나는 순수한 여성성의 세계, 혹은 여성성에 기초한 새로운 공동체의 전조가 아닐까. 그렇다면 할머니와 손녀, 더 나아가 라일라 마르티네스와 《나무좀》은 현실의 논리에 포섭되기를 저항하며 또 다른 세계를 꿈꾸는 셰에라자드가 아닐까. _〈옮긴이의 말〉 중에서 옮긴이의 말 마치 거울의 방에 들어가면 자신의 존재가 무한하게 분열하고 증식하는 것처럼, 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 고정된 시간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현재가 과거 속으로, 그리고 과거가 현재 속으로 침투하여 가능한 미래(들)를 무한하게 조합해낸다. 라일라 마르티네스는 시간의 전쟁을 통해 권력과 돈이 지배하는 질서와 법적 폭력을 해체하는 동시에 잃어버린 언어를 통해 아직 도래하지 않는 집단적 기억―미래의 기억―을 향해 나아간다. |
“이 소설은 환시와도 같다. 이 환시에 등장하는 두 여성, 할머니와 손녀는 집에 깃든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거룩한 성인이 그려진 성물로도 막을 수 없는 어둠의 그림자들이다. 대체 이 집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어둠의 그림자들이 깃들어 있는 걸까. 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두 여성의 목소리를 번갈아 엮은 환시는 이 집을 배경으로 스페인과 한 가족의 역사를 보여주며 계급과 차별 등 현실 속 여러 문제를 직시하게 한다. 빛을 점점 꺼뜨리고, 분노로 어둠을 타오르게 만든다. 영적 체험과도 같은 몰입감을 느끼면서 이야기의 끝에 도달하면, 우리는 복수라는 매혹적인 제안을 받게 된다. 여기서 우리의 고민이 시작된다. 이 환시는 신의 참된 계시일까, 아니면 악마의 유혹일까. 이 환시를 체험한 우리는 성인이 될까, 아니면 마녀가 될까.” - 김이삭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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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복수로 지어진 여성들과 유령들의 집. 긴장감 넘치고 오싹한 이 소설은 마치 저자가 마녀들에게 이 명쾌하고 끔찍한 악몽을 받아쓰게끔 지시받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망령, 계급투쟁, 폭력과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 마리아나 엔리케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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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게 기이하며 음산하고 소름 끼치는 이야기는 날카롭고 빠른 속도의 문장으로 분노와 고독에 관해 풀어낸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마르티네스는 계급적 분노와 악의 잔류라는 더 큰 주제를 탐구한다. 이 근사한 데뷔작은 세대 간 트라우마와 괴이한 비-존재들을 동시에 주목하고 있다.” -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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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를 이어 전해진 트라우마, 폭력, 여성혐오, 계급 문제에 관한 생생한 탐구를 통해 고전적인 유령의 집 모티프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독자들은 이 놀라운 이야기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 퍼블리셔스 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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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네스의 산문은 위협적인 으르렁거림과 함께 정직하게 나아간다. (…) 그 밑에는 흥미로운 역동성이 끓어오르고, 특히 상속받은 트라우마, 불평등, 억압에 대한 예리한 감각이 놓여 있다. (…) 해골 뼈와 죄의 더미로 가득한 가족의 옷장에 묻혀 있는 괴담.” - 커커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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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좀》은 에드거 앨런 포와 셜리 잭슨과 같은 장르의 아이콘을 오마주하면서도, 20세기 스페인의 계급과 정치 역사에 대한 특정 상황을 파고들어 국제적 관객과 공명할 보편성을 이끌어낸 대단히 깊은 스페인 소설.” - 사우스웨스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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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다 멜초로의 《태풍의 계절》의 집에서 문학적 블록 아래로 몇 개의 문을 거치면 라일라 마르티네스의 《나무좀》이 있을 것이다. 이 스페인 작가의 데뷔 소설은 세대의 비밀, 유령들의 복수, 그리고 허접한 남자들이 만든 끝없는 난장판을 청소하려는 화난 여성들에 관한 몰입감 넘치고 으스스한 작품이다.” - 〈파월스 북스〉서점원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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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간 공포, 여성적 분노, 권력의 전유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 스타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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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싹하고 매혹적인 이 소설은 기억하려는 여성과 망각하는 남성에 대한 이야기이며, 자본이 괴물들을 번성하게 만드는 사회구조를 향한 유령의 노여움을 다룬다. - 조슈아 리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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