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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의 회복과 공간의 의미
'빈자의 미학' 승효상 건축가가 마지막 과제로 붙든 건축 어휘 '솔스케이프’. 영성의 풍경은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 사유하고 성찰하는 공간의 의미를 묻는다.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공간이야말로 건축의 본질이기에, 스스로를 어떻게 다듬으며 살 것인가에 대한 그의 여정은 담담한 울림을 선사한다.
2024.10.04.
예술 PD 안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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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도나 노비스 파쳄 6
ㆍ사유원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한다 27 사유원 둘러보기 42 현암 ─ 누추하고 검은 집 50 사담 ─ 기억의 벽 62 명정 ─ 보이지 않는 전망대 70 첨단 ─ 별에 오르는 단 82 와사 ─ 폐허의 수도원 92 조사 ─ 새들의 수도원 104 고침정사 ─ 경계인을 위한 처소 112 소요헌 ─ 경계 없이 노니는 집 120 묵현과 내심낙원 ─ 침묵의 언덕 위, 마음의 평화 128 소대 ─ 존재의 몸짓 134 가가빈빈 ─ 풍경이 흐르는 집 138 그 밖의 시설 144 ㆍ하양 무학로교회 진리 속에 자유하는 이들을 위한 처소 151 다방 물볕 ─ 물에 내린 볕 164 ㆍ독락당 홀로 됨을 즐기는 고독의 집 169 ㆍ통도사 수행자를 위한 도시 183 ㆍ만취헌 늦도록 푸르른 집 197 ㆍ구덕교회 부르심의 기적과 응답의 은총 211 ㆍ봉하마을 역사는 중단함으로 존재한다 227 대통령의 집 ─ 지붕 낮은 집 238 노무현 대통령 묘역 ─ 스스로 추방한 자들의 풍경 246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 ─ 일어서는 땅 260 ㆍ명례성지 성서적 풍경 275 ㆍ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너희는 이제 평화하라 291 피정센터 ─ 경계 위의 집 302 마오로관 ─ 현대의 유적 328 수도자 쉼터 ─ 환대의 공간 338 후기 우리는 그의 집이라 348 |
SEUNG,H-SANG,承孝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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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영성을 우리의 일상에서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단독 주택이라도 선조가 정신을 닦던 문방을 구태여 두자고 제안하며 고독한 공간을 만들기도 하고, 더러는 거실이라도 한 부분을 특별한 공간감을 갖도록 하였으며, 하다못해 화장실 층고를 높게 하여 일상 속 생소함을 잠시라도 경험하게 했다. (…) 작은 근린 생활 시설 설계에도 작은 성소를 두도록 설득하며 지었다. 묘역을 설계하는 기회가 생겼을 때는, 귀신이 사는 시설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다듬으며 성찰하는 공원 그래서 제삼자도 즐겨 찾는 장소로 만들고자 힘을 쏟았다. 물신의 노예가 된 듯한 종교 시설을 비판하며 종교적 본질을 회복하여 우리의 공동체를 위로하도록, 비록 작은 규모의 교회당 설계라도 집착하며 임했다.
--- 「서문」 중에서 땅 위로 솟아서 하늘의 도움으로 스스로 형상을 짓는 나무야말로 정주하여 짓는 존재이며 사유까지 하는 듯하다고, 나는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무가 잘 거주하도록 가꾸는 일은 마치 불멸의 존재가 하는 일 같아, 수목원은 늘 나에게 경외의 영역이었다. 나는 이 수목원을 그냥 좋은 식물을 보여주는 장소가 아니라 현대인이 잃어버린 듯한 사유와 명상을 회복하기 위한 장소로 만들자고 말을 꺼냈는데, 그는 그 자리에서 수목원 이름을 ‘사유원’이라 정하고 말았다. --- 「사유원」 중에서 세속적이고 장식적인 공간이 아니라 가장 단순한 형태, 진정성으로 가득 찬 모습이 교회당 건축의 진실이며 목표가 되어야 한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명료한 것만큼 신비로운 게 없다고 했다. 명료하고 단순한 공간, 진리 속에서 자유하고자 하는 이들의 집, 바로 교회와 교회 건축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 「하양 무학로교회」 중에서 우리가 지금 민주주의의 시대에 산다면, 우리가 사는 건축과 도시 모두 이런 다중심 공간의 구조로 이루어지는 게 옳지 않을까. (…) 조선 시대 중종 때 성리학의 거두 회재 이언적이 정쟁에서 밀려난 후 낙향하여 지은 이 집은, 빌라 로툰다와 거의 같은 시대에 이 땅에 지은 건축이다. (…) 여기 독락당의 건축은 건물로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건물은 마당을 이루는 한낱 도구이며, 각기 다른 마당은 서로 독립된 세계다. --- 「독락당」 중에서 통도사의 북쪽 산 너머에 있는 평산마을이 끝나는 곳에 다소곳이 솟은 언덕 위가 집터였다. 건축가에게는, 설계를 할 목적으로 땅을 처음 방문하는 것이 너무도 설레는 일이다. 특히, 모든 건축의 해답이 땅에 있다고 믿는 나에게는 더욱 그렇다. 주어진 땅을 처음 만나는 순간 그 땅에서 건축 설계의 실마리를 발견해야 하고, 그 실마리가 파편화되지 않도록 땅의 세밀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심각한 시간이다. 그래서 새로운 땅에 가기 전 깨끗이 몸을 씻는 습관이 생기기도 했다. --- 「만취헌」 중에서 정기용 선생은 척박한 건축 환경을 지닌 땅에서 바른 건축가의 자세를 지키며 그 지평을 넓혔다. 우리 사회에 드물었던, 소위 인문적 건축가의 전형이었다. 또한 험하고 낮은 곳에서 일상을 사는 이들, 소외된 이들의 행복을 만드는 데 누구보다 더 골몰한 사회적 건축가였으니, 기득권에 안주하며 희희낙락하는 우리에겐 그의 삶 모두가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그래서 또한 아웃사이더 기질이 풍부했던 노 대통령과 죽이 잘 맞았을 게다. 설계하는 동안 대통령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지만 결국은 건축가의 결정을 따른다고 정기용 선생은 기뻐했다. 좋은 건축은 좋은 건축가가 만들지만, 좋은 건축가는 좋은 건축주가 만드는 법이다. --- 「대통령의 집」 중에서 무덤은, 죽은 자를 기억하며 남은 자인 우리를 성찰하는 게 그 본령의 기능이며 진실인 게다. 다시 말하면 무덤은 결국 우리, 산 자를 위한 시설이며 그렇게 조성하는 게 옳다고 여겼다. (…) 다시 말하면, 삶과 죽음이 만나는 공간, 그렇게 매개하고자 늘 비어있는 광장의 공간. 그 월대의 광장을 여기에 만들어야 했다. (…) 길을 거닐거나 머물면서 바닥에 새겨진 글들을 읽기도 하고, 물길을 건너며 부엉이바위를 응시하고, 또는 그 거친 들판에 홀로 서서 망연자실하기도 하는 모습, 틀림없이 스스로 위안하며 성찰하는 풍경이다. --- 「노무현 대통령 묘역」 중에서 왜관역 부근에 위치한 이 수도원은 수차례의 도시 계획으로 많은 땅이 잘려 나갔지만 현재에도 2만 평이 넘는 땅 위에 정통적 수도원에 요구되는 각종 시설을 완벽히 갖춘 모습으로, 이른바 스스로 추방한 자들을 위한 마을이며 평화가 가득한 곳이다. 피정센터의 설계를 의뢰받고 맨 처음 방문했을 때, 마치 중세 시대 유럽 지역에서 최대 세력을 자랑하던 프랑스 클뤼니 수도원을 이 땅에서 보는 듯 혹은 생 갈렌 수도원의 도서관에서 발견된 수도원 도면의 실체를 보는 듯 큰 감동을 받았다. 이 땅에도 이런 시설이 있다니…. 무엇보다 소명을 받아 스스로를 이곳으로 추방하여 정진하는 100명에 가까운 수도자들, 순명하는 그들의 삶을 보며 감사하고 감사했다. 이 세상에 아직 희망이 있구나….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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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고통을 덜어내고 활기를 불어넣는 진실한 공간,
사유하고 성찰하는 건축이 지닌 힘 ‘영성’이라 하면 종교를 먼저 떠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승효상은 종교적 의미로서 영성뿐 아니라, 비윤리적인 사회와 천박한 자본주의에 항거하는 의미로서 고요와 묵상, 사유와 성찰, 평화와 연대를 포괄하는 영성이 지닌 아름다움을 말하고자 한다. 승효상이 정신적 가치를 궁구하고 영성의 풍경을 짓고자 하는 것은, 그 자신이 맑은 영성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외려 탐욕, 위선, 나태, 교만, 분노 등 자신의 과오 속에서 고통받으며 괴로워한다고 고백한다. 번민과 숙고를 끝없이 거듭하기에, 더 절박하게 영성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영성을 향한 승효상의 여정에 공감할 수 있는 이유다. 현대인은 숙명처럼 찾아드는 걱정과 근심 때문에, 대개 불안과 미움을 안고 산다. 이 고통을 덜어낼 수 있다면, 사유하고 성찰하는 건축 풍경에, 영성의 장소에 시간을 내어 머무를 만하지 않을까. 『솔스케이프』에서 승효상이 다루는 주요 장소는 모두 국내다. 아울러 승효상에게 설계를 의뢰한 건축의 위치가 대부분 무리하지 않고 동선을 이을 수 있는 곳이어서 경로를 짜기에 수월하고 현실적이다. 게다가 지은이가 동선과 숙박도 자유로이 정할 수 있도록 가이드하고 있어,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정주하고 싶을 때 자신의 여건에 맞추어 떠날 수 있다. 또한 책에서 다루는 장소는 수목원, 옛집, 묘역, 주택을 비롯해 성지, 성소, 교회와 성당, 수도원, 절 등의 종교 건축까지 다양하다. 승효상은 일상에 지친 우리가 손쉽게 찾을 만한 곳을 다채롭게 제시하는 한편,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명상과 사유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책에서 소개하는 장소는 각각 개성적이고 특별하게 자리하지만, 일상에서 벗어난 경험을 통해 다시 일상적 삶으로 나아갈 힘을 주는 성찰적 풍경이라는 점에서 같은 범주에 놓인다. 『솔스케이프』는 스펙터클한 장면을 연출하는 건축보다, 빛과 어둠의 변주만으로 명상을 일으키는 건축이 더 큰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유하고 성찰하는 건축 풍경이 지닌 깊은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번잡함을 벗어나 고요하고 단단하게 내면에 집중하는 마음을 마주할 수 있다. “건축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우리 삶의 배경이 되도록 단순하게 하고 침묵해야 한다.” 건축이 부동산으로 치환되고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에도, 승효상은 건축이 지닌 힘을 믿고 건축에 스민 사유의 힘을 믿는다. 좋은 건축이, 좋은 삶을 만들기 때문이다. 『솔스케이프』에 새긴 여정을 따라 걷다 보면, 지은이와 같은 믿음을 품게 된다. 물론 승효상의 건축과 말은 상대를 현혹할 만큼 화려하지 않다. 도리어 빛과 어둠, 노출콘크리트 정도만으로 기꺼이 설명될 만큼 정직하고 명료하다. 진정성은 가장 단순한 형태에 깃드는 까닭일까. 간명한 공간이 주는 파장에 한층 강렬하게 설득되고 감응하게 된다. 150여 장의 도판을 포함한 이 책의 본문이 오직 흑과 백의 조화로만 이루어진 것도 한 맥락에 있다. 책에서 마주하는 건축 풍경은 흑백이기에 더욱 진실한 공간으로 다가온다. 장소가 지닌 의미도 한결 깊어진다. 승효상이 전하는 건축 풍경을 좇다가 어느새 건축가와 같은 마음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승효상 사유의 근거이자, 믿음의 증명이다. 건축가를 이끈 영성의 건축 풍경, 독자의 발걸음으로 직접 새길 영성의 지도 군위 사유원, 하양 무학로교회, 경주 독락당, 양산 통도사와 만취헌, 부산 구덕교회, 김해 봉하마을, 밀양 명례성지, 칠곡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모두 이으면 400킬로미터에 가까운 여정이다. 마치 순례하듯 떠날 수 있는 이 길을 승효상은 ‘영성의 지도’라 이름한다. 『솔스케이프』는 세부적으로 서른 곳에 이르는 건축을 소개하며, 크게는 아홉 장소로 구분할 수 있다. ㆍ사유원: 대구 군위에 있는 수목원이다. 건축가 승효상을 비롯해 알바로 시자, 최욱 등이 짓고 조경가 정영선과 가와기시 마쓰노부 등이 꾸민 공간으로 이미 많은 이가 관심을 지니고 방문하는 장소다. 배우 김지원과 김수현이 주연한 드라마 〈눈물의 여왕〉에 등장하면서 새삼 더 주목받았다. 자연과 건축의 조화는 물론이고 장소가 주는 사유와 성찰의 의미를 되새기는 곳이다. 침묵 속에 자연의 한 조각이 된 듯한 낯선 경험을 할 수 있는 ‘현암’, 가설적 무대 장치처럼 만든 ‘사담’, 보이지 않는 전망대 ‘명정’, 저수조이지만 별을 보는 장소처럼 건축한 ‘첨단’, 폐허의 수도원 ‘와사’, 새들의 수도원 ‘조사’, 경계인을 위한 처소 ‘고침정사’, 최욱이 건축한 ‘가가빈빈’, 알바로 시자가 건축한 ‘소요헌’과 ‘내심낙원’, ‘소대’ 등이 모두 사유원에 있는 건축이다. ㆍ하양 무학로교회: 하양 지역의 작은 교회다. 진리 속에 자유하고자 하는 이들의 집으로, 교회 건축의 본질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ㆍ독락당: 경주에 있으며, 회재 이언적이 살던 옛집이다. 조선 시대 건축이지만 마당을 주축으로 하는 다중심의 공간 구조를 지녀, 민주주의 시대에 더욱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장소다. ㆍ통도사: 양산에 있는 통도사는 삼보사찰 가운데 하나이며, ‘산사’라는 이름 아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절이다. 특별한 도시 조직과 같은 건축으로, 그 크기와 구성이 절묘한 공간이다. ㆍ만취헌: 역시 양산에 있으며, 19대 대통령 문재인의 사저다. ‘더디게 자라는 시냇가의 소나무, 울창하게 늦도록 푸르름을 머금는다’라는 의미의 당호에는 퇴임 후 평화하며 살라는 건축가의 바람이 담겼다. ㆍ구덕교회: 부산에 있다. 지은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로, 건축가로서 본바탕을 세운 건축적 체험을 되새기는 곳이다. ㆍ봉하마을: 김해에 있으며, 연간 100만 명이 찾는 노무현 대통령 묘역으로 잘 알려진 지역이다. ‘지붕 낮은 집’이라 부르는 노무현 대통령 생전 사저는 고 정기용 건축가가 지었다. 좋은 건축가는 좋은 건축주가 만든다는 말을 곱씹게 하는 장소다.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은 주변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경사진 광장의 풍경으로서 ‘일어서는 땅’을 표현하여 노무현의 정신과 가치를 건축으로 받아내고자 했다. 노무현 대통령 묘역은 시민의 추모 글을 새긴 판석이 지문처럼 덮여 있으며, 종묘의 월대처럼 죽은 자와 산 자가 마주하는 성찰적 풍경을 형성한다. ㆍ명례성지: 밀양에 있다.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를 기념하는 장소로 오래된 한옥 성당과 새로 지은 기념 성당이 조화를 이루며 평화를 기린다. ㆍ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칠곡에 있으며, 역사가 깃든 성당과 최근 완공한 승효상 건축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는 장소다. 100명에 이르는 수도사가 순교와 헌신의 정신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수도원에서 숙박할 수 있는 시설인 ‘피정센터’는 경계 밖의 삶을 동경하는 이들이 잠시나마 일상을 벗어나고자 할 때 찾을 수 있는 피정의 장소로 설계되었다. ‘경계 위의 집’이라고 이름하였으며, 침묵으로 둘러싸인 독방에서 홀로 묵상하며 머무르는 곳이다. ‘마오로관’은 1957년 지어진 건물로, 시간의 때를 감추기보다는 그대로 드러내며 원형을 복원하는 것을 리모델링의 긴요한 과제로 삼았다. ‘수도자 쉼터’는 기존 도로변 담장의 대나무 숲과 일체화한, 이른바 ‘장소가 만든 건축’으로 지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