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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마음이 하는 일 제1부 포기하지 않는 마음 ― 박지영, 이현석, 김연수의 소설이 가닿는 곳 기록으로서의 소설, 소설로서의 기록 ― 은폐된 폭력의 구조와 저항의 목소리 유실된 인간, 혹은 가능한 역사 너머 ― 조해진과 최은영의 소설이 말해 주는 것들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해야만 하는 것 사적 기억의 역사, 그 사소함의 윤리 ― 윤성희와 김금희의 소설을 중심으로 기억하고 기록하며 갱신하는 ― 2010년대 시의 존재론 기록자들 시대 감각 ― 이서수, 한정현, 최진영의 동시대성 제2부 우리가 가야 할 ‘우리’라는 길 강제된 경계로부터 탈주를 소망하다 ― 2020년 신춘문예 당선 시 단상 시와 시인 그리고 플랫폼 상상된 믿음에서 탈영토화하기 비장소로서의 장소 책이 지녀야 할 물음들 ― 문학의 유통에서 문학의 소통으로 거기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제3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 비인간 동물과 인간 동물의 관계 맺음, 그 다른 세계의 가능성 우리 삶의 너른 토대를 위하여 ― 반려동물과 인간의 ‘관계’ 포스트휴먼 주체의 공감과 뉴-노멀 시대의 이야기 ― 천선란 소설을 중심으로 당신의 이웃은 어디에 있나요? 정상가족이라는 상상공동체 경계 너머 ― 문지혁, 박유경, 장희원, 성해나의 문학적 실천에 관하여 선량함이라니요, 납작하게 뛰어넘어요 에필로그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수록 작품 발표 지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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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고립과 고독으로 점철된 피폐한 삶일지언정 우리의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 예전에도 틀린 적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서 ‘형편없는 일’로 삶을 수두룩 빽빽하게 채워도 괜찮다. 그것은 삶을 다채롭게 만드는 근사한 일이 될 것이다. 또한 그 곁에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이곳에서 함께였다는 사실만큼은 진실이라는 것, 그럼으로써 타인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손 내밀어 닿고자 하는 마음을 경주해 나갈 필요가 있다.
--- p.42 「포기하지 않는 마음」중에서 문학이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그것의 정치적 힘을 과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은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통해 과거의 시간 속에서 부유하는 존재를 ‘단 한 사람’의 기억이라는 빛으로 호위하며 지켜낼 수 있다고 말한다. 잊지 않는 것, 언제까지나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고립된 저 ‘유실물’의 세계에서 벗어나 함께 살아가는 삶을 상상할 수 있다는 어쩌면 서글픈 전언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전언에 응답해야만 하는 이유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환멸로 남겨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하나하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p.87 「유실된 인간, 혹은 가능한 역사 너머」중에서 문학은 문학의 앞에 놓인 길을 그저 걸어갈 것이다. 그것이 리얼리즘의 형태든, 모더니즘의 형태든, 참여의 논리든, 순수의 논리든, 그 모든 문학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삶과 사회적 요구를 담아낼 것이다. 부조리하고 차별적인 현실의 폭력을 기록하고 이를 가시화하려는 의지가 문학적 수행의 방식으로 가속화되는 한편에서 문학은 그 곁에 나란히 놓여 있는 개별적 존재들의 사적 기억의 역사를 재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사적이며 공적인 기록으로서 문학은 여전히 지속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p.123 「사적 기억의 역사, 그 사소함의 윤리」중에서 제도에 복속된 체제 내의 자유가 아닌 제도 바깥을 상상하고 이를 수행할 때, 비로소 작가는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을 작가로서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정체성은 결국 글 쓰는 사람이다. 그것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도록, 문학권력에 기입되거나 재영토화, 탈영토화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 선택과 배제를 넘어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 어렵고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천천히 가다 보면 가보지 않은 그 길이 새로운 공간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 p.237 「상상된 믿음에서 탈영토화하기」중에서 작가, 독자, 동네 책방, 문학단체 및 문화재단, 더 나아가 지자체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수행이 필요하겠지만, 단자화되고 고립된 개인적 삶에서부터 벗어나 자신이 발 딛고 경험하는 삶의 장소로부터 현실적, 사회적 응전력을 발휘하여 생산하고 교류하며 소비하는 지역 공동체에의 상상이 요구된다. 그것이 로컬을 수행함으로써 로컬이 되는, 지역문학이라는 제한된 상상을 돌파할 가능성 마련의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 p.285 「거기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중에서 너무나 당위론적인 말이겠으나 이 지구상에서 ‘우리’로 연대할 존재가 인간 동물만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수나우라 테일러가 자신의 보호견과 맺는 관계 속에서 느낀 기분은 감상적인 상태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성찰과 타자를 향한 윤리적 실천으로 이어진다. 상호의존적인 ‘우리’가 서로 관계 맺고 서로가 서로를 돌봄으로써 만들어갈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꿈꿔본다. --- pp.308~309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중에서 글을 쓴다는 것, 문학을 한다는 것은 난처하고 곤혹스러운 존재인 자신을 스스로 환대하며 구체적 장소를 마련하고 이를 자신이 그려내는 인물에 투사하여 그를 보듬어 존재론적 전회를 수행하는 것이며 거기에 멈추지 않고 바깥에 편재하는 존재들의 황폐한 내면을 돌보는 일일 것이다. 문학이라는, 소설이라는 구체적 장소로부터 맺는 관계가 이끌어 나갈 중층적 공간의 가능성이 ‘새로운 단어’로 실재가 되는 순간을 희원해 본다. --- pp.388~389 「경계 너머」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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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첫 평론집의 서문을 쓰는 일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언어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거창한 수사로 혹은 내밀한 사적 언어로 문학적 지향을 펼쳐낸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정작 쓴 문장이 첫 평론집의 서문을 쓰는 어쩌고저쩌고라니. 무능의 언어로 서문이 점철되어 평론집 전체가 폄훼될까 두렵기까지 하다. 평론이란 것이 텍스트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이를 우리의 관계 속에서 사유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이해란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보는 시각만큼 빗나가거나 억지스러운 데가 있는 것이라서 오해와 오독의 기록을 내어놓는 것이 아닐까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무의식의 층위에서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을 들여다볼 용기가 필요하다. 두 개의 장면에서 나의 평론은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서울 신사동 어느 극장에서 본 허진호 감독의 1998년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오프닝 시퀀스. 주인공인 정원의 얼굴로 조금씩 다가가는 빛을 보는 순간, 저 장면을 글로 풀어내고 싶다는 어떤 기대로 충만했다. 빛에 담긴 환희와 그로 인한 불안이 정원의 남은 생에 미친 영향과 같은 글을 말이다. 또 다른 장면은 2003년 정이현 작가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펼쳐 “나는 레이스가 달린 팬티는 입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유리와 마주하는 때였다.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유리를 내모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그 순간, 이전까지 영화비평 공부에 매진했던 나는 문학평론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시절의 나는 평론이 그저 주어진 텍스트를 해석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둘러싼 세계로 시계를 확장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를 분열의 시간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생활을 위한 방편으로서의 일들을 하며 겪는 세계에서 나는 내가 쓰려고 했던 언어에서의 소외를 경험해야만 했다. 그것은 세계가 요구하는 방식의 언어를 체화함으로써 내가 원하는 언어로부터 멀어져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분열의 감각을 회복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극장에 앉아 어떤 충일함을 경험했던 때로부터 이십 년이 지나 평론가로 등단할 수 있었던 것을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어쩌면 그 이전에 시인으로 등단한 것이 회복의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 2024년 가을 이병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