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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식과 과감한 생각은 우리를 둘러싼 벽을 더욱 견고히 할 뿐이다. 때로 참을 수 없는 밀실공포증이 밀어닥칠 때, 우리는 벽에 머리를 찧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로 다시 본래의 감성과 이성을 되찾게 된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에 기대어 그 안에서 빠져나올 도리가 없다. 그것은 머리카락에 의지해 자신의 몸을 일으키려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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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빠져나가버린 오래된 종교들은 과실을 맺을 수 없는 겨울나무에 열린 무화과를 닮았다. 의식 저 깊은 곳에서 최대한 좋은 말들을 다 끄집어 내어 어린양들을 안주시키려는 언변 유창한 사제, 살이 피둥피둥한 주고, 마냥 다정한 목사와 유대교의 랍비, 삭발한 중은 지난 시간동안 길을 잃고 신마저 잃었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이라곤 이름과 이미지밖에 없다. 그 이미지라는 것도 자신의 이미지를 본뜬 것이고, 이름에는 파리만 들끓고 있다. 신. 다른 이름을 붙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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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로서의 인간의 존재의미는 무엇인가?
르네 바르자벨의 사유는 아주 단순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피어나는 꽃과 번식하는 동물들을 보며 생식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인간 역시 다른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받은 생명을 다시 전달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인간의 합리적 이성(理性)은 생명의 고리가 이어지는 데에 공헌하지 못한다. 인간은 스스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그 환희로 전율하지만, 그것 역시 삶이 자신을 존속시키기 위한 ‘배려’로 만들어낸 또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세포에 내재되어 있는 정보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움직임은 생명이라는 경이로운 존재의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다. 만약 개체가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면 이 세계는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한낱 전달자에 지나지 않는다면 인간의 존재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질문마저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저 산송장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의 주인인가? 인간은 스스로를 운명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지만 그 사실을 망각하고 제 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법칙에 굴복해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제1법칙, 즉 균형의 법칙이다. 여기서 바르자벨은 매우 재미있는 동시에 섬뜩한 예를 든다. 그것은 시베리아에 서식하는 보박이라는 설치류의 예이다. 천적인 늑대가 인간들의 무차별한 사냥에 의해 멸종 위기에 처하자 보박의 개체수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다. 마침내 개체수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그들은 차가운 북극해를 향해 여행을 떠난다. 그들은 개체수를 유지하기 위해 자살을 택한 것이다. 그렇게 죽기 위해 떠나는 그들의 모습은 무구한 기쁨에 들떠 있다. 어떤 자연의 신비가 그들이 그와 같은 방법을 택하도록 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우주는 그렇게 작동하여 균형을 유지한다. 바르자벨은 인간이 일으키는 전쟁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그러나 생존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보호에 탁월한 인간에게 현대의 전쟁은 부조리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행복을 안겨준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합리화한다. 창조의 신비를 이해하는 것만이 진리를 되찾는 길 바르자벨은 생명의 신비와 인간의 존재이유를 규명해줄 존재로 신(神)을 언급한다. 세상의 모든 질서를 주관하는 것은 신이다. 신은 인간으로 진화한 세포에 정보를 심어놓고 생명의 거대한 순환고리를 작동시켰으며, 인간을 고통과 번민에 몰아넣었다. 그가 창조한 생명이라는 것은 고통이자 살생인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살생이 생명의 첫째 조건이다. 인간은 생명체가 겪는 끔찍한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종교에 의지한다. 그러나 진리는 이미 퇴색해버렸다. 종교가 수천 년에 걸쳐 생명의 명료한 진리를 왜곡해왔고, 인간은 규정할 수 없는 존재를 자의적으로 해석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이다. 그렇게 진리는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져갔고, 우리가 추구하는 본질적인 선과 질서는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바르자벨은 잃어버린 그 진리와 선을 되찾자고 말한다. 그는 분명한 어조로 써내려간 한 권의 책과도 같은 이 우주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창조와 계시의 신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진지하게 본질에 다가서고자 하는 천진한 의문의 시선만이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만물의 영장 인간, 인간의 선택에 미래가 달렸다 종들간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인간은 지금 진보의 정점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인간 앞에 전혀 새로운 시대가 열려 있다. 바르자벨은 다시 묻는다. 우리가 자란 요람 안에서 우리 자신의 영민함과 어리석음으로 자멸할 것인지, 아니면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 속으로 도약할 것인지. 그리고 덧붙인다. 바로 그 선택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다고. 1966년에 초판이 나온 『야수의 허기』가 제기하고 있는 의문은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구태의연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바르자벨은 피리 소리에 홀려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쥐떼와도 같은 우리에게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적이고도 심오한 문제를 던지고 있는 그의 어조는 결코 무겁거나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따뜻한 유머와 위트가 넘치고 문체와 표현 또한 생생하고 직접적이다. 독자들은 이 책 안에서 자신의 사유를 다시 한번 정리하면서 작가가 제기한 문제를 공유하고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