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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의 공주와 무사
해상의 쾌인 안용복 활인수 황진이 후백제왕 견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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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몸이 꽃이면
부는 바람에 날려 저 담장을 안 넘으리 넘어서 길바닥에 우수수 떨어져 밟히지나 않으리 가셨다 오시는 길이나 오셨다 가시는 길에 매양 밟히지 않으리 백제(百濟)의 서울 부여성(扶餘城)의 의자왕궁(義慈王宮)은 마치 은행꽃 위에 떠있는 부성(浮城) 같이 수천폭이라는 은행나무 밭속에 둥실 솟아 있는데, 때가 마침 하사월 초순(夏四月 初旬)이 되어 쌔하얀 은행꽃들이 왕궁에서 피기 시작하여 팔백 여든이나 되는 절간과 백만장안의 가가호호(家家戶戶)에 안개가 낀 듯이 자욱히 끼어있으며 그 위에 후눅후눅한 사월 남풍(四月 南風)이 불어 넘칠때 마다 가지마다 피어 있던 꽃잎들이 눈보라 치듯 우수부 떨어져 길에나 담장에나 노새등에 아낌없이 쌓였다. --- “정열의 공주와 무사” 중에서 황진이(黃眞伊)라 하면 송도삼절(松都三絶 〓 徐花潭[서화담]의 擧行[거행]과 박연폭포(朴淵瀑布)의 勝景[승경]과 黃眞伊[황진이]의 美色[미색])의 하나로서 조선왕조 오[五]백년 간의 대표적 명기임은 누구나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인물이 천하절색일 뿐 아니라 문필이 또한 절등하였었다. 나이 이팔[二八]방년에 이르매 그의 아리따운 소문이 국내에 자자하니 누구나 그를 한번 보기를 원치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중에도 그 이웃에 사는 한 청년이 누구 보다도 더욱 그를 연모하여 주야로 그를 한번 만나보려고 가진 수단과 방법을 다 썼다. 그러나 그때만 하여도 내외법이 극히 엄격한 중 황진사 집은 개성에서 원래 문벌이 당당한 명문가이기 때문에 비록 사생녀인 황진이라도 외간남자로서는 도저히 그 문호도 엿볼 기회를 얻을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그 청년은 다만 혼자 심화만 태우다가 결국 그 빌미로 병이 들어 가련한 청춘에 천고유한을 품고 영원한 나라로 드디어 가고 말었다. 그의 집에서는 울며 애통을 하고 초종 범백을 치른 다음에 북망산으로 매장을 하러 가게되었다. 상엿군들은 그의 상여를 메고 발을 맞추어 --- “황진이”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