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프랑수아 라블레(Francois Rabelais, 1483~1553)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리스·로마의 고전에 정통한 인문주의자, 수도사, 그리고 외과의사로서 16세기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활동한 프랑수아 라블레는 후대의 프랑스 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16세기 프랑스 문학에서 소설 분야는 그의 작품의 발표 전과 후로 구별해야 할 만큼 동시대의 작가들은 그를 모방하려고 애썼고, 이후 희극적 계열의 소설은 그의 작품을 토대로 형성되었다는 게 지배적 해석이다. 물론 플레이아드 학파의 ‘롱사르’ 같은 시인은 "진흙탕 속을 뒹구는 술주정뱅이"라고 지칭하며 라블레의 파격과 자유분방함을 비판했지만, 이는 오히려 라블레 작품 속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는 민중 문화적 속성과 새로운 글쓰기의 형식적 실험을 정확하게 짚어낸 것으로 이해되었다. 18세기 이후 프랑스 문학의 대가들 대부분은 그의 작품을 프랑스 문학의 위대한 유산으로 높이 평가했다. 세계적 문호 빅토르 위고는 그를 두고 "인간 정신의 심연"으로, 발자크는 "피타고라스, 히포크라테스, 아리스토파네스, 단테를 요약한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스승"으로 높이 평가했다. 문학의 순수성을 강조한 플로베르 역시 그의 작품을 "인생처럼 신비에 가득 찬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작품의 내용 및 문학적 의의 흔히 팡타그뤼엘[원래 ‘팡타그뤼엘’이라는 이름은 취해서 잠든 술꾼들의 입 안에 소금을 뿌리고 다닌다고 알려진 중세 전설에 나오는 장난꾸러기 악마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라블레는 이 인물에게 ‘목마른 자들의 지배자’라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다. 이 ‘갈증’은 보다 나은 삶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연작이라고 통칭되는 라블레의 소설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인 『팡타그뤼엘』이 1532년 발표된 것을 시작으로 작가 사후에 출판되어 아직까지 그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제5서』에 이르기까지, 라블레 소설은 동일한 인물들과 사건의 연계성으로 보면 연작임에 틀림없으나 오랜 기간에 걸쳐 씌어진 탓에 초기와 후기의 작품들 사이에는 상당히 큰 차이가 나타난다. 전설적인 거위 팡타그뤼엘과 그의 아버지 가르강튀아의 행적을 다룬 환상적인 연대기인 『팡타그뤼엘』과 『가르강튀아』에 비해서 특히 『제3서』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주제나 서술 방식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사건 중심의 이야기 전개에 익숙한 일반 독자들은 라블레 소설 하면 으레 초기의 두 작품인 『팡타그뤼엘』과 『가르강튀아』를 먼저 떠올린다. 이들 작품에서는 이미 거인왕의 행적에 관한 서술(narration)보다 화자의 사설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라블레 특유의 글쓰기 방식이 나타난다. 주인공의 출생, 성장, 교육, 전쟁에서 무훈 등의 순서대로 기사도 소설의 틀에 맞게 사건이 전개되지만, 이야기는 기본 줄거리와 상관없이 독자를 상대로 화자가 엮어나가는 ‘대화’와 ‘여담’을 통해 계속 새로운 방향으로 확장되어나간다. 라블레 소설에 자주 나오는 장터의 장사치나 다름없는 이야기꾼의 거친 입담이나 욕설, 철학적 주제에 대한 현학적 문답, 시나 편지, 웅변 등의 다양한 문체와 횡설수설 같은 말의 유희, 여러 인물들이 들려주는 별개의 일화들, 빈번한 고전의 인용과 궤변적 해석 등은 이야기 중심의 대중소설과는 달리 지적 담론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려는 작가의 의도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전설적인 두 거인왕의 출생에서 영웅적 활약상으로 이어지는 연대기 형식의 작품으로 당시 프랑스의 지적 풍토·종교·정치·사회 상황을 충실히 반영하고, 프랑스 르네상스의 이상과 염원을 형상화한 걸작이다. 주인공인 거인들은 단지 신체적 크기, 힘, 식욕 면에서뿐 아니라 그들의 지적 능력, 정신적 깊이에서도 초인의 풍모를 갖추고 있다. 그들의 학문적 성취는 바로 인문주의의 이상을 실현한 것이며, 그들의 지적 탐구와 삶의 지혜를 얻으려는 노력은 현세적 삶 속에서 행복과 진실을 추구하려는 인간 중심적 가치관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라블레는 그가 처해 있던 시대 상황을 충실히 재현한 작가이면서도, 새로운 글쓰기라는 측면에서 현대의 작가 누구 못지않게 다양한 시도를 펼쳐 보였다. 이는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문제를 넘어서서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새로운 글쓰기라는 현대 문학의 본질적 문제를 시대를 앞서 제기했던 작가답게 그의 작품은 언제나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앞서 언급했지만 라블레의 작품은 지적 탐구, 철학적 사변 등 고상한 주제와 인간의 육체, 물질과 관련된 상스러운 외설과 해학, 풍자 등의 이질적 요소들이 무질서하게 혼합된 듯한 인상이 강하다. 이는 20세기 러시아의 대표적 문예비평가 바흐친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그로테스크한 사실주의”로 민중문화의 전통을 계승한 그의 작품 세계가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지 않고 모든 대립적 가치들이 커다란 웃음의 세계 속에 용해되는 이상향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문학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라블레의 작품은 육체적 쾌락의 중요성과 현세적 삶에서의 행복 추구를 역설하는 동시에, 자유로운 민중문화의 정신과 힘찬 생명력이 그대로 살아 있는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